흥선대원군 시대의 또 다른 얼굴, 신헌 / 한보람
- 한국연구원
- 9월 12일
- 4분 분량
‘대원군 집권기에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 글자는 우레처럼 온 나라에 매섭게 몰아쳤다.’
흥선대원군 시대를 살았던 매천 황현의 증언이다. ‘대원위분부’, 이 말은 글자 그대로 ‘대원군이 분부하시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원군 이전 왕이 내리는 교령은 ‘왕이 말하노라’는 의미의 ‘왕약왈(王若曰)’로 시작했다. 하지만 대원군이 집권한 10년 동안 대원군의 분부는 왕명을 대신했다.
1863년부터 1873년까지의 시기는 흔히 ‘대원군 집권기’라 불린다. 조선은 왕조국가였고, 1863년에 즉위한 국왕은 대원군이 아니라 그의 아들 고종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엄밀히 말해 ‘고종 초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대원군의 시대로 익히 알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근대사에서 대원군이 차지하는 위상이 큼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때 그 10년이 흥선대원군이라는 한 명의 인물로 상징될 수 있는 시대였을까? 한 개인의 인생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하물며 그 개인들이 모인 역사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근대사의 다양한 얼굴들을 찾아가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쇄국’과 ‘개항’ 사이, 신헌이 있었다.
신헌은 흥선대원군 집권기 대표적 무관이자 대원군의 권력 기반을 이루었다고까지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헌은 훈련대장, 판삼군부사 등 대원군 정권의 요직을 역임하며 대원군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강경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총융사로서 염창항(鹽倉項)을 지켰다. 대원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주요 요직을 맡은 경력 때문에 지금까지 신헌은 자연스럽게 대원군 세력으로 분류되어 왔다.
그런데 ‘쇄국’의 상징 대원군과 행보를 함께 했던 인물로만 신헌을 규정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그는 강화도조약 체결의 책임자로 조선의 ‘개항’을 이끌어낸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쇄국’과 ‘개항’, 상반된 두 시대의 제일 앞자리에 신헌이 서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신헌 초상> [출처: 충청북도지]](https://static.wixstatic.com/media/e687c0_6edfbfe4221e4f5eb5870a87536ced87~mv2.jpg/v1/fill/w_355,h_507,al_c,q_80,enc_avif,quality_auto/e687c0_6edfbfe4221e4f5eb5870a87536ced87~mv2.jpg)
신헌, 대원군의 영입인재였나?
대원군은 왕보다도 강력한 권한을 갖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 과정에서 신헌은 대원군의 가장 적극적인 포섭 대상이었다. 대원군 집권기에 무반이 병조판서가 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고, 신헌은 변화된 병조판서 자격의 수혜자였다. 그의 품계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까지 올라갔다. 무관으로서 전례가 없는 최고의 대우였다.
파격적 대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신헌은 당대 최고의 명문 무관 가문의 후손으로, 조부 신홍주가 훈련대장의 지위에 있었던 17세에 이미 순조의 친위조직인 별군직에 발탁되었다. 그 후로도 그는 가문의 후광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세도정권의 독단적 정국운영을 막고 국왕중심의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개혁세력의 중심에 위치했다. 신헌은 박규수와 함께 각기 무관과 문관을 대표하는 젊은 인재로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와 헌종 친정기에 활약했다. 그리고 세도정권이 농민의 대대적인 저항을 수습하지 못하고 무너지자 대원군을 새 시대의 상징으로 후원하는 작업에 동참했다.
‘국태(國太)라고 칭하는 자가 주공(周公)의 보좌를 능가할 것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공이 아니면 누가 맡겠습니까!
신헌은 이 문장으로 경복궁 중건사업의 책임자로서 대원군의 권위를 지원했다. 경복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던 1865년 5월, 경연 자리에는 경복궁 부근 석경루 아래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라 모양의 잔 하나가 등장했다. 뚜껑에는 ‘수진보작(壽眞寶酌)’이라는 글자와 함께 ‘화산도사가 소매 속에 간직한 보배를 동방의 국태공에게 바치며 축수하노라.’라는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자리에 강관으로 참석했던 박규수는 시에 등장하는 국태공은 곧 대원군인 듯하다고 발언했다. 국왕의 사친이었기에 공적으로는 아무 권한이 없던 대원군에게 경복궁 중건공사의 총책임자라는 공식적 역할을 부여하는 일에 적극 협조하는 발언이었다.
세도정권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정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당대 개혁관료집단의 중심인물이던 박규수가 적극적으로 나섰고, 신헌 역시 그에 발맞추며 새 시대의 개막을 지원하고 있었다.
![<수진보작기> [출처: 서울역사박물관]](https://static.wixstatic.com/media/e687c0_703fca3f4d034f93aabe07525d1b6227~mv2.jpg/v1/fill/w_541,h_427,al_c,q_80,enc_avif,quality_auto/e687c0_703fca3f4d034f93aabe07525d1b6227~mv2.jpg)
신헌, 시대의 현안과 함께 걷다!
