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잉 아트 메소드: 게임의 동사들 / 오영진
- 한국연구원
- 4월 16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16일
게임이 미술관에 들어왔다.
게임이 미술관에 들어왔다. 단순히 소품이나 레퍼런스 차원이 아니라, 게임 자체가 하나의 전시물이 되었고, 그것도 동작 가능한 형태로 관객 앞에 놓였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게임이 현대미술관에 입장했다는 사실은 단지 새로운 콘텐츠가 유입된 사건을 넘어, 예술 언어의 확장과 미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고한다. 이 전시는 게임을 하나의 서사나 이미지로 소비하는 대신, 플레이 경험을 구성하는 동사적 행위들에 주목한다. “게임을 한다”는 것은 결국 어떤 행위들의 조합인가? 이 전시는 그 질문에서 출발해, 반복되는 플레이의 구성 단위를 예술의 언어로 전환하는 시도다.
게임을 하지 않는 이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게임은 전투나 레벨업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전장이 아니라 인벤토리 화면이다. 무기를 비교하고, 아이템을 정리하고, 사용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이 반복적인 루틴은 게임 경험의 실질적인 풍경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의 눈에 세계는 ‘정리할 것들’, ‘먹어야 할 것들’, ‘말 걸어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국립현대미술관,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4, 전시 기획: 박덕선, 학예보조: 김제희)는 이처럼 반복적인 게임 행위를 구성하는 동사들을 예술의 기본 단위로 삼는다. ‘찾다’, ‘말 걸다’, ‘먹다’, ‘열다’, ‘맞추다’ 같은 행위는 플레잉 아트 메소드(김영주, 조호연, 이세옥)에 의해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 인터랙션으로 번역된다. 이 동사들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통과하는 감각적 구조이며, 존재의 리듬이다.
첫 번째 섹션, <방법들>에서는 이러한 ‘동사’들의 감각적 리듬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게임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행위들이 예술적 언어로 번역될 때, 그것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의 훈련법, 즉 ‘플레잉 아트 메소드’의 기초가 된다. 전시장 입구에는 김승일, 임유영 시인이 쓴 글을 토대로 만든 광고 비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만든 게임> 당신이 꿈꾸는 게임에는 점프가 있나요? 내가 꿈꾸는 게임에는 점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점프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서도 점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꿈꾸는 게임에서 당신은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본격적인 전시의 섹션들을 보기 전, 이 텍스트를 통해 게임의 서사나 규칙 이전에 존재하는 ‘몸의 상태’—즉, 플레이하는 존재가 느끼는 감정과 리듬—에 먼저 접속하게 된다. 시인의 목소리는 게임 속에서 반복되는 점프, 허공을 찌르는 주먹질 같은 동작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것은 전투나 목적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대기 중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들뜬 몸의 표현이며, 게임이라는 몽상의 공간에 들어서며 생기는 기대와 흥분의 징후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는 이처럼 들뜬 몸, 반복하는 행위, 의미 없는 동작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조각들을 통해 관객을 게임의 미학으로 초대한다. 점프는 도약이자 망설임이며, 중력을 일시적으로 부정하는 몸의 몽상이다. 이 전시는 바로 그 감각에서 출발한다.
