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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충론자라는 평가, 다시 묻다 / 김지은


절충론자라는 평가, 다시 묻다


조선 후기 성리학사를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의 통념과 마주치게 된다. 율곡학의 정통은 권상하(權尙夏)와 한원진(韓元震)을 중심으로 한 호론(湖論)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반면 낙론(洛論)의 종장(宗匠)으로 불리는 김창협(金昌協)은, 이이(李珥)의 심성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황(李滉)의 호발설(互發說)을 일부 긍정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퇴·율 절충론자’라는 꼬리표를 달아왔다. 호론이 율곡학의 적통(嫡統)이라면, 낙론은 그 경계 어딘가에서 이탈한 방계(傍系)처럼 취급되어 온 셈이다.그러나 이 통설은 정말 타당한가? 이 연구는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지금껏 김창협 연구의 관심은 주로 ‘무엇을’에 집중되어 왔다. 그가 어떤 철학적 입장을 취했는가는 비교적 충분히 논의되었지만, ‘왜’ 그러한 입장을 견지했는가—즉 그 이론적 선택의 목적과 맥락을 체계적으로 해명한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농암집[農巖集 二]』(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농암집[農巖集 二]』(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학문과 정치가 교차하던 시대김창협의 역사적 처지를 들여다보면, 그의 철학이 새롭게 읽힌다. 17세기 후반 서인과 남인의 극심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은 그에게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다.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되고 가문 전체가 유배와 실직의 위기를 맞은 상황은 가문의 명예 회복이라는 절박한 과제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명예 회복은 서인의 정치적 재기 없이는 불가능했고, 그 재기의 토대는 학문적 권위 확보에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 학문적 권위는 곧 정치적 정당성의 토대였으므로, 율곡학의 주자학적 정통성을 확립하는 일은 단순한 지적 관심사가 아니라 가문과 당파의 명운이 걸린 사명이었다.

아울러 김창협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宋時烈)로부터 깊은 학문적 신뢰를 받았다. 그가 송시열의 학문적 유지를 이어받아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교정 작업에 만년의 공력을 기울인 것은, 율곡학의 주자학적 정통성 확립이 그에게 단순한 학문적 관심을 넘어선 사명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그를 ‘퇴·율 절충론자’로 분류하는 통설은, 바로 이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살펴보았는가이 연구는 김창협 저술에 대한 정밀한 텍스트 분석을 토대로, 그가 취한 이론적 선택의 목적과 의미를 함께 읽는 방식을 취한다. 분석의 대상은 본성론, 사단론, 미발 지각론 세 주제다. 이 세 주제에 주목한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훗날 한원진이 바로 이 지점들에서 김창협의 학설이 이이와 다르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비판의 표적이 된 바로 이 지점에서 김창협의 본래 의도를 읽어내는 것, 그것이 이 연구의 핵심 전략이다. 분석의 준거는 이이 철학의 핵심 명제인 ‘리통기국(理通氣局)’, ‘기발리승일도(氣發理乘一途)’, ‘심시기(心是氣)’로 삼았다.


창조적 재구성으로서의 계승


분석을 통해 드러난 것은, 김창협의 철학이 지금껏 평가된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일관된 내적 논리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본성론에서 그는 리(理)가 기(氣)의 제약 없이 도덕 본성으로 온전히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이 입장은 이이와 미묘한 차이를 보이지만, 김창협은 이를 ‘리통기국’ 명제를 통해 풀어냈다. 차이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율곡학의 내부에서 주희의 사상을 더 충실하게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사단론에서도 그는 도덕 본성을 사단의 직접적 원인으로 설명하면서, 이를 이이의 ‘기발리승일도’ 명제 안에서 정합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이는 이황의 호발설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율곡학의 내부에서 주희의 사단 이해를 재해석한 것이었다. 미발 지각론에서도 그는 이이의 성의(誠意) 수양과 표면상 달라 보이는 미발 수양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이이의 ‘심시기(心是氣)’ 명제 위에서 정당화하였다. 율곡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주희의 수양론을 온전히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이처럼 김창협은 단순한 절충론자가 아니라, 율곡학을 깊이 있게 심화한 사상가였다.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 지식이음)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 지식이음)

최신 동향 및 전망


이론에서 맥락으로조선 성리학 연구는 지난 수십 년간 조용하지만 뚜렷한 변화를 겪어왔다. 연구자들이 텍스트 앞에서 던지는 질문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같은 사상가와 같은 논변도 새롭게 읽히기 시작했다.