고종의 즉위로 대원군이 권좌에 오른 1863년 조선은 국가 붕괴의 위기 상황을 겨우 극복하는 과정에 있었다. 직전 해인 1862년 진주 등지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라 세도정권을 위협했다. 60여년의 세도는 정권의 위기 앞에 무력했다.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와는 거리가 있던 개혁세력에게 문제 해결의 역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장 먼저 항쟁의 최전선에서 민의 분노를 돌본 인물은 신헌이었다. 당시 신헌은 오랜 기간의 정치적 고초 끝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진주와 근거리인 통영에 부임해 있었다. 때문에 안핵사 박규수가 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항쟁의 현장에서 정부의 최초 대응을 맡았다. 그는 ‘진주감결(晉州甘結)’에서 현장 상황을 분석했다. 이 글에서 신헌은 분노하고 봉기하는 민을 국가의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다만 민생의 곤궁이 극한에 이르렀기에 국가에 호소하여 문제해결을 하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파악했다. 그에게 민이란 불만을 표출하고 있을지라도 국가 공동체를 함께 구성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집권층은 민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민을 신뢰하고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였다.

결국 민의 소요는 가라앉았고 세도정권은 물러났다. 신헌은 새 시대의 희망을 안고 대원군의 집권을 지원했다. 하지만 대원군 또한 민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천주교도 탄압과 병인사옥은 민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그 가운데 발생했던 서구의 침략, 병인양요 또한 민심을 흔드는 두려움이었다. 경복궁이 완공되고 왕실의 이어가 끝났음에도 공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민심은 악화되었다. 대원군 집권은 세도정권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더 이상 관료집단의 지원과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개혁관료집단은 반발했다. 그리고 신헌 역시 그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었다.
대원군이 개혁과는 멀어지며 독단적 정국운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1868년 시점에 신헌은 훈련대장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후로도 몇 차례의 반려 끝에 1871년 사직은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872년 신헌의 이름은 고종의 존호 추상을 요청하는 연명 상소에서 발견된다. 이 시기 대원군을 국정에서 배제하기 위한 반대원군 세력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고, 고종의 존호 추상 요청도 그 움직임 중 하나였다. 신헌은 시대의 요구와 멀어진 대원군 배척 움직임에 동참했다.
<아소당기(我笑堂記)>의 당부
신헌이 사직하기 직전이었던 1870년, 대원군은 자신의 가묘(假墓)이자 별서인 아소당(我笑堂)을 지었다. 신헌에게 그곳의 당기를 지어달라고 명할 만큼 대원군의 신임은 두터웠다. 하지만 신헌은 <아소당기>를 통해 대원군에게 무거운 충고를 전하고 있었다.
![<아소당 현판> [출처: 동도김형천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s://static.wixstatic.com/media/e687c0_aeb4962215854156b0062c5320be2912~mv2.jpg/v1/fill/w_910,h_679,al_c,q_85,enc_avif,quality_auto/e687c0_aeb4962215854156b0062c5320be2912~mv2.jpg)
“합하께서 이르시기를, ‘주야의 이(理)와 순녕의 의(義)에 사람들이 대부분 어두워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니 내가 일찍이 그것에 웃었으므로 당(堂)을 ‘아소(我笑)’라고 명명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헤아림에 통달하셨으니 모두 흠앙하고 찬송하였는데, 저만은 홀로 적이 생각하기를 합하의 웃음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하였습니다. 한 몸이 웃는 것을 웃음으로 여기지 않고 한 나라가 웃는 것을 웃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릇 사람의 정은 기쁨이 있은 연후에 웃음이 있는 것이니, 나라의 백성들이 기뻐지 않음이 없어서 웃게 하면 합하께서는 이를 기뻐하고 웃으실 것입니다.”
그는 ‘나의 웃음’을 뜻하는 ‘아소’, 즉 대원군의 웃음은 단지 본인 혼자의 웃음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웃음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원군 치하 사회적 혼란상의 지속으로 민생이 극도로 불안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 구성원 모두의 웃음이 대원군의 웃음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이어지는 서술에서 그는 대원군의 역할이 어디까지나 국왕을 보좌하는 것임을 명확히 밝히면서 다시 한 번 대원군의 웃음은 국가 전체의 기쁨과 함께 가야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 충고가 전해진 이듬해, 신헌은 대원군 정권을 떠났다.
19세기 근대를 걸어갔던 또 다른 얼굴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진천의 시골집에서 노환으로 누워있던 신헌은 병을 무릅쓰고 궁궐로 달려가 고종을 위로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 남짓 후에 세상을 떠났다. 순조대에 출생해 효명세자, 헌종, 철종대를 거쳐 고종대까지 19세기 대부분의 기간에 걸쳐 눈앞에 대두한 시대의 현안을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신중히 모색하며 국가 위기 상황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신헌은 마지막 순간까지 편안치 못한 국가를 걱정했다.
오랜 기간 한국근대사에서 19세기는 쇄국 아니면 개항, 수구파 아니면 개화파로 도식화되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이는 단순한 구도는 이면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 다양한 본질들을 정밀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19세기 조선은 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개화파, 수구파만이 아닌 또 다른 수많은 얼굴들이 빚어가고 있었다. 그 속에는 민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신뢰하고 동반하고자 했던 조선 정치문화를 이어가는 개혁세력도 존재했다. 한국 근대의 다양한 얼굴에 관심을 갖는 일은 현대 한국의 문화적 성공 기반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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