목표가 없는 게임도 목적은 있다
이어 두 번째 섹션 <변주들 -플레이 모음집 1>는 ‘찾다’, ‘말 걸다’, ‘먹다’, ‘열다’, ‘맞추다’ 같은 게임의 동사들에 따라 편집된 영상 작품으로 구성된다. 각종 인디게임에서 추출한 장면들이 클립처럼 엮여, 각 동사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룹앤테일(김영주, 조호연)이 과거 작업했던 게임들이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식물과 단어블럭으로 대화하는 어드벤처 게임, 퍼즐을 풀어 유기견에게 먹이를 주는 시스템 등은 일상적 행위를 게임의 문법으로 재해석한 작업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게임의 기본 동작들이 갖는 감각과 의미가 교차하는 방식이 돋보였다. 더불어 편집상영된 안나 앤스로피(Anna Anthropy)의 게임 <Triad>의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세 명의 인물—각기 다른 인종, 젠더, 몸의 크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까지 포함한 ‘반려종’—을 하나의 좁은 침대 위에 재배치해야 한다. 마치 블록을 맞추듯이. 당연히 “맞추다”는 동사는 흔히 퍼즐 게임을 연상시킨다. 어떤 형태를 정확히 맞춰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 혹은 강박적인 완결성을 요구하는 체계 말이다. 안나의 게임은 정답이 있는 퍼즐이 아니다. 침대 위에 이들을 ‘끼워 넣는’ 행위는 단순한 공간 배치가 아니라 공존의 형식에 대한 질문이다. 누군가의 다리가 다른 사람의 팔을 눌러야만 자리가 만들어지고, 완벽한 배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함께 잠드는 방식, 타인의 경계를 온몸으로 감지하며 공존하는 방식이 게임의 핵심이다. 즉, 이 게임에서 ‘맞추다’는 물리적 조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충돌하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 삶의 형식으로 재정의된다. 퍼즐이 아니라 공존의 시뮬레이션인 셈이다.*
‘맞추다’는 더 이상 게임의 규칙에 따른 정답찾기의 동사가 아니다. 이는 함께 살아가는 데 실패하거나, 혹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감당하는 일, 비정합성과 불균형 속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감각 행위로 확장된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가 안나 앤스로피의 작품을 ‘맞추다’라는 게임 동사의 예시로 제시한 것은, 단지 퍼즐 장르의 인용이 아니라, 동사 그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정서적 단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는 일, 어디에도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자신을 인정하는 일—그 모두가 결국 예술적 표현의 모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맞추다'가 블록 퍼즐처럼 구조의 틈을 읽고 배열하는 감각을 탐구하는 동사라면, '말 걸기'는 세계와 만나는 독특한 방식을 제시한다. 때로는 덤불로 뒤덮인 공간에서 화분과 대화하고, 때로는 절벽 위에서 낯선 이와 마주치며, 때로는 익명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게임은 우리에게 이런 다양한 '말걸기'의 순간들을 선사한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대화가 아닌, 고독한 사색과 타인과의 조용한 교감이 공존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책상 앞에 앉아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적어 보내고, 타인의 위로가 담긴 스티커로 자신만의 공간을 꾸미는 일처럼 말이다. 이처럼 모든 비가시적인 존재에게 '말 걸기'는 게임 속에서 안전하고 의미 있는 연결의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대로 주변환경에 말을 걸 때, 드디어 주변의 공간과 사물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다.
한편, ‘먹기’는 세계를 수집하고 내면화하는 행위로서의 플레이를 보여준다. 먹기는 먹이기의 감각을 동시에 발생시킨다. 생각해보면 플레이어의 아바타가 뭔가 먹는 행위는 실은 플레이어가 아바타 조종해 먹이는 행위인 것이다. 이는 먹기가 혼자 게걸스러운 욕심 가득한 행위가 아니라 호혜적으로 주변을 먹이는 행위로 돌아설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과거 김영주, 조호연이 먹이를 주곤 했던 유기견 한마리의 반가운 꼬리짓이 게임 영상 사이에 등장한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가 보여준 '먹기'와 '먹이기'의 변주는 따뜻한 발견이다. 게임 속 먹기라는 행위를 단순한 소비나 점수 획득이 아닌, 서로를 돌보는 호혜적 관계로 승화시켰다. 게임의 ‘먹기’는 수집이자 돌봄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유기견에게 먹이를 주던 경험이 게임 그리고 게임영상으로 재탄생되면서 게임은 놀이적 장치가 아니라 일종의 '게임적 에세이'가 된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 작가들은 이들 게이밍 비디오 영상들을 각각 [1] 블록 퍼즐 게임 Block Puzzle Games, [2] 생각하는 게임 Thinking Games, [3] 먹는 게임 Eating Games, [4] 끝없는 게임 Endless Games 등으로 구분하고 명명했다. 이런 시도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얼마나 풍부한 표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개인의 일상적 경험과 감정이 게임의 문법으로 재해석되면서, 우리는 새로운 형식의 서사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먹이를 주는 손길, 그에 응답하는 꼬리짓임 같은 소소한 교감이 게임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이야기될 때, 그것은 더욱 보편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듯 플레잉 아트 메소드에서 ‘동사’는 단순한 동작의 단위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감각하는 방식이며, 세계와 관계 맺는 최소한의 리듬이다. ‘찾다’, ‘말 걸다’, ‘먹다’, ‘열다’, ‘맞추다’—이 익숙한 동사들은 게임의 기본 단위이자, 삶을 구성하는 정서적 구조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 동사들이 반복되고, 변주되고,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결국 어떤 질문에 이르게 된다. 삶이라는 게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끝이 없는 게임 속에서, 끊임없이 목표가 바뀌고 실패가 반복되는 그 구조 속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가?

