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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후루는 되고, 회과육은 안 되는 나라 / 김보슬

사천을 여행하던 어느 날, 메뉴판을 마주한 순간 나는 음식의 가짓수와 조합의 낯섦에 잠시 말을 잃었다. ‘사천 요리’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 생각했던 세계는, 그저 하나의 매운맛이 아니었다. 함께 여행 중이던 지인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됐다. "한국에 있는 중식 요리는 왜 이렇게 다 천편일률적이고, 진정성이라고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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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하나하나 먹어보면 의외로 그런 데가 적지 않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판매되는 중국 식자재는 대부분 저품질이었고, '중국산 농산물은 안 좋다'는 인식도 결국 값싼 제품만을 수입해온 결과일 뿐이다. 시중에서 ‘중화요리’라는 이름으로 제공되는 음식들 역시 그다지 신뢰하기 어려운 품질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미리 볶음둔 밥을 내놓는다거나, 훠궈와 마라탕조차 뚜렷한 구분 없이 섞여 소비되고, 그 마라탕은 마치 국룰처럼 프랜차이즈와 푸드코트 곳곳에 퍼져 있다. 하나의 유행처럼 범람하지만, 그 안에는 원래의 조리 방식이나 맛의 결조차 흐릿해진 경우가 많다. 일종의 관성이다. 뭔가 '그럴 듯한' 느낌만 내면 되는 음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제대로 된 사천 요리를 찾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한국에 정말 ‘진짜’를 표방하는 사천 요리 전문점은 전혀 없는 것일까?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인터넷을 한참 뒤지다가, 서울에 단 한 곳, 사천 음식을 제대로 한다고 평가된 식당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식당은 최근 폐업한 상태였다. 이름만 남은 그 식당의 리뷰들을 읽다 보니, '까막눈은 모르는 정통 사천요리 전문점'이라며, 정체불명의 한자 메뉴판부터 회과육(回鍋肉)의 맛까지 생생히 기록돼 있었다. 메뉴판은 현지식 그대로였고, 테이블의 대부분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 손님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식당은 이미 폐업한 상태였고, 지금은 또 하나의 양꼬치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회과육은 사라지고, 다시 양꼬치와 칭따오 맥주가 그 자리를 채운 셈이다.

서울 곳곳에 마라탕과 탕후루 같은 ‘인기 있는 중국풍’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 문화적 맥락과 교류는 점점 사라져간다. 사천이라는 지역명은 메뉴판에 남았지만, 정작 그 지역의 질감과 호흡, 풍미는 곧잘 희화화되거나 한국식으로 덧칠된 채 다시 팔린다. 거리를 걷다 보면 붉은 램프가 매달린 양꼬치집 간판이 연달아 보이고, 젊은 층은 탕후루 포장지를 들고 셀카를 찍는다. 그 안에는 분명 재미와 기호가 작동한다. 그러나 이 음식들이 한국에서 소비되는 방식은 대체로 정서적으로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 이국 취향에 가깝다. '중국의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감각은 있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실제 문화와 삶의 맥락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손쉽게 지워진다. 가볍고 먹기 편한 ‘가성비’ 수준에서만 소비되는 것이다. 낯설지 않은 것만을 값싸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결국 가장 진짜 같은 것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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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함 속에 관련 기사를 읽다 보니, 서울 곳곳에서 성행 중인 중국 음식점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이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우려와 혐오 감정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어떤 기사에서는 “너무 많은 중국인들로 인해 동네 분위기가 변했다”는 불만이 덧붙여졌고, 다른 기사에서는 중국어 간판이 너무 많아져서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주민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이 지점에서 문득, 나는 음식보다 더 큰 문제와 마주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사천요리와는 거리가 먼 ‘사천불짬뽕’ 같은 한국식 퓨전 요리는 큰 인기를 끌지만, 정작 그 원형에 가까운 중국 본토의 음식은 거리낌 없이 기피된다. 이름만 ‘사천’일 뿐, 그 안에는 사천이라는 지역과 그 땅의 맛, 습도, 기질, 역사와 같은 맥락이 제거되어 있다. 일정 수준 이상 한국화된 것만을 받아들이겠다는 식의 조건부 수용,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여주는 태도다. 물론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다른 문화를 접하는 데에는 언제나 경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배타성과 편협함이 너무 쉽게 제도화되거나, 대중 정서의 일부로 고정되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보통 가장 풍부하고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중국’이 아닌 ‘중국인’에 대한 정서적 배척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중국 정부나 정치 체제, 문화 자체보다는 개별 중국인들에 대한 차별과 불편함이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이 흐름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그 뿌리를 찾자면 너무나 복합적이고 오랜 역사 속에 얽혀 있어 한 편의 글로 깊이 있게 다루긴 어렵다. 하지만 내가 자라온 세대, 즉 1980년대생으로서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조금은 실마리가 잡힌다. 1990년대, 내가 초중학생이던 시절 '중국'은 여전히 낯선 타국이었다. 조선 시대의 사대 관계나 6.25전쟁 참전국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에게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이자 ‘한자를 쓰는 이웃 나라’ 정도의 추상적 이미지였다. 오히려 이국적인 중화권 대중문화에 대한 동경의 감정이 더 강했다.

