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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분의 무게 / 마준석


출처: AP News
출처: AP News

10월 17일 베를린 미테구에 있던 평화의 소녀상이 결국 철거되었다.1) 일본의 체계적이고 집요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이나 자리를 지켰으니, 이마저도 독일과 한국 시민들의 관심과 응원 덕분일 것이다. 재독 시민단체 코리아 협의회는 소녀상을 새로운 장소로 옮겨 다시 설치할 계획이라 밝혔다. 작년에는 오스트리아 린츠 대성당에 설치된 성모 마리아상이 반달리즘으로 파괴되었다.2) 아기 예수의 탄생을 묘사한 많은 작품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아기 예수는 푹신한 마구간의 짚더미 위에 순백의 모포로 싸인 채 새근새근 자고 있다. 그 모습을 평화로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 너무나 사랑스러운 장면이지만, 모든 작품들에서 출산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완벽하게 표백되어 있다는 사실은 다소 기이하지 않은가? 에스터 슈트라우스 작가의 출산하는 성모상은 이러한 지극히 당연한 물음에서 출발했고, 이를 신성모독이라 생각한 반대자들에 의해 성모상은 톱으로 참수되었다.


에스터 슈트라우스, <Crowning> (2024) / Ulrich Kehrer 촬영
에스터 슈트라우스, <Crowning> (2024) / Ulrich Kehrer 촬영

예술 작품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작품은 상충하는 철학적, 종교적, 정치적 주장들이 충돌하는 장소가 된다. 8-9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성상 파괴 운동 또한 그러했다.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온 3세와 그의 추종자들이 성상을 거부했던 이유는, 그려진 혹은 조각된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오직 그의 인간적인 본성밖에 담아낼 수 없는 탓에 신성모독적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 속에 무한한 신성을 담을 수 없으니, 인간은 성상을 통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이렇게 제국은 성상 파괴의 열정에 휩싸였고, 이 불길이 수많은 폐허를 남긴 채 사그라들 때까지 100년이 넘게 걸렸으며 기독교 세계는 동서로 쪼개졌다.


성상 파괴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예수의 신성은 인성과 대립하는가? 그렇다. 분명히 무한과 유한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있으며, 유한은 무한의 바깥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무한이 단순히 유한의 대립개념인 것이 아니라 유한을 배제하는 한에서 그러니까 유한과의 간극 덕분에 오히려 무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의 무한성은 그가 단순히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가 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업 앞에 끊임없이 망설이면서 웬만하면 살게 해달라고 고백하는 나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두 명의 범죄자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초라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확보된다. 다시 말해 나약한 하나의 인간이 망설임 속에서도 죄 지은 인간들을 위해 끝내 죽음의 길로 나아갔다는 점이, 그리하여 신 그 자체가 스스로를 십자가의 제물로 바쳤다는 점이 바로 신과 예수의 무한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신이 숭고하기 때문에 예수가 숭고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숭고함의 깊이는 신의 비루한 외형에 근거한다. 신 그 자체의 형상과 누더기를 걸친 채 구경거리가 된 가장 끔찍한 모습 사이의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서. 아니 정확히 말해 이러한 간극 그 자체가 예수의 무한성인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악무한 개념을 비판하며 진무한 개념을 도입했을 때의 의도다. 무한과 그것의 여분인 유한은 대립되어 있지만(악무한), 바로 그 대립 자체가 실제로는 무한 그 자체(진무한)인 것이다. 따라서 성상 파괴론자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오직 그의 인간적인 본성만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은,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왜 성상이 필요한지에 대한 근거가 된다. 예수의 무한성은 그가 실상 나약한 유한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레옹 보나,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1874)
레옹 보나,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1874)