<끝없는 게임>이라는 섹션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목표가 없는 게임, 혹은 실패만을 반복하는 게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누군가의 지도를 해석하고, 타인의 규칙을 읽어내고, 다른 세계로 접속하는 길을 찾는다. 형식적 목표가 제거된 게임에서도 플레이는 계속된다. 왜냐하면 목표가 없는 게임도 목적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승리나 클리어와 같은 외부적 보상이 아니라, 그 안을 살아내고 해석하고 감각하려는 내적인 행위에서 비롯된다. 어떤 게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몽상이고, 어떤 플레이는 삶의 반복에 대한 은유다. ‘목표 없음’을 감내하며 계속 걷고, 말 걸고, 먹이고, 맞추고, 실패하는 것. 그것은 생존이라기보다 존재에 가까운 노력이며, 실천이다.
결국 이 전시는, 삶이라는 게임을 구성하는 무수한 동사들의 체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에세이다. 우리가 실패하면서도 다시 시도하는 이유를, 맞춰지지 않는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그리고 끝나지 않는 게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손끝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그 모든 반복의 순간들이 말해준다. 마침 비디오에서는 다음과 같은 텍스트가 출력되고 있었다.
목표가 없는 게임도 목적은 있다
<변주들 -플레이 모음집 2>는 ‘영구적 죽음(Perma-death)을 피하는 법’을 다루고 있는듯 보이지만 실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이야기다. 알다시피 게임 속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늘 다시 시작되는 생의 형식이다. 게임에서의 ‘리로드’는 단순한 재시작 기능이 아니라, 기억을 가진 채 반복되는 존재를 상정한다. 그것은 매번 다른 선택지를 통해 자신을 갱신해나가는 서사적 환생의 방식이며, 실패와 반복 속에서 주체가 새롭게 구성되는 하나의 존재론이다. 정해진 목적 없이도 계속 시도하게 되는 삶. 끝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끝없는 현재를 구성해가는 존재. 이 전시는 그런 리로드의 미학을 통해, 예술 역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영구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시도되는 죽음이 주제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시의 곳곳에 등장하는 시지프스 모티브는 우연이 아니다. 작가는 게임적 반복을 형벌로 그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복 속에서 변화의 감각과 의미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시지프스는 매번 같은 돌을 굴리지만,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조금 더 빠르게, 혹은 다른 호흡으로. 이는 도전과 실패를 통해 삶을 갱신해가는 플레이어의 존재론에 가깝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베넷 포디(Bennett Foddy)의 게임 <GIRP>이다. 암벽을 타고 올라가는 플레이어는 끝없이 실패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로 매달린 채 무너지고 다시 시작하는 그 과정 자체가, 곧 멈추지 않는 열정의 형상이다. 바로 그 끈질긴 시도들이 “플레잉 아트 메소드”가 말하는 삶의 미학, 예술의 반복적 갱신과 연결된다.
게임 속에 미술관을 넣다
세 번째 섹션 <존재하지 않는 전시>는 실제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제공한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 팀이 개발한 이 게임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며, 명시적인 아이소메트릭(isometric) 뷰 구조와 추상적인 3D 뷰가 두 개의 스크린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두 화면은 하나의 조이스틱으로 연동되어 있으며, 한쪽 공간을 플레이할 때, 다른 쪽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거나 수상한 행동을 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한마디로 눈치가 빠르고 눈썰미가 좋아야 양쪽 공간을 모두 플레이를 통해 점유할 수 있다. 이제 관객은 이곳에서 ‘걷다’, ‘만지다’ 등의 동사로 전시와 관계를 맺는다. 작가들이 미로와 비밀공간을 만들었더라도 관객은 그저 제 갈길을 가도 된다. 관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로를 해석하며 전시를 완성해나갈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전시 기간 중 관객 플레이어에 의해 의도되지 않은 ‘스피드런’이나 해킹적 플레이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게임의 본질이 설계자가 아니라 플레이어에 의해 구현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존재하지 않는 전시> 안에는 작가들이 직접 제작한 미니게임들도 게임 속 게임으로 포함되어 있다. ‘자유 낙하하는 불꽃 속에서 아파트 세우기(Building Apartments Amid Free-Falling Flames)’, ‘미술관 안뜰을 바라보는 화분들을 위한 급수 시스템 연구(Research on Watering Systems for Pots Facing the Courtyard)’, ‘가짜 관객 먹기(Eating Fake Audiences)’, ‘끝없는 걷기 시뮬레이터(Endless Walking Simulator)’. 이들 게임은 각각 게임의 동사들을 바탕으로,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을 풍자적으로 재현한다. 관객은 미술관 안에서 다시 미술관을 ‘플레이’하면서, 이 공간에 작동하는 무의식적 질서와 감상 구조를 능동적으로 탐색하게 된다.
