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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아이러니, 역설
에드윈 애보트의 소설 『플랫랜드』(1884)의 오래된 비유를 불러와 보자. 평면의 세계에 사는 존재는 결코 높이를 모른다. 그에게 세계는 길이와 너비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것은 선과 면의 관계로만 이해된다. 만약 구형태의 입체가 그 세계에 나타난다면, 평면세계의 존재는 그것이 제멋대로 면적이 바뀌니 기적이나 착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방향이 하나 더 생기는 일, 익숙한 세계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일, 지금까지 정답이라고 믿었던 선 하나가 사실은 어떤 입체의 단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평면의 세계에서 구체는 종종 좁은데, 넓은 그래서 모순된 존재로 보일 것이다. 글쓰기에도 플랫랜드가 있다. 많은 글들이 길이와 너비만 가진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는 경쟁이 심하다”, “SNS는 인간관계를 약하게 만든다”, “명절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대학생은 취업 때문에 힘들다” 같은 문장들은 틀린 말이 아니지

한국연구원
Jun 116 min read


백아절현 - 절현(絶絃)을 강요당하는 시대 / 김동규
백아절현(伯牙絕絃)이란 중국의 춘추 시대에 거문고 명인이었던 백아(伯牙)가 자기 음악을 이해하는 유일한 지음(知音)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사성어다. 흔히 친밀한 친구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지만, 나는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구조를 알려주는 말로 새긴다. 이 말에 따르면, ‘작품(Work)’이란 한갓 물건이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 ‘작용’이다. 그것은 부름과 응답의 연쇄다. 마음과 마음을 잇는 사랑의 황금 고리이다. 그래서 작가 없는 감상자는 불가능하며 감상자 없는 작가도 존재할 수 없다. 작품의 기저에는 사랑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즉 그윽한 환대가 ‘작동’ 중이다. 나는 정현종 시인의 작품을 사랑한다. 그의 작품이 젊은 시절의 내게 느닷없이 다가왔다. 거리를 헤매던 나를 불러 세웠다. 콕 집어 내게만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부름에 응답해야 했다.

한국연구원
May 53 min read


불안정한 관계의 틈을 메우는 일 - 한남동에 문을 연 OMG 인터뷰 / 김보슬
나는 PR펌에 다닌다. PR은 커뮤니케이션과 밀접하다. 흔히 사람들은 PR을 한국어 단어 ‘홍보’로 바꾸곤 한다. 하지만 PR은 Public Relations의 약칭인 만큼 본래 대중과의 ‘관계 맺기’를 뜻하며, 메시지 전달 전략을 다룬다. 실제로 과거에 ‘신문방송학’, ‘언론홍보학’이라 불리던 학과들이 근래에는 외국처럼 커뮤니케이션학으로 분야 이름을 바꾸고 있다. 조직의 위기 대응, 정치 캠페인, 상품 브랜딩 등을 포괄하는 이 일은 결국 관계를 개발하는 일이다. 이미 과학 커뮤니케이터라는 말은 흔해졌다. 12~13년 전부터 미디어에 적극 등장했지만, 사실 칼 세이건 같은 이들이 이미 열어두었던 길이다. 이때의 커뮤니케이터는 어려운 개념을 대중이 이해하기 좋게 풀어주거나 전시, 이벤트 등과 연계하여 체감할 수 있는 관계를 창출하는 사람들이다. 미술관의 큐레이터나 해설사들 또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존재한다. PR인이 된 지금, 이 지면에서 어떤 것들

한국연구원
May 57 min read


1905년 대한제국, 황씨 부인이 하와이를 선택한 까닭은? / 한보람
1902년 12월 27일, 『황성신문』에는 ‘하와이 이민’이라는 제목으로 기사 하나가 실렸다. “인천에 체류하는 미국인이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기획하여 그 모집에 착수하였음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이는 미국인 데쉴러 씨 등이 모집했다는데, 먼저 모집에 응한 한인 54명이 이번 달 22일 일본을 경유하여 하와이로 향하였다더라.” 한국인 최초 하와이 이민자의 출항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 배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던 한국인은 총 102명이었다. 정확히는 여성 21명, 어린 아이 25명, 통역 2명, 그리고 남성 54명이었다. 같은 배로 하와이로 향했던 성인 여성이 남성의 절반 가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최초의 미주이민단은 당대 사회의 떠들썩한 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을 보도했던 대한제국의 언론 보도는 배에 타고 있던 여성들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림1]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galic호 대한제국기 하와이 이민

한국연구원
May 53 min read


부를 골랐어야 했는데 / 마준석
여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다. 어느 날 랍비가 제자들에게 강연을 하던 도중 눈부신 빛과 함께 천사가 나타났다. “너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지혜와 부 둘 중에 하나를 선사하겠노라.” 랍비는 망설임 없이 지혜를 골랐다. 천사는 다시 빛과 함께 사라졌고, 방금 일어난 일에 충격을 받은 회당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제자들은 랍비에게 몰려들었다. “스승이시여, 지혜로운 말씀을 내려주소서!” 랍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부를 골랐어야 했는데..!” 평생 지혜를 추구하던 랍비는 자신이 소망하던 것을 전도된 방식으로 획득한다. 그는 정말로 지혜로워졌는데, 다만 진리가 돈에 비하면 별 볼일 없었다는 기구한 진실을 깨달을 만큼 지혜로워졌다. 그렇지만 이 농담이 하려는 말은, 그렇기에 지혜 따위는 허울에 불과하고 삶에 있어 가치 있는 것은 돈이라는 경박한 교훈이 아니다. 이 농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가 오직

한국연구원
May 34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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