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단 앞, 떨어져 나온 마지막 말 / 김보슬
- 한국연구원

- 3일 전
- 4분 분량
타이포그래피에서 'orphan'이라는 용어가 있다. 줄바꿈을 할 때 마지막 줄에, 또는 새로운 페이지 맨 위에 남겨진, 문단의 마지막 줄을 가리킨다.


형제를 지키는 사람
2주 전 사회적기업 ‘브라더스키퍼’ 창립자 김성민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기업은 자립준비청년, 즉 만 18세가 되어 보육원과 위탁가정의 보호가 종료된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정서적 자립을 돕는 조직이기도 하다. 회사명은 창세기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아벨의 행방을 묻는 신에게 가인이 반문한다.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김성민이 어릴 때부터 품었던 염원,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바로 이 이름에 담겨 있다.
김성민 자신도 세 살 무렵 보육원에 맡겨진 고아 출신이다. 이름도, 주민번호도 보육원에서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한다. 17년간의 보육원 생활을 마치고 2004년 만 18세에 사회로 나왔을 때, 그는 6개월간 노숙생활을 하며 절망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 경험을 자신만의 것으로 묻어두지 않았다. 2018년 브라더스키퍼의 초석을 세우고 연 매출 수십억 원의 사회적기업으로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자립준비청년을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인정받게 하는 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함께 만난 일행 중 누군가가 물었다. "이제는 많이 지치신 상태라고 하시지만 그래도 표정이 편안해 보이세요. 혹시 사랑으로 충만해서 그런 게 아닐지." 김성민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아뇨, 오히려 사랑은 제게 가장 필요한 거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참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자신이 일에 지친 지난 몇십 년 세월의 어떤 곡절도 별것 아닌 게 된다고. 사랑이 그를 위로한다고.
그는 말했다. "부모나 친구, 연인에게서 받았던 뜨거운 사랑을 떠올려 보세요. 이제 그걸 타인에게 선물해 보는 거예요." 인간의 자립은, 사랑을 선물할 수 있을 때 완성된다고도 했다. 자립준비청년들과 함께 누구보다 이 ‘자립’이란 말에 오래 머물렀을 터이다. 고아로서 받은 사랑의 기억이 희미할지 몰라도, 그는 그만큼 더욱 선명하게 사랑을 선물하는 법을 믿는 것 같았다. 그런 믿음 속에서 사랑은 글자들 속 ‘orphan’처럼 본래 속했던 곳과 분리되더라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며, 새로운 페이지 위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만든다.
사랑의 세 요소와 사랑력
한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자존감 수업』의 저자 윤홍균은 자존감과 사랑의 관계에 천착해 온 인물이다. 그가 제시한 사랑의 세 가지 요소는 이렇다.
첫째, 상대방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 둘째,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을 수용하고 이해하려는 태도. 셋째, 상대방에게 필요한 도움을 실질적으로 주려는 노력.
이렇게 사랑을 알고 난 뒤에는 실제로 그것을 행하고 실천하는 '사랑력'이 필요하다. 윤홍균이 꼽는 사랑력의 네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상대방이 편안해 하는 거리를 허용하기. 시인 나태주는 말했다. "사랑을 하려면 저만치 거리를 둘 줄 알아야, 약간의 거리를 허용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는 것이다. 상대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둘째,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환상을 경계하기. 사랑은 만능이 아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도,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윤홍균은 정신과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며 이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사랑은 기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셋째, 어려운 순간조차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계기로 승화시키기. 김성민이 노숙 생활과 창업을 넘나들며 형제들의 문제를 고민한 것처럼,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과 실패는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orphaned letter가 새로운 문단의 시작이 되듯, 우리의 고통도 새로운 이야기의 첫 문장이 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정신건강을 갉아먹는 과도한 인내는 삼가기. 윤홍균이 자존감 전문가로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다. 사랑은 자기 희생이 아니다. 자신을 지우면서까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파괴다. 건강한 자존감이 있어야 건강한 사랑도 가능하다.
그러나 항상 모든 조항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쳐들어오는 불가항력의 예외적 아름다움이 발생할 수 있잖은가. 사랑은 원칙을 배반하기도 한다. 그것이 사랑의 위험이자, 동시에 매력이다.
주정뱅이의 고백
사랑력을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워진다. 술주정만 주정이 아니다. 사랑주정 또한 주정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거나, 아직 좋아한다기보다 '좋아할 준비'만 되었어도 사람은 주정을 부린다.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말짱한 정신으로 이상한 문자 메시지를 쓰고, 알 수 없는 일기를 적고, 수수께끼 같은 포스팅을 한다. 술에 취하듯 사랑에 취한다 ㅡ 실제로 뇌과학적으로 유사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전의 어떤 연애도 사랑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그것들은 한갓 욕심이거나 집착이었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뭇 다른 생각이 든다. 관념으로서의 사랑은 완전하고 경건한 것이지만, 인간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인간들이 나누는 실행적 사랑은 때로는 조악하고, 때로는 너절하다. 하지만 그러한대로 그것 또한 사랑이 아닐까.
사랑은 너그러우므로 자신의 획일화된 모습만을 우리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지난 모든 연애도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일종의 사랑이었던 셈이다. '사랑주정'이라고 명명한 그것은, 타인에 대한 진솔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그런 관심이 피어나면 사람은 정말로 유치해진다. 하지만 내가 왜 유치한가를 헤아려 보면 그 배경에는 누군가를 아끼고, 애호하는 아이 같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거두기로 한다.
하지만 주정은 반드시 조절이 필요하다. 조절하지 못하면, 용기내어 타인의 문을 두드리고자 했던 기특한 마음이 무뢰無賴로 변질된다. 그것이 바로 사랑력의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한 이유다. 사랑에 취하는 것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사랑력이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사랑의 성숙, 거리를 허용하는 용기
우리는 흔히 사랑의 시작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사랑의 끝이나 사랑의 변화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마치 그것이 실패인 양, 부끄러운 일인 양. 하지만 관계가 변하는 것, 거리가 생기는 것, 심지어 끝나는 것조차 사랑의 한 과정이다.
누군가를 자주 떠올리는 것이 그리움이 아니라 관성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연락이 끊긴 지 며칠, 몇 주가 지나도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상대가 나와의 교감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차갑고 냉정한 결론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사랑력의 완성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편안해 하는 거리를 허용하는 것. 그 거리가 점점 멀어지더라도, 심지어 무한대가 되더라도, 그것조차 존중하는 것.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성숙이다. 김성민이 말했던 것처럼, 받은 사랑을 떠올리고 그것을 조용히 선물하는 것. 때로는 그 선물이 '놓아주기'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고아는 혼자 남겨진 글자다. 하지만 그 글자는 새로운 문단의 첫 문장이 된다. 김성민에게 사랑이 위로였듯, 나에게도 사랑은 위로다. 하지만 그 위로는 누군가를 붙잡는 데서 오지 않는다. 조용히 선물하는 데서 온다. 거리를 허용하는 데서 온다.
그러고 보면 이제 orphaned letter가 되어도 괜찮겠다. 다음 페이지의 첫 글자가 될 수 있다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을 배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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