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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대한제국, 황씨 부인이 하와이를 선택한 까닭은? / 한보람

1902년 12월 27일, 『황성신문』에는 ‘하와이 이민’이라는 제목으로 기사 하나가 실렸다. 


“인천에 체류하는 미국인이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기획하여 그 모집에 착수하였음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이는 미국인 데쉴러 씨 등이 모집했다는데, 먼저 모집에 응한 한인 54명이 이번 달 22일 일본을 경유하여 하와이로 향하였다더라.”

한국인 최초 하와이 이민자의 출항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 배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던 한국인은 총 102명이었다. 정확히는 여성 21명, 어린 아이 25명, 통역 2명, 그리고 남성 54명이었다. 같은 배로 하와이로 향했던 성인 여성이 남성의 절반 가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최초의 미주이민단은 당대 사회의 떠들썩한 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을 보도했던 대한제국의 언론 보도는 배에 타고 있던 여성들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림1]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galic호
[그림1]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galic호

대한제국기 하와이 이민 여성들에 대한 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그녀들을 하와이 노동 이민자의 ‘동반 가족’이라고 당연하게도 규정했다. 1900년대 초반, 아직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서양이라는 존재조차 낯설었을 시대, 더구나 서양에 이민을 가는 선택은 너무나 낯설어서 상상조차 힘들었을 시대에, 여성의 이민이라니. 그녀들이 이민의 주도권을 가지고 그처럼 적극적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료를 열자마자, 세상을 압도할 만한 그녀들의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했다. 반전이었다. 그런데 그 에너지가 낯설지 않았다. 이전에 근대전환기 여성 사건을 검토하던 때에도 대한제국 여성들이 자신의 소속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살인이라는 극단적 방법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열혈 부인들이었음을 확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미 나는 당대 여성들의 적극성과 주체성의 무시할 수 없는 역동적 힘을 확인했다. 나는 또 한 번 내 속에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역사 속 여성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성했다. 


[그림2] 활쏘는 조선여성들
[그림2] 활쏘는 조선여성들

그 시절 여성들은 다양한 이유들을 안고 하와이행을 선택했다. 하와이 이민 2세대 김 일레인 씨는 외할머니가 갓난아기였던 딸을 품에 안고 하와이로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도박꾼 남편 때문에 이미 부부 사이의 아이들 중 몇 명을 잃은 뒤였다. 어느 날 어린 딸이 자꾸 울자 시아버지가 담요를 덮어 울음을 그치게 하려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녀는 아기만 데리고 하와이행 배에 올랐다. 손녀는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다 믿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재판기록을 담고 있는 『사법품보』에는 제 역할을 못 하는 남편을 버리고 떠난 여성들의 사건이 종종 등장한다. 할머니의 단호한 결단은 결코 그 시대에 존재할 수 없었던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였던 문또라가 하와이 이민을 선택한 이유는 또 달랐다. 1903년, 그녀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가를 떠나 여덟 살 딸과 함께 전도부인(Bible woman)의 직함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이들은 타인의 생각에 기대지 않고 홀로 딸과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그림3] 문또라 모녀
[그림3] 문또라 모녀

여성들이 데리고 떠난 건 딸 하나만이 아니었다. 일가족의 리더로서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떠났던 고관 부인도 존재했다. 황씨 부인은 평안도 지역의 고관이던 남편을 버려둔 채 장성한 큰 아들 내외와 딸, 막내아들을 모두 이끌고 하와이로 향했다. 그녀는 남편이 기생을 첩으로 들인 후 어느 날 황씨는 남편에게 단호히 선언했다. 


“더 이상 당신과 살 수 없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당신을 부끄럽게 하겠소. 아이들은 교육을 받을 것이고, 나는 덕망 있고 모범적인 사람이 될 테니, 당신은 그대로 남아 있으시오.”

표면적으로 황씨는 큰 아들의 동반자인 어머니로 보일 테지만, 실제로 가족의 리더는 그녀였다. 양반가 출신인 황씨는 평생 손에 흙 한 번 묻혀본 적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모조리 이끌고 하와이에 도착한 그녀는 곧바로 사탕수수 농장에서 아들, 며느리와 함께 노동을 시작했다. 양반가 마님은 한순간에 이민 노동자가 되었지만, 그녀는 현실의 실망을 묵묵히 견디기보다 거침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실망스러운 남편을 떠나기 위해, 아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신앙과 신념을 따르기 위해, 여성들은 하와이로 향했다. 그녀들에게 하와이는 가본 적도 없고 다시 돌아올 보장도 없는, 만 리 밖의 낯선 땅이었다. 당시 『제국신문』은 하와이로 떠나는 한국인들을 두고 ‘동서남북을 분변치 못하는 어리석은 한국 백성’이 가서 노예 노릇이나 하게 될 것이라며 한탄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단호히 그 낯선 땅으로 떠났다. 자신의 파트너인 남편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자기 책임 아래 있는 자식의 안위가 위태롭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녀들은 익숙한 세계를 박차고 나갈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냈다.


물론 떠나는 것만이 결단은 아니었다. 시온 리는 1903년 하와이 노동자로 먼저 떠난 남편을 따라가지 않았다. 술과 노름을 좋아하는 망나니 같은 남편을 끝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친정어머니 곁에 남아 딸과 아들을 키웠고, 이제는 달라졌다며 하와이로 와달라는 남편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918년 남편이 직접 한국으로 와 가족을 데리러 온 뒤에야 비로소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떠남도 머무름도 그녀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다.


20세기 초, 한국의 역사에는 상상 불가능한 생경한 미래에 거침없이 뛰어든 여성들이 있었다. 최초의 이민선 갤릭 호에 오른 21명의 여성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하와이로 향한 400여 명의 여성들 중에는 그렇게 자기 인생의 방향키를 단단히 쥐고 있던 여자들이 있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확인하고 난 뒤, 이들을 더 이상 노동 이민자의 ‘동반 가족’의 자리에 놓아둘 수가 없어졌다. 가족의 ‘리더’로 공동체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졌던 수많은 대한제국의 여성들. 그때 신문이 미처 호명해주지 않았을 뿐, 그곳에 그녀들은 분명히 있었다. 우리는 역사 속 한국 여성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이제 그녀들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우리의 노력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한보람(대전대학교 강사)
한보람(대전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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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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