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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 사이에서 발견한 문학사 / 신성환


밭고랑 사이에서 발견한 문학사: 연구의 출발과 문제의식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전시가 속 자연은 속세를 벗어난 은일(隱逸)과 풍류의 공간이거나, 관념적인 구도(求道)의 공간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텍스트의 이면을 걷어내고 당대의 현실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자연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필자는 박사학위논문 「조선후기 農歌類 詩歌의 전개 양상과 의미 지향」을 통해 바로 이 지점, 즉 소일거리가 아닌 수확에 대한 기대가 담긴 실질적인 '생업'으로서의 농사를 노래한 국문시가 작품들에 주목했다. 소박한 농촌 풍경의 묘사를 넘어, 내용과 주제적 지향이 농업 생산 및 노동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는 작품들을 '농가류 시가(農歌類 詩歌)'로 명명하고 그 전체상을 조망하고자 한 것이다.

본 연구가 출발하게 된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기존 학계의 해석적 틀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간 농가류 시가에 대한 연구는 조선 후기를 중세가 해체되고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로 전제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거대 담론에 깊이 기대고 있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농가류 시가는 신분 계층이 몰락하며 자영농으로 전락한 사족들의 자기 고백이거나, 봉건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증거로만 독해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목적론적 근대주의의 시각이 당대에 산출된 수다한 작품들을 선험적 틀에 꿰맞춰 선(先)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본 연구는 조선 후기 촌락 사회가 상호 의존적 호혜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향촌공동체 운영의 원리인 '도덕경제(Moral Economy)'와 '호혜성'을 새로운 방법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여기서 도덕경제란 자본주의적 이윤 극대화보다는 구성원 모두의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고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전통 사회의 공동체적 '생존 윤리'를 뜻한다.

분석 결과, 17세기 이휘일의 <전가팔곡(田家八曲)>이나 18세기 위백규의 <농가(農歌)> 등은 몰락한 양반의 한탄이 아니라, 전후 복구와 공동체 안정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주도적으로 향촌 질서를 재정립하고 공동의 생존을 도모하려 했던 치열한 문학적 대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8세기 이후 산출된 김기홍의 <농부사(農夫詞)>나 김익의 <권농가(勸農歌)> 등 농가류 가사(歌辭) 작품들 역시 자영농으로 전락한 사대부의 체념적 독백이 아니었다. 이들은 농업을 학문 수양과 동등한 가치로 끌어올리며 농사 참여의 당위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구휼이나 마을 잔치와 같은 호혜적 재분배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지탱하려 했던 적극적인 실천의 기록이었다.

이는 고전시가를 경직된 역사주의적 도식에서 해방시켜 향촌 사회 내부의 생동하는 생활상을 복원함과 동시에, 사족들 역시 단순한 지배자나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향촌 공동체의 일원'이자 '감농자(監農者)'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규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적 의의를 지닌다.

     

거대 담론의 해체와 미시적 다원화: 고전시가 연구의 최근 동향

     

지난 몇 년간 고전문학 연구 분야, 특히 조선 후기 시가문학을 바라보는 학계의 지형도는 눈에 띄게 다변화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텍스트를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목적론적 역사관의 부속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대신,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되며 향유되었던 구체적인 시공간의 맥락, 즉 '미시적 생활사'와 '감각의 역사'에 주목하는 경향이 새로운 연구의 흐름으로 주목 받고 있다. 최근 학계의 동향을 보면, 전통적인 연구 대상인 강호가도(江湖歌道)나 농가류 시가를 다룰 때에도 작가의 관념적 지향보다는 그들이 발 딛고 있던 지역적 특수성, 가문 내의 경제적 상황, 심지어 당시의 기후 변화나 전염병과 같은 생태적 조건이 작품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융합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필자가 논문에서 강조했던 '향촌공동체의 호혜적 질서'라는 키워드는 최근 지역학 및 문화지리학적 방법론과 결합하여, 개별 지역(영남, 호남, 기호 지방 등) 사족들의 향촌 경영 방식과 문학적 표현의 차이를 비교하는 연구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 고전시가 연구 전반에서 포착되는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농가류 시가를 대상으로 한 후속 논의들에서 더욱 구체적인 실체로 확인된다. 이제 논의의 범위를 농가류 시가 연구로 한정하여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미시적 다원화의 흐름이 특히 <농가월령가>를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명확히 드러난다.


