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회복 중인가? / 김동규
- 한국연구원
- 6일 전
- 5분 분량
당신은 모른다.
2024년 평온한 대한민국에서 당신은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군인들이 국회로 난입하는 것을 똑똑히 보게 되리라는 것을 모른다.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정적 제거 및 장기 집권 계획이 오랫동안 준비되어 온 것을 당신은 모른다. 계엄에 깊숙이 관여한 이의 70쪽짜리 수첩에 500여명을 ‘수집’하겠다며 구체적인 체포 계획이 적혀 있으리란 것을 모른다. “여의도 30∼50명 수거”, “언론 쪽 100∼200(명)”, “민노총”, “전교조”, “민변”, “어용판사” 등이 ‘1차 수집’ 대상이고, 거기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정청래 의원, 권순일 전 대법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방송인 김어준씨 등을 비롯해 문재인 전 대통령, 유시민 작가의 이름도 있으며, 그들의 ‘수용 및 처리 방법’, ‘사살’이라는 표현까지 있다는 것을 모른다.1)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되고 대통령 탄핵이 선고되고 새 대통령이 뽑히고, … 그러나 여전히 내란동조 세력의 준동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수거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이런 사태 진행을 목격한 사람들의 정신적 충격과 상처가 얼마나 크리라는 것을 모른다. 여의도와 광화문 집회로 조각난 집단적 정신분열의 참상을 모른다. 개인이나 국가 차원의 회복 방법을 몰라 오랫동안 헤매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당신’이란 낱말은 화자가 말 건네는 청자를 가리킨다. 앞선 문단에서 ‘당신’은 이 글을 읽는 독자일 수도 있고, 글 속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대명사일 수 있다. 이런 기묘한 화법을 능숙하게 구사한 소설이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2)이다. 이 소설에서 ‘당신’은 소설 속 특정 인물을 지시한다. 그러나 독자로 하여금 자신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리게 하는 효과도 일으켜 메시지 전달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물론 애매한 인칭 대명사 사용으로 말미암아 독자에게 몰이해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이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형식적으로는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작품 속 인물을 호명하면서 사건의 시간적 배열을 뒤죽박죽 뒤섞고 있기 때문이며, 내용상으로도 작품의 제목 「회복하는 인간」과는 달리,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로 소설이 끝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적으로 회복을 거부하더라도 끝내 회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인지, 메시지가 선명하지 않다. 작품 이해를 위해 잠시 작가의 글쓰기 문채와 기법을 걷어내고 소설의 기본 뼈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야기는 크게 3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회복하는 인간>이 수록된 [노랑무늬 영원]](https://static.wixstatic.com/media/e687c0_d0439e131f4943c382ca6265a1c988b7~mv2.png/v1/fill/w_458,h_699,al_c,q_85,enc_avif,quality_auto/e687c0_d0439e131f4943c382ca6265a1c988b7~mv2.png)
소설에서의 ‘당신’은 30대 여성으로 추정되고 라디오 대본 작가이며 ‘정 작가’로 불린다. 그녀(‘당신’)는 사랑하는 언니가 한 명 있는데(작품 속에서 언니는 ‘그녀’라는 3인칭으로 지시된다), 대학생 시절 언니의 낙태 수술에 따라 간 이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둘 사이는 소원해진다. - 이해의 편의 상, ‘당신’은 X로 언니는 Y로 표기하기로 한다. - 이 두 명의 관계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룬다.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은 X가 화상을 입는 사건이다. X는 죽은 언니 Y의 무덤이 있는 산에 갔다가 왼쪽 발목을 접질린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뜸을 뜨면서 화상을 입지만,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상처를 방치해 결국 병원 신세를 진다. 회복이 더디지만, 세균 감염된 부위에서 겨우 ‘샤프심으로 찍은 붉은 점 하나’ 크기의 새살이 돋는 것을 확인한다. 상처 난 피부 조직의 회복 가능성을 확인한다.
