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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아이러니, 역설

에드윈 애보트의 소설 『플랫랜드』(1884)의 오래된 비유를 불러와 보자. 평면의 세계에 사는 존재는 결코 높이를 모른다. 그에게 세계는 길이와 너비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것은 선과 면의 관계로만 이해된다. 만약 구형태의 입체가 그 세계에 나타난다면, 평면세계의 존재는 그것이 제멋대로 면적이 바뀌니 기적이나 착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방향이 하나 더 생기는 일, 익숙한 세계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일, 지금까지 정답이라고 믿었던 선 하나가 사실은 어떤 입체의 단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평면의 세계에서 구체는 종종 좁은데, 넓은 그래서 모순된 존재로 보일 것이다.

글쓰기에도 플랫랜드가 있다. 많은 글들이 길이와 너비만 가진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는 경쟁이 심하다”, “SNS는 인간관계를 약하게 만든다”, “명절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대학생은 취업 때문에 힘들다” 같은 문장들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 자체로는 아직 평면이다. 이런 문장은 주장으로서는 기능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오래 붙들지는 못한다. 독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으나,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다음 문장으로 지나가 버린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직 높이가 없기 때문이다. 높이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같은 현상 안에 서로 충돌하는 진실을 함께 놓을 때 생긴다. “경쟁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말 옆에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경쟁을 통해서 오히려 자신이 아직 탈락하지 않았다고 느낀다”는 말을 놓을 때, “SNS는 우리를 외롭게 한다”는 말 옆에 “그러나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바로 그 SNS를 켠다”는 말을 놓을 때, 그때 글은 평면에서 조금씩 들려 올라간다.



대학가 카페를 보자. 카페는 쉬는 곳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커피 향이 있고, 음악이 있고, 창가 자리가 있고, 잠시 숨을 돌린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대학가 카페의 오후를 들여다보면, 그곳은 작은 사무실이자 독서실이며 때로는 면접 준비실이고 팀플 회의실이다. 학생들은 커피를 마시러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콘센트를 찾아온다. 의자는 휴식의 도구라기보다 오래 버티기 위한 장치가 되고, 잔잔한 음악은 쉬기 위한 배경이 아니라 더 오래 일하기 위해 피로를 덜 민망하게 만드는 소음이 된다. 여기서 글은 시작될 수 있다. “요즘 대학생은 카페에서 공부를 많이 한다”는 문장은 평면적이지만, “우리는 쉬는 공간을 찾아 카페에 가고, 그곳에서조차 쉬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확인한다”는 문장은 입체적이다. 이 문장에는 모순과 아이러니가 있으며, 역설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모순이라는 말은 오래된 장사꾼의 호객에서 왔다. 어떤 이는 무엇이든 뚫는 창을 팔고, 또 무엇이든 막는 방패를 팔았다. 그 둘을 한꺼번에 내놓는 순간 서로의 말은 찌르고 막는 순환 속에 놓인다. 矛와 盾, 창과 방패는 한편으론 글쓰기의 오래된 장면이다. 말은 창처럼 앞으로 나아가 무엇인가를 찌르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말이 방패처럼 막아 세우기도 한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는 말이 창이라면, “그래도 안정적인 직장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방패다. “나는 남 눈치 보지 않고 살겠다”는 말이 창이라면,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고 휴대폰 화면 속 sns를 확인하는 손가락은 방패다. 글이 되기 위한 호기심과 문제의식은 창과 방패 사이에서 시작된다. 한 쪽만 있으면 일방적인 구호가 되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운동하는 문장이 된다.

아이러니는 이 모순을 맞이하는 순간, 주체가 놓인 상황을 의미한다. 아이러니라는 그리스어 eironeia에는 모르는 척하기, 숨기기, 가장하기의 뉘앙스가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는 정직한 얼굴을 하고 삶의 모순 속으로 빠지게 하는 속임수에 가깝다. 함정같은 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한국어 화자 귀로 들으면 아이러니는 “아, 이런”처럼 들린다. “아, 이런.” 맞는 말이다. 건강해지려고 헬스장까지 차를 타고 가는 나를 발견할 때, 가족의 화목을 위해 차린 명절 밥상 앞에서 정작 누군가는 하루 종일 밥상 밖에 서 있는 것을 볼 때, 창의적 인재를 뽑겠다는 회사가 가장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자기소개서를 선호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정말로 “아, 이런”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말하자면 아이러니는 탄식에서 시작한다. 웃음과 한숨이 같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삶의 모순됨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아이러니에 빠졌다고 말한다. 삶을 경멸하는 인간은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해라며 냉소에 빠질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 삶의 아이러니를 풍자적으로 다루며 호기심을 갖기도 한다. 모순이 창과 방패가 서로를 겨누는 사태라면, 아이러니는 그 둘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 문득 자신도 창을 들고 있으며 동시에 방패 뒤에 숨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모순은 세계의 내부 균열이고, 아이러니는 그 균열이 나의 표정 위로 올라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게 만드는 경험이다.

