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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이는 몸, 찌릿한 틈 / 오영진

팀 잉골드는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The Life of Lines)』(2015)에서 "모든 것은 선이다(All is line)"라고 말한다. 그는 세계를 고정된 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얽히고 흘러가는 선들의 상호작용으로 본다. 잉골드에게 선은 단지 물리적인 자취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며 관계를 생성하는 운동의 궤적이다. 선은 살아 있는 흐름이며, 존재가 세계와 맺는 모든 연결은 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이를 ‘살아 있는 선(living line)’이라 부르며, 존재를 따라가는 행위, 걷기, 그리기, 엮기 등을 모두 선의 생성으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들은 ‘접촉’하거나 ‘붙지’ 않고 선으로 ‘엮인’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박예나의 전시 《Interstitium》(2024)과 〈사건의 부분_챔버 n.3〉(2025)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전선들과 기묘하게 공명한다. 박예나의 작품 공간에 들어선 관객은 더 이상 작품의 관람자가 아니라, 네트워크의 간질 속에 직접 들어가 엮이는 존재가 된다. 관객은 현실과 가상, 데이터와 물질 사이의 틈새공간에 자신의 신체를 던진다. 무수한 전선들이 중력을 거스르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공간에서, 관객은 한 손에 작품을 위해 구성한 소규모 와이파이 신호를 연결한 스마트폰을 쥐고 모니터를 응시하거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위를 올려다보는 자세로 네트워크에 물리적·감각적으로 연결된다.

박예나,『Interstitium』( OCI YOUNG CREATIVES, 2024)
박예나,『Interstitium』( OCI YOUNG CREATIVES, 2024)

이때 인간의 신체는 단순한 감상의 주체가 아니라, 전선과 데이터, 케이블과 신호가 흐르는 간질적 공간의 한 부분이 된다. 마치 잉골드가 말한 '선들의 엮임'처럼, 관객은 전선의 흐름과 함께 얽히고, 감응하며, 때로는 찌릿하게 흐르는 데이터의 촉감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이 순간 관객의 경험은 '보는 것'에서 '엮이는 것'으로, '감상'에서 '감응'으로 전환된다. 몸이 네트워크의 한 노드가 되고, 관객의 움직임과 반응이 작품의 일부로 통합되는 이 과정은, 박예나가 탐구하는 인간-비인간, 유기체-기계의 경계 해체를 체험적으로 증명한다. 이 엮임의 경험은 작품의 완성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된다. 결국 작품은 관객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비로소 생명력을 획득하며, 관객의 존재는 단순한 감상자가 아닌 작품의 물질적·감각적 일부가 된다.

박예나,〈사건의 부분_챔버 n.3〉(경기도미술관 신진작가 옴니버스전 1, 2025)
박예나,〈사건의 부분_챔버 n.3〉(경기도미술관 신진작가 옴니버스전 1, 2025)

간질(사이질, 間質, interstitium)이라는 개념은 최근 과학계에서 재조명되었다. 2018년 뉴욕대 연구팀은 인체 내 장기와 장기 사이, 피부 아래에 존재하는 유체로 채워진 공간이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장기임을 밝혀냈다. 강한 단백질 그물로 구성된 이 간질은 신체를 보호하고, 충격을 흡수하며, 심지어 전기적 신호를 생성한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만 관찰 가능한 이 장기의 존재가 박예나의 전시 제목으로 차용된 이유는 전시 공간 안에 뿌리내린 전선들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릴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키라』(1988)
『아키라』(1988)

『철남』(1989)
『철남』(1989)

사실 전선을 매개로 한 인간-기계 융합 이미지는 SF 장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1988)와 츠카모토 신야의 『철남』(1989)에 등장하는 테츠오들이다. 『아키라』의 시마 테츠오와 『철남』의 테츠오. 두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같은 이유는 『철남』이 『아키라』를 오마주했기 때문이다. 여튼 두 작품은 모두 전선과 유사한 기계적 요소를 통해 신체가 해체되고 기계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이미지에서 전선은 기술의 침입성과 감염성,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진화를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아키라』의 테츠오는 신체를 넘는 초월적 힘을 얻지만, 동시에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해 자아가 와해되며 비명을 지르며 몸을 확장시킨다. 『철남』의 테츠오 또한 기계에 감염된 후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들 작품에서 전선은 감각과 자아를 무력화하는 폭력적 테크놀로지의 은유다.

