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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원산총파업 연구와 노동사의 과제 / 현명호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서 왔다.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은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열악한 생활을 이어간 일하는 서민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 조직화에 거름이 되었고 민주화 운동 이후 싹튼 시민 사회에 자극을 주었다. 지난 탄핵 시위 때 노조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행진의 선두에 선 모습은 언론에서도 여러 번 회자되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자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초등학생에게 “노동자는 ㅇㅇ이다"라고 질문하면 불편한 대답이 돌아오고, 노조 조끼를 입었다고 백화점에서 나가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오래된 일이다. 근대 노동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른바 식자들은 노동자를 교화의 대상으로만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한 양반은 처가가 노동자 집안이라고, 얼음 한 조각 대접받는 것도 꺼렸다고 했다.


내 박사논문 연구는 이 모순의 기원을 찾는 과정이었다. 사례로는 동해안의 항구 도시 원산에서 발생한 노동운동을 다루었다. 항구 노동자가 중심이 된 노동운동이다. 시간적 범위는 1895년부터 1929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원산에 항구 노동자가 등장하고, 노동운동을 조직했으며, 일제강점기 최대 노동쟁의였던 원산총파업을 일으켰다. 연구의 목적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했는가를 구명하는 데에 두었다.


나와 같은 질문을 던진 기존 연구들이 있었다. 두 세대로 나눌 수 있는데, 1세대는 노동자 개인과 그들의 단체 이익을 넘어, 식민지라는 억압구조에 저항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는지를 검토했다. 김윤환과 김중열 등, 1970년대부터 활약한 노동사학자들이었다. 2세대는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연대 의식을 가졌는지, 계급 언어를 구사했는지를 조사했다. 민주화 이후 좀 더 자유로워진 연구 환경에서 나온 성과였다. 특히 원산총파업 60주년을 맞아 김경일, 김광운 등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북한 역사학계의 노동운동 연구가 남한에서 간행된 것도 이 시기다.


내 연구는 좀 더 원산이라는 지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국 최대 파업이 왜 원산이란 동해안의 한 도시에서 발생했는지가 궁금했다. 원산은 한국 근대사에서 부산에 이어 두 번째 개항으로 선택된 곳이다. 필자는 사실상 첫 번째라고 이야기한다. 부산 개항이 일본과 가깝고 오랜 왜관 소재지라는 점에서 이미 선택된 것이라면, 원산 개항은 러시아의 남하 저지를 위한 일본의 선점이란 지정학적 이유로 비로소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이른 시기에 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의 한 거점으로 부상한 원산은, 적어도 함경도 지역에서는 독보적 경제 발전을 누린 도시였다. 그런데, 1920년대 말을 시작으로 함흥이 원산을 제쳤다. 아시아에서 규모로 수위를 다툰 수력발전소와 화학공단이 주위에 들어서면서, 함흥(흥남)은 소위 ‘식민지 산업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산도 1930년 중반이면 이 산업화 대열에 끼어든다. 하지만 1920년 말에는 원산 사업가들과 유지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크게 느꼈다. 함흥으로 공장이 유치되는 과정이 석연치 않다며 조선총독부에 항의하는 의미로 지역 공직에서 총사퇴했을 정도였다. 원산총파업은 바로 이 전환기에, 원산 사업가들이 지역 노조의 존재가 투자 유치에 걸림돌(이는 강성노조론의 기원으로도 보인다)이 된다며 시작한 총해고 사태였다.


조선일보 1929년 2월 1일, 단결의 위력을 보이는 원산노동연합회원
조선일보 1929년 2월 1일, 단결의 위력을 보이는 원산노동연합회원

원산 노동자들은 이러한 지역 사업가들의 총공세 (그리고 그들 편에 섰던 식민 행정과 사법 당국)를 맞아 무려 75일간 파업을 지속했다. 그들의 조직력과 역량은 하루아침에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필자는 그 역사적 과정을 복원하기 위해 그들이 원산이란 도시 공간에 남긴 유산을 추적했다. 노동자들이 직접 남긴 문헌적 기록이 적기도 했지만, 근대 이후 노동이란 것이 도시에서 안정적 일자리와 삶의 공간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 믿음이 있었다.


그 결과, 한국근대사의 첫 도시 노동자 거주 지구(소위 working-class district)가 원산에서 생겨났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1890년대 말 즈음인데, 이때 원산항 노동자들을 “석우동” “인민"이라 불렀다. 석우동은 원산에서 일본인 거류지와 원산 토착 조선인 거주지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양 지역의 물적 교류가 통과하는 곳이었다. 원산항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와 일자리 경쟁, 조선인 고용주(객주 상인)들과 임금 투쟁을 거치며 도시 정착에 성공한 최초의 노동자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지역사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연구는 최근 노동사 연구에서 드물지 않다. 민족해방이나 계급투쟁과 같은 기준으로 근대 노동운동을 본다면, 항상 아쉽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거나 결과론으로 수렴되는 해석을 내려야 함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의 시각을 좀 더 정확하게 대변하기 위해서는 역사학도 그들이 실제로 일하고 살았던 현장에 초점을 맞춘 분석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기기도 했다. 지역으로 초점이 옮겨 가자, 인천에서 근대 첫 노동 조직의 발생한 것, 1904년 목포항 노동쟁의가 외교 분쟁으로 되었던 것, 군산의 1920년대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 영향이 작용한 것, 등을 밝혀내는 연구 성과가 있었다.


