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점 사이, 빈칸으로 남은 고향 / 김보슬
- 한국연구원
- 6일 전
- 4분 분량
2022년 7월부터 약 3개월간, 서울과 목포 기반의 문화기획자들이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지역문화 활력촉진 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이름하여 ‘보물섬 지도 만들기’. 섬 어린이들이 직접 지도를 그려보는 방식으로 공간 인식을 탐구한 이 프로젝트는, 기획자들이 섬을 다니며 얻은 직관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섬 아이들이 자기 섬과 이웃 섬의 관계, 거리, 방향을 파악할 때 육지 아이들과 확연히 다른 감각을 지닌다는 점에 착안했다.
실제로 육지의 아이들은 멀고 가까움을 상상할 때 버스나 도보 시간을 단위로 삼는다. 우리 동네에서 몇 분쯤 버스를 타면 도달할 수 있는 마을이나 건물이 무엇인지, 어디를 가려면 어떤 길을 가로질러야 하는지, 그런 정보들이 머릿속 지도를 구성한다. 반면 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배편, 파도의 높낮이, 바람의 방향 같은 요소들이 더 중요한 좌표가 된다. 같은 ‘거리’라는 개념조차 전혀 다른 체계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작은 프로젝트는 사실 심리학과 지리학이 오래 전부터 주목해온 주제와도 연결된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톨먼은 1948년 ‘인지 지도(cognitive map)’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동물과 인간 모두가 머릿속에 환경의 지도를 그린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자극-반응’의 학습이 아니라, 전체 환경을 통합적으로 표상한다는 것이다. 섬 아이들의 지도 그리기 실험은 바로 이 인지 지도 개념과 맞닿아 있다.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체화된 관계망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차이가 일리 있는 흥미로운 착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현상은 단순히 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을 돌아봐도 그렇다. 나는 내륙의 한 지방 도시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추석이 다가오면 그곳으로 향한다. 부모님이 여전히 그곳에 계시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남아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도시가 나의 ‘고향’인지 스스로에게 물으면,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그 도시의 지리를 거의 모른다. 고작해야 ‘시내’뿐이다. 흔히 “지방 사람들만 ‘시내’라는 말을 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서울에서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이라는 표현의 적절성은 차치하더라도, 이 구분에는 나름의 맥락이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방 도시들은 시간이 지나며 주변 군(郡)·읍(邑)·면(面)과 통폐합되어 행정구역상 하나의 ‘시(市)’로 묶였지만, 행정기관·학교·병원·상업시설 등 도시의 주요 기능은 원래부터 중심지였던 옛 ‘시(市)’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주민들이 이 지역을 따로 지칭할 때 자연스럽게 ‘시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마치 읍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곳을 ‘읍내’라 부르듯, ‘시내’는 행정구역 전체가 아니라 실질적 생활 중심지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내 기억 속 고향 도시도 이 ‘시내’에 한정된다. 학교, 학원, 도서관, 수영장, 극장 등 내가 드나든 공간들은 모두 시내에 있었다. 그러나 그 영역을 벗어나면 길을 잃는다. 서울로 향하는 국도는 어느 쪽인지, 고속도로 진입로는 어디인지, 이웃 도시로 가는 빠른 길은 무엇인지, 네비게이션 없이는 알 수 없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알려주고 혼자 찾아다니던 안전한 공간들만이, 점처럼 파편적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도시 전체를 익숙하다고 말하기엔, 내 기억은 너무 단속적이고 불완전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울에 산 세월이 더 길다 해도, 가장 생생히 기억이 남을 나이에 지낸 곳이 고향 도시인데, 정작 그곳은 낯설다. 반대로 서울에서는 혼자 도시를 탐색하며 길을 익혔다. 금화터널을 지나 경복궁으로 가는 길, 신촌 로터리를 지나 같은 곳에 도착하는 길, 이런 복수의 경로가 곧바로 머릿속에 맵핑된다. 같은 머리를 쓰면서 왜 고향에서는 길치가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내 고향은 오히려 서울이라 해야 하는가? 그러나 서울 역시 유년기의 정서적 기억이 빈약하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장소성(place attachment)’이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인간이 단순한 공간(space)을 살아가며 경험과 감정을 덧입힐 때 비로소 ‘장소(place)’가 된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태어나거나 거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고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복된 경험, 관계, 감정의 누적이 필요하다. 나에게 서울은 생활의 편의와 구조적 이해가 가능한 공간일 뿐이고, 지방 도시는 추억의 파편은 있으되 관계가 단절된 장소다. 결국 두 공간 모두 아직은 온전한 ‘고향’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고향이라 부르려면, 단순히 길을 찾는 기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학창 시절에 드나들던 문구사 이름, 거기서 팔던 인기 아이템들, 학원 버스를 기다리던 골목, 엄마와 장보던 시장, 매일 같은 장소에 모여 있던 할머니들의 모습, 그리고 그 기억을 함께 공유할 친구들.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쌓여야 비로소 ‘내 고향 서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된 뒤 알게 된 어느 초등학교의 위치나, 교통 체증 구간, 아파트 시세 변화 같은 정보는 그저 성인으로서의 생활 지식일 뿐이다. 출생지이자 현재의 거주지라는 사실만으로는 서울을 고향이라 부르기 어렵다.





이리하여 나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두 도시 어느 곳도 내게는 고향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예감한다. 내가 유년을 보낸 그 도시가 언젠가 진짜 고향이 될 것임을. 아마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일 것이다. 그 순간, 어린 날 가족과 함께한 기억이 그 도시를 새롭게 채색할 것이다. 지금은 심드렁한 기차역, 거리, 대형마트, 공원, 아파트 단지가 그때는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의 표지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이 멀고 낯설고 부담스럽지만, 그 모든 풍경이 상실의 순간에 ‘돌아가고 싶은 고향’으로 변할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조금은 슬프다.
사실 이는 단순히 나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는 새로운 형태의 ‘탈향(脫鄕)’을 보여준다. 예전의 탈향이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물리적 이동’을 의미했다면, 지금 세대의 탈향은 ‘관계의 단절’과 ‘기억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고향에 부모가 살아 계셔도, 그곳 공동체와는 이미 접속이 끊긴 상태. 명절 귀향길의 풍경도 달라졌다. 자동차 행렬 대신, 빈집이 늘어난 시골 마을, 비어 있는 역 대합실이 새로운 탈향의 징표가 된다. 고향은 여전히 지리적으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매일의 삶이 축적되는 무대가 아니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것은 낯선 익숙함, 그리고 불완전한 기억의 파편들이다.
그렇다면 고향감각은 어디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심리학자 에드워드 톨먼의 ‘인지 지도’가 말해주듯, 우리는 여전히 머릿속에 공간을 그린다. 다만 그 지도는 예전처럼 산과 강, 길과 다리로 단단히 이어져 있지 않다. 내 기억 속 고향의 지도는 몇몇 점만 찍힌 채 선이 끊기고, 서울의 지도는 생활로 익숙하지만 유년기 정서가 빠져 있다. 두 지도는 모두 어딘가 결핍된 채 겹치지 않는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고향감각이란, 이 불완전한 지도의 빈칸 속에서만 어렴풋이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고향을 그려가는 중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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