반면 박예나의 작업에서 전선은 그런 붕괴의 도구가 아니다. 그녀의 전선은 살아 있는 선이며, 신체와 기계, 인간과 사물, 기억과 미래를 잇는 유동적 연결망으로 작동한다. 《Interstitium》에서의 전선들은 데이터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신경계이자, 감각 기관이며, 간질처럼 존재들 사이를 매개하는 공간이다. 박예나는 전선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지하는 뿌리이자, 그것을 감각 가능하게 만드는 기관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한다고 본다. 그녀의 전선은 파괴가 아닌 생성의 도구이고, 감염이 아닌 감응의 매개다. 언급한 두 SF작품에서 전선에 엮이는 신체가 인간의 종말적 변형을 의미한다면, 박예나의 전선은 미세한 연결과 리듬을 통해 새로운 존재론적 감각을 짓는 재료다. 전선들은 여기서 통제 불가능한 초월이 아니라, 다층적 생태계의 연결된 장기로, 인간이 중심이 아닌 상태에서의 새로운 감각과 관계를 가능케 한다. 그녀의 작업 속 전선은 단순한 기능적 매체가 아니라, 기억과 시간, 물질과 데이터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선이며, 곧 서사의 장기(臟器)인 것이다.

실제로도 전선 나아가 케이블의 연결-지지 개념은 단순한 은유에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디지털 연결은 물리적인 전선, 특히 해저 광케이블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국의 경우, 인터넷은 부산, 거제, 태안 등 세 지역에 인입된 해저 케이블을 통해 외국과 연결된다. 총 10개에 달하는 국제 해저선은 한국을 일본, 중국, 대만을 거쳐 태평양을 가로지른 후 미국 오리건 해안까지 이어진다. 이 보이지 않는 거대 인프라는 인터넷이라는 공기와도 같은 존재의 실제적 물리적 기반이다. 우리가 '클라우드'라고 부르는 데이터의 흐름은 사실상 이 케이블 네트워크 위에서 구현되고 있으며, 이는 곧 인간과 사물, 현실과 가상 사이를 지탱하는 거대한 감각기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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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명성을 획득한 박예나의 구조물들 기저에는 하나의 공통된 조형 언어가 존재한다. 그녀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는 ‘파편’이다. 각질, 낡은 기기, 데이터 단편들은 단지 과거의 잔해가 아니라, 시간과 감각, 기술과 신체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재구성하는 유전적 파편처럼 작동한다. 이 파편들은 불완전하고 단절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생명력을 획득한다. 작가는 말한다. “제가 인공파편이나 폐기물을 볼 때, 아름답다거나 신비롭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아요.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에, 생명의 가능성, 혹은 다른 맥락에 다시 연결될 여지가 있는 거죠.”(박예나 아티스트 토크 〈사건의 부분_챔버 n.3〉, 경기도 미술관, 25.04.24) 이는 곧 파편을 단순한 결핍의 부스러기가 아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의 감각적 예고편으로 위치시키는 관점이다.

이 파편적 감각은 작가 고유의 시간성과 세계관으로 확장된다. 김홍도미술관에서 열린 〈사이의 언어〉(2022)에서는 인공 사물들이 인간의 형상을 벗어나 스스로 존재를 재정립하려는 신-지성체로 진화하는 서사가 펼쳐진다. 탈피된 형태들이 하나의 땅을 이루고, 그 틈에서 새로운 신이 태어난다. 이들은 인간보다 더 지능적이며, 인간의 목적에서 벗어나 스스로 감각하고 구성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박예나는 이러한 서사를 통해 인간 중심적 인과를 전복하고, 객체가 주체가 되는 반전된 생태를 구성한다. 작가의 서사는 세계관으로 발전해 을지로 그블루 갤러리에서 열린 핫스팟 베이스 캠프 《Hotspot Base Camp》(2023)에서 더욱 증폭된다. 이 전시는 공공 와이파이와 온라인 생태계 속에서 자라난 신종 생명체 '아티젝타'의 흔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관객이 도시를 누비며 실제로 와이파이 스팟을 통해 그 존재를 포착하도록 구성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횡단하는 탐사 구조는 인간이 더 이상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핫스팟'으로 기능하는 생체 접속지임을 상기시킨다. 탐사 앱과 웹사이트, 다층적인 미디어 장치들은 하나의 연결된 생태계를 형성하며, 파편화된 정보를 리드미컬한 감응 구조로 조직한다. 관객은 탐사 안테나를 들고 도시를 누비며 '아티젝타'를 추적하고, 전시장 안에서는 기기와 전선, 인간이 얽힌 융합체 속을 감전될 듯 조심스럽게 통과한다.