1980~90년대까지 연구의 주류는 이른바 ‘이론 내재적’ 접근이었다. 성리학의 주요 개념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정밀하게 해명하는 것이 핵심이었으며, 이 접근은 조선 유학이 중국 성리학의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독자적인 이론적 성취를 이루었음을 입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연구의 무게 중심이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무엇을 주장했는가’를 넘어 ‘왜 그 시대에 그런 주장이 제기되었는가’를 묻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사상사와 정치사, 제도사를 연결하는 통합적 시각이 부상하면서, 성리학적 논변이 당대의 정치적 갈등이나 사회적 긴장과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지, 나아가 그것이 단순한 학파 내부의 논쟁을 넘어 정치적 정당성을 세우는 언어로 기능했다는 인식이 점차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호락논쟁(湖洛論爭) 연구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낙론과 호론 사이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은 그동안 주로 이론적 문제로 분석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그 사상사적·정치사적 배경을 더 깊이 파고드는 연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창협 연구도 이 흐름 속에 놓여 있다. 본성론·사단칠정론·지각론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분석이 축적되어 온 가운데, 가장 최근에는 그의 사유가 형성된 역사적·정치적 맥락 전체를 함께 읽으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사환국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그의 심성론 형성에 미친 영향, 송시열의 학문적 유산과 노론 학풍의 형성 과정, 그의 철학적 선택과 가문의 의리 의식 사이의 연관—이러한 문제들이 연구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개념의 내적 정합성을 분석하는 작업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사상은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특정 인물을 ‘철학자’로만 고립시켜 이해하는 대신,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짊어진 실존적 과제 속에서 함께 읽는 것, 그것이 지금 이 분야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다.


이 연구가 서 있는 자리


연구를 마치고 나서 오히려 더 선명해진 것이 있다. 김창협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복잡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잃고 무너진 가문을 다시 세워야 했던 한 아들의 절박함, 스승의 학문적 유지를 이어받아야 했던 제자의 사명감이 그의 철학적 선택 뒤에 있었다. 그 과정을 확인하면서, 한 사상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결국 그가 살았던 삶 전체를 읽는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바로 그 복잡한 사람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는 놀랍도록 단순했다.

‘퇴·율 절충론자’라는 꼬리표가 과연 적절한가, 그것이 이 연구가 던진 물음이었다. 그러나 연구를 마치고 나서 더 크게 남은 것은, 그 꼬리표가 왜 이토록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는가 하는 의문이다. 어떤 통설은 반박되기보다 그냥 반복된다. 이 연구가 그 반복을 잠시 멈추고 다시 물어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가장 먼저 풀고 싶은 것은 천기론(天機論)과 철학 사상의 연계다. 천기론은 흔히 김창협의 문학론으로만 읽히지만, 그 안에는 리(理)에 대한 그의 철학적 이해가 깊이 새겨져 있다. 철학과 문학이 서로 맞닿아 있는 지점을 밝힐 때, 김창협이라는 사상가는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낙론계 경세론(經世論)의 추적도 이어가야 할 과제다. 김창협의 심성론이 경세론적 실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나아가 낙론이 북학 사상과 개화 사상으로 이어지는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은 조선 후기 지성사를 다시 쓰는 일과 맞닿아 있다.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자면, 동서 철학의 대화라는 방향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지박약 논의와 김창협의 성의론(誠意論)을 나란히 놓고 읽는 것은, 도덕적 행위와 자기기만의 문제를 전혀 다른 언어로 사유했던 두 전통이 서로에게 말을 걸게 하는 시도다. 그 대화가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김창협의 사유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새로운 빛을 던져줄 것이다.


김지은(2025 우수 박사학위논문 출판지원사업 선정자, 고려대학교 철학과)
김지은(2025 우수 박사학위논문 출판지원사업 선정자, 고려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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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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