마지막 한 축의 이야기는 X가 자전거를 타다가 전복된 사건을 다룬다. X는 자전거 타는 일에 진심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순간만큼은 살면서 받아 온 온갖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전거를 탈 때에만, 당신의 삶이 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한 행복이 매 순간 당신을 따돌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느낌도 조용히 떨쳐졌다.3)
발목 화상 치료를 받는 중에도 자전거를 타다가 결국 천변의 갈대밭으로 나뒹구는 일이 발생한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큰 위험은 모면한다. 흙 위에 누워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4)
첫 번째 축은 X와 Y의 관계에서 빚어진 마음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과거에 두 자매는 무척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X는 Y의 낙태의 비밀을 끝까지 지켜줄 만큼 언니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 Y는 X에게 싸늘하게 대하고, 한동안 관계회복에 노력하던 X 역시 차갑게 대하기로 결심한다. 같은 배에서 나왔지만, 두 자매의 성격 차이가 크다. Y는 통념에 따라 살면서 통념의 수혜를 받는 인물인데 반해서, X는 통념에서 자유롭기에 통념의 질타를 받는 편이다. 통념상 Y는 예쁘고 착한 딸이자 잘생긴 남자와 결혼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생활을 하고 있다. 반면 X는 고집 센 딸이어서 부모로부터의 사랑과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자매의 사이가 좋을 때, Y는 (통념상) 결점처럼 보이는 X의 모습을 선망했다. 그래서인지 동생이 대학에 들어갈 때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 비싼 음식도 사주고 금목걸이도 사주고 옷도 사주려 할 정도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둘 사이가 좋을 때 X가 통념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자 Y가 그들을 변호하는 말을 한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5)
통념상 X(진보)는 Y(보수)보다 약자다. 통념에 순응하며 통념의 보호를 받는 Y가 대개 강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득권 통념 뒤에 숨어야만 하는 Y가 실은 약자일 수 있다. Y가 X를 질투하고 선망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열등감’에 있다. 이야기 속에서 Y는 아이를 가지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불치병으로 일찍 생을 마감한다. 어릴 적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가 Y가 이마를 다친 적이 있는데, 울먹이는 동생 X를 보고 이렇게 위로한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데.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6)
두 번째 이야기 축은 몸의 상처와 회복에 관한 것이다. 사고나 부주의로 인해 몸은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몸에는 38억년의 끈질긴 생명력이 배후에서 작동하기에 많은 경우 회복된다. 몸은 자연 치유력, 곧 ‘회복 본능(本能)’을 가진 셈이다. 잘린 꼬리가 다시 자라나는 도마뱀보다는 못하지만, 우리 몸은 어느 정도 자생적 복원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항생제나 레이저 치료와 같은 의학 기술로 쉽게 몸의 회복을 도모할 수 있다. 서사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자전거 전복 사고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다 몸이 상하는 경우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래서 자전거 타기와 같은 제 3의 일(온갖 잡기와 취미들)에 열중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관계가 풀리지 않는 이상, 이런 해법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몸마저 다칠 수 있다.
이 소설의 말미에는 20회 넘는 문장이 ‘(당신은) 모른다’라는 동사로 끝난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취지이다. 미래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불운한 사건들이 터지고 상처를 입는다. 동시에 회복 역시 그 예측 불가능 속에서 진행된다. 시나브로 몸이 회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라는 통념적인 위로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쉽게 그럴 수 있을까?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회복이 가능하기나 할까?
몸의 수준에서 보자면, 회복이란 이전 세포들은 사라지고 새 세포가 들어서는 일이며, 이전에 침입했던 타자(바이러스)의 유전 정보를 기억하는 면역력이 강화된 몸으로 변신하는 것을 뜻한다. 마음의 회복도 그렇다. 상처를 다시 덮어둔다(recover)고 단순히 봉합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상처를 주시하며 감염된 조직을 제거하고 이전과는 딴사람으로 갱생(更生)할 수 있을 때에야, 겨우 ‘회복 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회복, 완치는 불가능하다.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뼈를 깎는 변신을 통해 살아냄의 과정에 들어서는 것만 가능하다. 과거의 원래 그대로 돌아가는 것(통념상의 회복)을 거부하고 기성(旣成) 자기의 죽음을 욕망하여 새롭게 탄생하는, (당신은 모르는) 미지의 생(生)의 도래야말로 참된 ‘회복’이라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지금 회복 중인가?
2)한강, 『노랑무늬영원』, 문학과지성사, 2024. 단편 「회복하는 인간」.
3)한강, 같은 책, 55쪽.
4)한강, 같은 책, 64-65쪽.
5)한강, 같은 책, 52쪽.
6)한강, 같은 책,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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