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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절현 - 절현(絶絃)을 강요당하는 시대 / 김동규

백아절현(伯牙絕絃)이란 중국의 춘추 시대에 거문고 명인이었던 백아(伯牙)가 자기 음악을 이해하는 유일한 지음(知音)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사성어다. 흔히 친밀한 친구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지만, 나는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구조를 알려주는 말로 새긴다. 이 말에 따르면, ‘작품(Work)’이란 한갓 물건이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 ‘작용’이다. 그것은 부름과 응답의 연쇄다. 마음과 마음을 잇는 사랑의 황금 고리이다. 그래서 작가 없는 감상자는 불가능하며 감상자 없는 작가도 존재할 수 없다. 작품의 기저에는 사랑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즉 그윽한 환대가 ‘작동’ 중이다.

     

나는 정현종 시인의 작품을 사랑한다. 그의 작품이 젊은 시절의 내게 느닷없이 다가왔다. 거리를 헤매던 나를 불러 세웠다. 콕 집어 내게만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부름에 응답해야 했다. 시인이 낸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했다. 선택받은 이의 책임감은 무거운 심적 부담에 앞서 뿌듯한 보람을 선사한다. 지금껏 행복하게 시인의 작품을 감상했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응답하려 했다. 그런 나를 기특하다고 여기셨는지 시인은 이런 시를 지어주셨다.

     

철학자 김동규 교수는

산을 좋아해서

내가 학생들과 북한산을 오를 때 합류하곤 했는데요,

높은 산을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의 등산은 필경

그의 정신의 타고난 생리인

상승하려는 의지의 한 발로일 텐데요,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철학적 탐구는

정신의 깊이와 높이를 아울러 기약하면서

인간 사랑에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언어에 대한 드문 민감성과 세밀함도

사유의 다함없는 철저함을 보여주고요.

나는 관상도 좀 본다고 자처하곤 하는데,

김동규 교수의 맑은 얼굴은

그냥 순수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철학의 맑은 얼굴 – 김동규」전문

정현종,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문학과지성사, 2022. 87쪽.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인의 과분한 후의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동시에 내 실존을 무겁게 짓누르는 ‘말의 형량’을 느낀다. 솔직히 시인의 관상을 통해 규정된 내 얼굴은 다소 미화된 것이며, 진짜라고 하더라도 지나간 과거의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얼굴이다. 더는 없는 것에 대한 과찬은 듣는 이로 하여금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든다. 특히 이 구절 “순수의 결정”

     

이 말은 예리한 단도처럼 내 가슴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금도 내면에서 영혼의 살점을 조금씩 저미고 있다. 풍진 세상에 덕지덕지 얼룩진 현재의 내 얼굴, 이 닳고 닳은 속물에게 순수의 결정이라니! 반드시 시인의 관상대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테지만, 나는 자진해서 그렇게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필경 어쩔 수 없는 속물로 남겠지만, 끝까지 ‘순수의 결정’이라 새겨진 비수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기로 했다. 어쩌자고.....

     

처음 시를 읽고 난 뒤 나는 곧바로 응답할 수 없었다. 혼탁해진 말로 정갈한 시의 부름에 응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꾀죄죄한 몰골로 시인을 만날 수는 없었다. 말갛게 정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시의 아름다운 울림에 화답하는 철학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써놓은 글 속에 여전히 오점이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오가는 사랑의 순환에서 때를 놓치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인의 말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우리에겐 무서운 진실이 아니던가.

     

겨우 책의 형태를 갖춘 원고를 완성했을 무렵, 한창 중2병을 이겨내고 있던 딸내미가 묻는다.

     

딸: 아빠, 요즘 뭐 쓰고 있어?

아빠: 응, 시인에게 화답하는 책을 쓰고 있지.

딸: 한 편의 시를 받고 한 권의 책을 써준다면 ... 아빠가 좀 밑지는 게 아니야?

아빠: 아니, 아빠가 책 열 권을 쓴데도 그 시 한편에 한참 못 미칠 거야.

     

딸애는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래 넌 아직은 이해하기 힘들 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출판사들로부터 출간을 거절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시인의 시집들을 거의 전담하듯 출간한 곳도, 내 책을 이미 4권이나 출간했던 곳도 출판을 거절했다. 그 사이에 내 필력이 그렇게나 쇠진해진 걸까? 대체 시장에서의 책 구매력이 얼마나 폭락했다는 뜻일까?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영상 매체의 시대에는 글이 홀대당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글이 실릴’ 웹진을 비롯한 숱한 잡지들이 사라지고 있다. 대학에서 철학이 사라지고 도서관에서 책이 사라지고... 아마 칸트가 작금의 디지털 영상 문화를 보았다면, 첫 일성이 “오네 가이스트(ohne Geist: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일 것이다. 이 말은 겉은 화려하고 말쑥하지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작품에 대해 칸트가 썼던 표현이다.

     

AI가 도깨비처럼 뚝딱 글을 써내는 것을 보면서, 이세돌 9단이 바둑을 접은 것처럼 절필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를 거문고 연주에 빗댄다면, 우리는 절현(絶絃)을 강요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랑의 부름과 응답이 체계적으로 불가능한 시대. 글 쓰는 의욕을 상실한 것이 갱년기에 접어든 내 몸 탓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다시 소통(疏通)의 줄을 고를 수 있을까? 펜을 거머쥐고 신이 나서 팔목이 시리도록 글을 쓸 수 있을까.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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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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