당시 우리는 ‘중국-홍콩-대만’을 정치적으로 구분하기보다는 하나의 중화권 문화로 받아들였고, 왕가위의 영화와 장국영, 양조위, 여명 같은 스타들에 열광했다. 대만의 왕페이나 금성무, 음악 채널 Channel V를 통해 본 뮤직비디오와 광고들은 그 시절 청소년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중국’은 어느새 사라진 동경의 대명사였다. 추상성의 시대였다. 실제 경험보다는 상상과 이미지로 구성된 중국. 그만큼 충돌도 적었고, 갈등도 드물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며 변화가 시작됐다. 대학 시절, 서울에는 중국인 유학생이 하나둘 늘어나고, 관광객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 즈음부터 "중국인들은 시끄럽고 질서가 없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경험의 확대는 동시에 편견의 강화로 이어졌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너무 집단적으로 움직였고, 개인보다 공동체의 목소리를 더 중요시했고, 때로는 무례해 보였다. 이것은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일 수 있지만, 일단 부정적인 사례가 한두 번 눈에 띄면 전체가 동일하게 인식되는 건 너무나 흔한 일이다.

2010년대에는 대림역, 건대입구역 등 특정 지역에 중국인·조선족 커뮤니티가 형성되며 가시화되었고, 일부 매체에서는 이 지역을 우범지대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 사건과 결부되며 조선족·중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더욱 고착되었고, 이는 개그 소재로도 소비되며 대중적 조롱감으로 재생산되었다. 중국은 더 이상 추상적인 타국이 아니었다. 이제는 ‘내 곁에 있는’ 이방인으로서, 보다 불편하고 불청객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실체화된 타자는 점점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했다.

사천 여행 중 먹은 두부요리나 곱창볶음의 맛은 인상 깊었다. 서울에 이와 비슷한 음식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결국 ‘진짜’의 부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거리에는 중국인이 넘쳐나고, 중국풍 장식도 흔한데, 왜 제대로 된 중국음식은 찾아보기 힘든 걸까?

이 질문의 배경에는 문화는 상품으로 소비하되 그 문화를 만들어낸 주체는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가 자리한다. 중국인의 존재는 꺼려지지만, 중국 음식은 한국화되어서만 받아들여진다. 사천불짬뽕은 좋지만 '정통 사천요리'는 부담스럽다는 태도 말이다. 이는 다문화를 표방하면서도, 스스로 정해놓은 수용의 한계선을 넘지 않으려는 사회적 모순과 맞닿아 있다.

사회가 다문화화되면서 갈등과 충돌, 범죄가 일부 발생하는 건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이주민 전체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것은 이성적인 태도일까?

오늘날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보다 물가가 저렴한 본국으로 송금을 하기 위해 한국에 머물고 있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우리는 일상 속 노동력 부족과 급격한 물가 인상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이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그들의 국적에 색안경을 낀다. 그 색안경은 종종 무지에서 시작해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끝내 혐오로 고착된다.

결국 문제는 국민국가와 민족국가의 개념이 뒤섞인 인식에 있다. 우리는 법적으로는 ‘국민국가’에 살고 있으면서, 감정적으로는 ‘민족국가’를 갈망하는 것일까. 이주민이 합법적 절차를 따르고 우리 사회에 기여하더라도, 단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 당한다. 애국심과 배타성은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혼동한 채 살아간다.

서울 어딘가에, 진짜 사천요리를 내놓는 식당이 다시 생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음식이 맛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어쩌면 중국인일 수도 있는—에게도 존중을 보낼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더 많은 ‘진짜 맛’을 누릴 자격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순수 한국인’이어야 안심하고, 값도 싸야 좋다는 이중 잣대가 진짜를 밀어내고 가짜만 남긴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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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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