어떤 것이 그것에 대립된 여분으로 구성되는 이 사태는 비단 종교에서만 일어나는 신비가 아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해준다.3) 1810년의 프랑스 형법 제 64조는 광기의 문제를 명문화하고 있다. 즉 누군가가 정신 이상의 상태에서 범죄적 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그에게는 어떠한 범죄도 적용되지 않는다. 이 조항은 매우 엄격한데, 범죄자가 실제로 광인이었을 경우 이때 법원은 처벌을 경감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서 처벌 그 자체를 내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광기에서 범죄 자체의 문제는 증발되어 있고, 범죄와 광기는 서로 모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미쳤으면서 동시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광기는 사법 판단의 영역 너머에 있는 바깥이자 여분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64조가 사법 현장에서 적용될 때에는 예상치 못한 파급효과를 낳았는데, 광기가 본래 기획했던 대로 죄와 처벌을 소멸시키기는커녕 모든 범죄가 정당하게 자기 스스로를 광기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형법의 정합성을 미궁에 빠트리는 심신미약의 문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범죄와 광기가 엄격한 대립 속에 있지만 바로 그 대립 덕분에 모든 범죄가 잠정적으로 동시에 광기일 수 있다는 역설이다. 원리상 광기는 범죄와 범죄 아닌 것을 구분하는 한계지점이자 사법 바깥에 위치한 여분이지만, 실상 법원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광기인지를, 광기라면 얼만큼의 광기인지를 그러니까 자신의 여분을 재판해야만 하는 것이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표준화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상식적인 관점에 따르면, 테세우스의 배에서 널빤지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함선은 정확히 동일한 테세우스의 배로 남는다. 그렇기에 거대한 함선에 비해 작은 널빤지는 그저 여분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의 널빤지가 있으나마나 한 작은 부속에 불과할지라도, 분명 그 거대한 함선은 이런 널빤지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전체 널빤지가 교체되었을 때, 심지어 그 널빤지를 모아다가 새로운 제 2의 배를 건조했을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전체가 전체로서 구성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것 바깥의 여분이 필수적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믿음을 보라. 예수와 사도들이 함께 탄 배가 풍랑을 맞닥뜨렸을 때 위험 속에 빠진 사도들이 한 일은 그저 예수를 원망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예수의 기적에 대한 사도들의 의심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와 그 가르침을 알아도 이를 따르지 못하는 무능력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예수가 로마 군인에게 붙잡히는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고,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노라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저주까지 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제자들은 사탄의 길을 걷는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을 때,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고 사랑하는 스승에게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예수는 차갑게 돌아보며 말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복음 16:23)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제자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불신과 나약함을 반대로 읽어야만 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을 때, 베드로가 곧바로 예수의 말을 긍정하면서 속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제물이 되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그는 분명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마태복음 16:23) 자이겠지만, 이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종교적인 광신과 맹목적인 비인간성뿐이다. 신의 과업 앞에서도 오직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그 연약함과 어리석음 덕분에, 역설적으로 베드로는 제자 중에 으뜸가는 제자이자 교회의 반석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방황하지만 길은 잃지 않는 나약한 죄인들의 공동체이지, 이미 완전무결한 광신자들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를 충분히 따르지 못하는 제자들의 불신 덕분에 그들은 광신자가 아닐 수 있었고, 바로 그러한 불신이라는 믿음 바깥의 잉여가 역설적으로 그들의 숭고한 믿음을 구성한다. 그들이 어리석고 나약하기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죽음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았던 그들의 집요한 발걸음이 그토록 무한한 것이다.


카라바조,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1601)
카라바조,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1601)

에스터 슈트라우스의 출산하는 성모 마리아상의 작품 제목은 <Crowning>이다. 이 제목은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불가능한데, 여기서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의 대립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Crowning은 한편으로 장차 왕 중의 왕이 될 아기 예수의 숭고한 대관식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Fetal Crowning을, 즉 출산 과정에서 아기의 머리가 질 입구에 나타나 마치 왕관처럼 외음부로 둘러싸이는 순간을 일컫는 의학 용어를 환기하고 있다. 흔히 성화에서 그려지는 평화로운 아기 예수의 탄생과 달리, 생명의 탄생은 실상 피와 분비물로 점철된 트라우마적인 고통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출산이 고귀한 까닭은 단순히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어른거리는 고통과 오물의 시간 속에서만 생명이 탄생한다는 냉혹한 역설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고 나는 믿는다. 실패한 사랑, 의지박약과 게으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들, 망가져버린 꿈들. 수없이 저지르는 오류들은 내가 배제하고자 하는 내 인생의 오점이자 잉여이지만, 바로 그 잉여가 역설적으로 나의 인생을 구성한다. 나의 비루하고 보잘 것 없는 실존이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충분히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작인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후회와 연민 속에 스스로를 좀먹겠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것들로 가진 것들의 무게를 가늠하며 자신의 선택을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1) 연합뉴스 기사 (https://url.kr/muae1n)

3)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2003, 나남, 48-49쪽.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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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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