이는 지방자치제 출범과 지역 재생 사업 부상, 지역 거점 대학 등에서 근대지역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것과도 관계가 깊다. 활용할 수 있는 자료도 늘었다. 항구 도시나 관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지방 관청 조사보고서나 상공회의소 연간 통계, (특히 일본인이 운영한) 지역 신문 및 지역 소개 책자가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또한 지역에서는 노동운동이 다른 사회운동과 겹침이 밝혀졌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분법을 넘어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을 이해하는 새로운 역사 해석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근대지역사 연구 전반을 제고할 필요가 제기되면서 노동사 연구도 이에 발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다.


필자도 지역사적 접근법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하나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필자의 원산 연구가 북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남한의 주요 도시인 경우,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지역사 연구을 추진하기 위한 시설과 예산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어 최근에 많은 성과를 축적해 나가고 있다. 북한 지역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연구 축적의 양극화가 발생하고 있다. 최근의 국제 정세나 통일에 관한 관심의 급격한 감소로, 북한 지역사 연구는 침체기에 들어선 상태이다. 앞서 함경도가 중심이었던 ‘식민지 산업혁명'도 언급했지만, 근대 북한 지역과 근대 남한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현격히 달랐음을 고려한다면, 전자의 역사적 사례들을 충분히 발굴하지 못함은 관련 연구자에게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한 연구 환경적 측면에서 남한 지역 노동사 연구자와 북한 지역 노동사 연구자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아쉬움은 원산 지역 노동사를 공부하며 필자가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더 크다. 특히, 원산총파업을 도시 공간의 관점으로 다시 보며, 원산 노동자의 주체성도 다시 보게 된 점이다. 기존 연구가 밝히듯 그들은 분명 민족적 차별과 계급적 착취에 저항한 식민지 노동자였다. 그들은 조선인 상인보다 훨씬 조직력이 크고 자금이 많고 행정동원력이 높은 일본인 자본가와 맞서 싸웠고, 계급투쟁의 언어를 사용했고 연대 행동의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 이루지 못한 민족 독립과 계급해방의 간절함을 보여주려고, 정작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이미 일구어낸 삶의 업적을 보여주는 일을 간과한 것은 아닐지.


내가 다시 보는 원산총파업은 원산 노동자들이 30년간 일군 삶과 노동을 잘 보여준 75일간의 전시장이었다. 원산 노동자 역사의 의미를 특히 두드러지게 한 것은, 확연한 대조를 이룬 인천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파업 중 대체 노동자로 높은 임금을 약속받고 원산에 왔으나, 자유로운 출입을 감시당한 채 원산항의 한 창고에서 변변한 난로도 없이 추운 겨울을 보낸 그들은 약속받은 임금도 제대로 못 받았고 같은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을 방해한다는 비난만 받았다. 보호라는 명목하에 경찰 봉쇄 인력이 배치된 원산항에서 임시직 노동을 이어간 인천 노동자는 결국 정해진 기간을 채우기도 전에 다시 인천으로 돌려보내졌다. 반면 파업한 원산 노동자에게는, 삼일운동 이후 쌓아 올린 소비조합과 노동 회관, 노동 병원이란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법을 준수하면서 파업을 지속해가는 모습에 사회 각계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원산과 인근 주민들은 땔감을 보내거나 점심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응원했고, 원산 중국 영사관과 일본인 노동자는 파업을 방해하는 대체 노동 고용에 관여하기를 거부했다. 두 집단의 대조는 원산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삶의 업적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끝으로, 한국 노동사의 앞으로의 과제가 있다. 각 지역 노동운동의 비교사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노동사가 지역적 전환을 맞으며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많이 발굴된 것은 큰 장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사 연구자들이 자기 지역만 알고 다른 지역 노동사의 전개를 모르게 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노동사의 지역적 특수성은 꼭 밝혀져야 하지만, 근대 노동이 가지고 온 근원적 모순을 탐구하는 것은 노동사의 사명과 같다. 지역사라는 방법론이 이 보편적 탐구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노동사 연구자들의 공동 논의가 필요하다. 2029년, 원산총파업이 100주년을 맞는다. 분산된 노동사를 한데 모을 수 있는 논의의 장이 다시 열리길 기원한다.


현명호(2025 우수 박사학위논문 출판지원사업 선정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현명호(2025 우수 박사학위논문 출판지원사업 선정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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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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