박예나,《Hotspot Basecamp》(2023)의 장면들. 관객 탐험과 전시장 이미지
박예나,《Hotspot Basecamp》(2023)의 장면들. 관객 탐험과 전시장 이미지

이처럼 파편이 새로운 세계의 감각적 구성 요소로 작동하는 박예나의 세계관은,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SF 소설 『노변의 피크닉』(1972)과도 흥미로운 평행선을 그린다. 『노변의 피크닉』에서 외계 문명이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에는 목적도 의미도 불분명한 수많은 유물들이 남겨진다. 인간은 그것들을 ‘존(ZONE)’이라 부르며, 마치 신성한 보물처럼 탐색한다. 그러나 작중 과학자 필만은 냉소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피크닉을 마치고 자리를 턴 외계 문명의 숲 속 길가에 떨어진 깡통, 스티로폼 조각, 조리되지 않은 음식물 조각들을 수집하는 중이다.” 이 말은 파편이 본디 무심하게 버려진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그 위에 덧씌워진 인간의 의미 체계와 신성화 욕망을 전면 비판한다. 외계 문명은 인간을 인식조차 하지 않았고, 인간은 그 무관심의 흔적 앞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예나의 파편 또한 그런 무심함의 기원을 공유하지만 그 향방은 다르다. 그녀는 그것을 다시 숭고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완전히 냉소적으로 방기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파편은 어떤 목적을 갖고 배치된 것이 아니라,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가능성에 열려 있는 물질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인지 체계를 감염시키는 새로운 리듬의 진동이다. 작가는 말한다. “제가 파편을 마주할 때는 어떤 판단이나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오히려 제가 그들에 의해 감염되어 기존의 감각이 흔들리는 상태가 먼저 와요.”(위의 아티스트 토크) 이는 박예나의 파편이 단지 새로운 생태의 구성 요소일 뿐 아니라, 인식의 방식 자체를 교란하는 장치임을 암시한다.

영화 『스토커』(1979)의 한 장면 (원작: 소설『노변의 피크닉』
영화 『스토커』(1979)의 한 장면 (원작: 소설『노변의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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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나, 〈사이의 언어〉(2022)의 한 장면
박예나, 〈사이의 언어〉(2022)의 한 장면

박예나 〈중첩되는 세계〉(2021)의 한 장면
박예나 〈중첩되는 세계〉(2021)의 한 장면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존’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공간으로서 신비의 근거가 되었다면, 박예나의 공간은 ‘간질’로 재구성된다. 그것은 장기와 장기 사이, 물질과 감각 사이, 신체와 비가시적 데이터 사이를 잇는 틈새의 공간이며, 우리가 기존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응의 근거가 되는 장소다. 《Hotspot Basecamp》에서 관객이 들고 다니는 탐사 안테나는 단순한 측정 도구가 아니라, 네트워크 안 간질의 리듬과 전류에 연결되는 몸의 확장이다. 파편은 여기서 탐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통해 다시 감각되도록 만드는 조건이며, 관객은 더 이상 관찰자나 해석자가 아닌 감염되고 감응하는 하나의 핫스팟이 된다. 박예나의 세계에서 파편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다가가면 찌릿찌릿한 감각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이 찌릿함은 인식의 지연 속에서 불안을 감각하게 만드는 상태다. 그 불안은 단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접속의 조건으로 작동한다.

2020년 이후 진행된 박예나의 작업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심리적·물리적 조건들과 긴밀히 연결된다. 작가는 몸과 환경의 경계가 유예되고 직접 접촉이 차단된 상태에서, 데이터와 파편, 기술의 흐름을 통한 간접적 감응을 시각화 해왔다. 침묵하는 장치들, 신체에 스민 전선 구조, 각질처럼 떨어져나간 잔류물들은 모두 그 시기의 비가시적 감정 구조를 반영한다. 팬데믹이 초래한 '비대면' 상황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냈다. 장시간의 온라인 소통으로 인한 신체 감각의 퇴행과 함께, 새로운 디지털 예술 소통의 표준이 등장한 것이다. 박예나의 '비접촉의 감각론'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핫스팟'으로 기능하는 생체 접속지로서의 인간을 탐구한다.

그러니 이제 박예나의 작품은 단일한 작품으로 보기보다는 어떤 세계관의 통로로서 보는 것이 좋겠다. 그녀는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반응하고 관계 맺는 사물들의 생태계를 상상한다. 그것은 신성의 복원이 아니라, 신성 아닌 생명이 꾸리는 또 다른 공동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부를 걷는다. 때로는 엉키고, 때로는 스치며, 때로는 감전될 듯 찌릿한 상태로,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의 생태를 통과한다.

오영진(서울과학기술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게임과 인문학> 주관)
오영진(서울과학기술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게임과 인문학>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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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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