<농가월령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농가월령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근 연구들은 <농가월령가>를 단순한 감상용 시가를 넘어, 19세기 농업 환경의 변화에 대응한 실질적인 ‘매체’이자 ‘실용 농서’였음을 규명하는 논의로 이어졌다. 당시 인구 증가와 경작 규모의 축소로 인해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직접 농사를 주관해야 했던 ‘작인(作人, 소작농)’들이 급증했고, 이들에게는 다각화된 농법 정보를 집약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안내도가 절실했다. <농가월령가>는 ‘한글’이라는 문자 전수 방식과 방대한 정보를 담아내기에 용이한 ‘장편 가사’라는 양식을 전략적으로 채택함으로써, 한문 비해독층인 작인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최적의 미디어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아울러 작품에 내재된 ‘순환적 시간관’이 절기별 의례와 놀이를 통해 공동체의 유대감을 결속하는 도덕경제의 기제로 작동했음을 밝힌 성과도 주목된다.

나아가 농가류 가사가 지닌 다성성(多聲性)에 대한 논의도 한층 깊어졌다. 가집에 수록된 <부농가(富農歌)>는 실제 농촌의 고단함보다는 부유함을 바탕으로 도시 풍류 공간에서 향유된 이상적인 농가의 모습을 보여주며, 신자료 <산촌낙사(山村樂事)>는 노동 현장의 유희와 개인적 정감을 포착해 농가류 가사의 서정적 지평을 넓혔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베트남의 농부가 비교 연구나 일제강점기 손진태의 번역 문화사 연구는 우리 시가 연구가 세계적·근대적 맥락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고전시가가 정서적 교감을 강화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순환적 리듬을 공유하며 삶의 지침을 제공하는 실천적 매개체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문학의 실천적 가치 증명과 향후 연구의 전망

     

필자는 박사학위논문을 통해 한국 고전문학사가 단순히 낡은 양식에서 새로운 양식으로 이행하는 평면적 과정이 아님을 입증해 보고자 노력했다. 특히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농가류 시가를 통시적으로 추적하면서, 시조와 가사라는 갈래적 장벽을 넘어 ‘농사’라는 핵심 모티프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분화하고 다성성(多聲性)을 띠게 되는지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내고자 했다. 이를 통해 문학이 단순히 관념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며 구성원들을 다독이고 연대하게 만드는 실천적인 미디어로서 기능했음을 확인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앞으로 우리 고전문학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또 한 번의 도약을 맞이할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지점은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의 고도화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과거 수많은 농가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노동의 지리적 이동 경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작품 속에 기록된 기상 이변과 흉년의 데이터들이 정교하게 데이터베이스화된다면, 이를 시각적 매핑(Mapping)으로 구현하여 문헌 속에 잠들어 있던 향촌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문화 번역 및 비교 문학적 관점’, ‘생태 비평’ 등 새로운 해석적 방법론이 결합된다면, 한국과 베트남 등 동아시아 농경 문화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를 규명하거나, 식민지기 번역 문화사를 통해 우리 시가가 세계와 교차했던 맥락을 더욱 심도 깊게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농가류 시가에 담긴 인간-자연-노동의 유기적 관계망을 현대 사회가 직면한 기후 위기와 생태적 단절을 성찰하는 인문학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연구도 활발해질 수 있다. 또한 ‘매체학적 접근’을 강화하여, 고전시가가 당시 지식 소외 계층에게 실질적인 농법 정보를 전달하던 ‘살아있는 미디어’로서 어떻게 현장에서 작동했는지 그 소통의 구조를 복원하는 연구도 중요한 축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과거의 기록은 결코 박제된 화석이 아니다. 필자는 강단에서 학생들을 마주할 때마다 고전(古典)이 지닌 역동성을 강조하곤 한다. 수백 년 전 향촌의 사대부들이 들녘의 수고로움을 시로 지어 부르며 공동체의 위기를 넘고자 했던 그 뜨거운 마음을 읽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고전문학을 지속해서 연구하고 해설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들녘에서 피어난 우리 시가의 건강한 숨결이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현대 독자들에게 더욱 생생하게 가닿기를 기대한다.


신성환(2025 우수 박사학위논문 출판지원사업 선정자,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성환(2025 우수 박사학위논문 출판지원사업 선정자,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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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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