특히 ‘자유 낙하하는 불꽃 속에서 아파트 세우기’는 불길과 연기 속에서 테트리스처럼 아파트 구조물을 맞춰 불꽃을 줄여 아파트를 구하는 게임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재난 구조 게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블록처럼 내려오는 조각들 안에 창가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형상이 보인다. 이 아파트는 단순한 화재 현장이 아니라, 전쟁 중 폭격을 당한 건물이다. 많은 관객들은 이 장면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무너진 실제 아파트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고 보았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 아파트를 구출하는 데 거의 모두 실패한다. 실패하도록 만들어진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제 관객은 자신이 미술관이라는 안전하고 통제된 제도적 공간 안에 서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플레이 한 게임이 세계의 비극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예술이 종종 현실의 폭력을 감각적으로 추상화하거나 미화하는 방식을 이 작품은 정면으로 비튼다. 불타는 구조물 속에 갇힌 존재들을 테트리스처럼 배치하며 ‘게임한다’는 행위 자체가 곧 비판의 언어가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망각되거나 미화되는 비극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존재하지 않는 전시>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 전시를 ‘존재하게 만드는’ 플레이의 연속이다. 감상의 행위가 아니라 구성의 행위로서만 가능해지는 이 전시에서, 관객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직접 재구성하며, 나아가 그 공간을 가능케 한 제도적 조건과 정치적 조건에 대한 메타인지를 하게 된다.
네 번째 섹션 <목록들>은 전시의 기록 방식을 다룬다. 전통적인 종이 도록 대신 아케이드 박스를 활용해, 전시 설명과 텍스트를 관객이 직접 조작하고 탐색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정보 또한 플레이되고, 조작되는 대상이 된다. 그 순간 도록은 더 이상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하나의 인터페이스가 된다. 관객들은 부족한 큐레이션을 스스로 자료를 찾아봄으로써 보충해나간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프로젝트 해시태그 2024)는 단지 게임을 예술작품화 해 미술관에 들여온 것이 아니라, 예술 감상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전시는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하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는 것도, 순서대로 관람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호흡으로, 당신만의 리듬으로 이 전시를 플레이하라. 누르고, 걸어보고, 말 걸고, 길을 잃어라. 이 전시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감각을 품은 구조로서 관객과 함께 움직인다. 그 에르고딕(ergodic)적 미학 경험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플레이어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끝내 되살아나는 자로 존재하게 된다.
플레잉 아트 메소드의 작품은 오직 승리와 전투만이 전부인 게임의 세계에서 우리를 구해낸다. 그리고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는 집요함, 끝없이 열어보는 손끝, 어디에도 정확히 맞춰지지 않는 조각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기억하게 한다. 그런 존재들이 서로의 플레이를 마주보며 살아가는 세계—그것이 이 전시가 열어 보이는 장면이다. 이 지점에 도달하니 게임은 곧 새로운 예술이자, 새로운 공동체의 형식이 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미주
*이 같은 주제는 안나 앤스로피의 또 다른 대표작 Dys4ia에서도 이어진다. 이 게임은 트랜스젠더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끼워 맞춰지지 않는 블록으로 표현한다. 플레이어는 자꾸만 틀어지는, 맞지 않는, 모서리가 삐죽 튀어나온 블록을 다루게 된다. 어디에도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 그 조각은 바로 작가 자신이며, 세상에 조립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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