좋은 문장이란 대개 처음부터 우아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처음 쓰는 문장은 대개 촌스럽고 너무 크고 단정적이며, 때로는 자기가 이미 들은 말을 자기 생각인 줄 알고 반복하기도 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글쓰기론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앤 라모트의 글쓰기론에서 끈질기게 말해 온 것도 이와 비슷한 태도다. 완벽한 첫 문장을 기다리지 말고, 형편없는 초고를 허락하고, 새 한 마리씩, 장면 하나씩, 작은 것 하나씩 붙잡으라는 태도. 대학 글쓰기에서 아이러니와 모순 그리고 역설을 가르쳐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학생에게 처음부터 거대한 사상이나 매끈한 결론을 요구하면 학생은 남의 문장을 빌려 오거나 추상적인 문장 뒤에 숨는다. 그러나 “오늘 본 이상한 장면 하나를 말해 보라”고 하면, 글은 갑자기 살아나기 시작한다. 솔직히 한국 사회의 좋은 글감은 멀리 있지 않다. 아파트 광고의 '자연', 출근길 지하철의 '침묵', 자기소개서의 '진정성' 같은 단어 속에 이미 모순이 숨어 있다. 글쓰기는 세상에 없는 소재를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보고도 지나친 장면에서 어긋남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아파트를 보자. 한국에서 집은 단순히 사는 곳이 아니다. 집은 사는 곳인 동시에 사는 것, 곧 구매하는 것이며, 재산이고 계층이고 학군이고 노후이고 결혼 조건이며 부모 세대의 불안과 자녀 세대의 미래가 한꺼번에 얹힌 콘크리트 상자다. 새 아파트 광고에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 자연은 때로 산을 깎고 논을 메운 자리에 조성된 풍경이다. 우리는 자연 가까이 살고 싶어서 자연을 지운 곳에 입주한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한 광고 과장이 아니라, 자연마저 소비 가능한 프리미엄으로 바꾸는 욕망의 구조다. 그래서 아파트에 관한 글은 “한국인은 아파트를 좋아한다”에서 멈추면 안 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우리는 자연 가까이 살고 싶어 하면서, 자연이 사라진 자리에 세워진 자연 친화적 단지를 욕망한다”고 써야 한다. 그러면 글은 부동산 비판을 넘어 한국적 욕망의 구조를 비추기 시작한다.

자기소개서는 나를 소개하는 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평가자가 원하는 나를 조립하는 문서에 가깝다. 지원자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쓰기 시작하지만, 곧 자신을 감추는 법을 배운다. 결국 그는 가장 자신다운 경험을 쓰라는 문항 앞에서 가장 안전하고 모범적인 자신을 발명한다. 이것이 자기소개서의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소개하지 않으려 할 수록 나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 이런 문장은 역설이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나답지 않은 나를 만들어 낸다. 이 사실을 한탄만 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풍자할 때 역설이 된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글쓰기가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와 독자와 권력의 요구 속에서 구성되는 행위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평면적 주장에서 입체적 장면으로, 단순한 비판에서 복합적 이해로, 모순의 발견에서 아이러니의 장면화로, 역설적 통찰로 나아가는 이동. 학생이 “한국 사회는 경쟁이 심하다”고 썼다면, 교사는 거기서 틀렸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대신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경쟁을 싫어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할까”라고 물어야 한다. 경쟁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불안한 사회에서 자신이 아직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처럼 작동한다. 학벌주의는 분명히 문제지만, 좋은 학교 이름이 주는 안전감을 완전히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도 있다. 부모 세대의 안정 지향은 답답하지만, 그들이 외환위기와 구조조정과 노후 불안을 통과하며 배운 생존의 언어일 수도 있다. 이런 반대편의 진실을 넣는다고 해서 비판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판은 더 강해진다. 왜냐하면 좋은 비판은 상대를 바보로 만들지 않고도 문제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모순이 없으면 아이러니가 없고, 아이러니가 없으면 역설도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냉소다. 아이러니를 조금 배운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남의 모순을 잘 지적하게 되는데, 이때 쉽게 “사람들은 다 위선적이다”, “요즘 세상은 다 모순이고 가짜다”, “다들 말만 번지르르하다” 같은 문장으로 쉽게 미끄러진다. 냉소는 빠른 만큼 얕다. 냉소는 세상을 이미 다 안다는 태도에서 나오지만, 열정은 아직 다 모른다는 태도에서 시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환경을 생각한다면서 텀블러를 들고 다니지만 사실은 다 허세다”라고 쓰는 대신, “텀블러는 환경을 위한 실천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소비를 보여 주는 작은 표식이 되었고, 문제는 그 표식이 실천보다 이미지에 가까워질 때 발생한다”고 써야 한다. 전자는 조롱이고, 후자는 분석이다. 글은 날카로울 수 있지만, 날카롭다는 이유로 함부로 베어서는 안 된다. 모순을 다루는 글일수록 자기 자신도 그 모순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물론 좋은 글이 고백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공적인 의미로 나아간다. “나는 명절이 싫다”는 문장은 개인적 감정이고, “명절은 가족 안의 성별화된 노동을 드러내는 장면이다”라는 문장은 사회적 분석이며, “가족을 하나로 묶는 음식이 오히려 가족 안의 거리를 드러낸다”는 문장은 역설적 통찰이다. 글쓰기는 자기 넋두리가 아니고 딱딱한 논문도 아닌, 읽히는 순간 운동하는 사유가 되어야 한다. 사유란 하나의 감정이나 주장으로 정리되지 않는 여러 생각들을 함께 견디는 일이다. 대학 글쓰기에서 길러야 할 능력도 바로 이 복잡한 생각들을 연결하는 힘이다.

역설은 어떨까. 영어의 paradox는 통념이나 의견을 뜻하는 doxa의 곁, 혹은 그 바깥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 역설은 상식의 반대편에서 상식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상식 바로 옆에서 상식이 못 본 것을 보여 주는 말이다. 그래서 역설은 처음부터 붙이는 장식이 아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외로워진다”는 문장이 힘을 가지려면, 그 앞에 실제로 연결된 채 외로워지는 장면들이 있어야 한다. 단체방의 수많은 메시지 속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장면, 생일 축하 이모티콘은 쌓이지만 늦은 밤 전화할 사람은 없는 장면이 있어야 한다. 역설은 그런 장면을 오래 견딘 뒤에야 얻어지는 문장이다. 글쓰기에 있어 마지막에야 역설을 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역설은 장식이 아니다. 너무 빨리 역설을 만들려 하면 문장은 멋있어 보이지만 속이 비어 버린다.

글쓰기에 있어 아이러니와 모순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은 수사법 교육의 중요성 문제가 아니다. 세계를 입체로 보는 훈련이고, 자기 확신을 조금 늦추는 훈련이며, 타인을 쉽게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어긋남을 놓치지 않는 윤리의 훈련의 문제다. 모순은 글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가 본래 지닌 조건이고, 아이러니는 그 조건이 우리 눈앞의 장면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며, 역설은 그 장면을 오래 견딘 사람이 끝내 발견하는 깊은 진실이다. 창과 방패가 부딪히지 않는 글은 안전하지만 둔하다. “아, 이런” 하는 탄식이 없는 글은 매끈하지만 살아 있지 않다. 통념의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지 않는 글은 읽기 쉽지만 다시 읽고 싶지는 않게 된다.

글을 쓸 때 너무 빨리 평면의 정답으로 돌아가지 말자. 플랫랜드의 평면세계 존재에게 높이는 처음엔 불가능한 상상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은 자꾸 그 불가능한 방향을 상상해야 한다. 눈앞의 선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내가 본 면이 사물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내가 옳다고 믿는 문장 안에도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반대편의 진실이 들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글은 조금씩 솟아오른다. 단정한 주장 하나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진실들이 함께 버티는 공간이 된다.



*이 칼럼을 마지막으로 모든 <한국연구>의 칼럼과 연재를 종료합니다.



오영진(서울과학기술대학교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오영진(서울과학기술대학교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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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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