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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골랐어야 했는데 / 마준석

여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다.

 

어느 날 랍비가 제자들에게 강연을 하던 도중 눈부신 빛과 함께 천사가 나타났다.

“너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지혜와 부 둘 중에 하나를 선사하겠노라.”

랍비는 망설임 없이 지혜를 골랐다.

천사는 다시 빛과 함께 사라졌고, 방금 일어난 일에 충격을 받은 회당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제자들은 랍비에게 몰려들었다.

“스승이시여, 지혜로운 말씀을 내려주소서!”

랍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부를 골랐어야 했는데..!”

 

평생 지혜를 추구하던 랍비는 자신이 소망하던 것을 전도된 방식으로 획득한다. 그는 정말로 지혜로워졌는데, 다만 진리가 돈에 비하면 별 볼일 없었다는 기구한 진실을 깨달을 만큼 지혜로워졌다. 그렇지만 이 농담이 하려는 말은, 그렇기에 지혜 따위는 허울에 불과하고 삶에 있어 가치 있는 것은 돈이라는 경박한 교훈이 아니다. 이 농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가 오직 잘못된 선택을 통해서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역설에 놓여 있다. 랍비가 선택의 순간에 처음부터 부를 골랐다고 상상해 보자. 천사가 사라지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후회와 절망뿐이다. 삶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던 그는 지혜에 당도할 그 마지막 목전에서, 순간의 나약함 때문에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그는 자신 앞에 쌓인 부를 슬프게 바라보면서 진정한 지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지 영원히 궁금해할 테다.

 

그러므로 진리는 오직 실패와 오류를 경유해서만 밝혀진다. 다시 말해 실패와 오류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회피해야 할 대립항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에 구성적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잘못된 선택이, 역설적이게도 올바른 선택을 위한 조건들을 정립하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올바른 것(예컨대 부)를 선택하는 것은, 그 올바름을 놓칠 가장 확실한 길에 불과하다. 진정한 올바름은 반복된 실패와 그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나타난다.

 

출처: Unsplash (Quilla)
출처: Unsplash (Quilla)

이것이 헤겔이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 혹은 ‘변증법’이라는 표어로 자신의 전체 철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예컨대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그 끔찍하게 난해한 책을 쓰지 않고서, 곧바로 그 전체 논변의 최종 진실인 ‘절대적인 앎’을 서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곧장 정답을 이야기한다는 손쉬운 해결책을 거부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순전한 의식 형태(‘감성적 확실성’)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이로써 끊임없이 “자신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을 상실”하는 고통스러운 “의심의 길, 또는 더 본래대로 말하자면 절망의 길”(「서론」)이 열린다. 헤겔을 읽는 이는 헤겔과 함께 온갖 오류로 점철된 600 페이지짜리 실패의 역사를 반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정신이 도야의 최종 진실인 ‘절대적인 앎’은 어떤 초시간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역사를 반성하는 사유 그 자체를 일컫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자신의 여정을 반성하는 시선 속에서야 비로소 소급적으로 밝혀진다.

 

『대논리학』에서의 범주들 간의 이행도 이러한 실패의 반복일 뿐이다. 『대논리학』 시작 지점에서 우리는 순수한 존재를 그 자체로 표상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하게 존재를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텅 빈 공허함만을 마주치고 결국 존재 범주는 무로 이행하고 만다. 우리가 순수한 존재를 사유하려 할 때 실상 우리는 순수한 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겔은 방대한 글과 강의록을 남겼지만, 나는 이 변증법적 실패에 대한 이론이 헤겔 철학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머지 다른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정말로.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이 지식을 생산하는 미시적인 작동 방식을 분석한다. 『감시와 처벌』은 애초에 윤리학적 기획이 아니기 때문에, 권력 구조를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뿐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푸코는 책의 마지막에서 신문 <라 팔랑주>에 실린 사소한 재판 하나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그 가능성을 타진한다. 재판은 방랑죄로 2년 형을 선고받은 13살의 떠돌이 소년 베아스에 대한 것이다.1)

 

재판장: 사람은 자기 집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베아스: 제가 집이 있겠습니까?

재판장: 피고는 언제까지나 떠돌이로 지낸다는 거군요.

베아스: 저는 일해서 먹고삽니다.

재판장: 피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베아스: 제 직업이라… 우선 적어도 36개는 됩니다. 게다가 어느 일정한 자리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급일을 시작한 지는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저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합니다. 예컨대 낮에는 모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무료 인쇄물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승합 마차가 도착하면 좇아가서 승객의 짐을 나르고, 거리에서 팔다리를 번갈아 짚어 가는 재주넘기를 하고, 밤에는 극장을 기웃거리고, 무대의 휘장을 열어주고, 극장의 외출권을 팔기도 합니다. 저는 무척 바쁜 사람입니다.

재판장: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는 것이 피고에게는 더 나을 텐데요.

베아스: 천만에요. 좋은 직장, 견습, 그런 것은 지겹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되어도 늘 불평거리가 많고 또 자유도 없지 않습니까?

재판장: 피고의 아버지는 피고를 야단치지 않습니까?

베아스: 아버지가 없습니다.

재판장: 그렇다면 피고의 어머니는?

베아스: 없습니다. 친척도 친구도 없습니다. 저는 남의 속박을 싫어하는 자유인입니다.

 

출처: Unsplash (abshky)
출처: Unsplash (abshky)

푸코는 분석한다. “한편에는 재판장에 의해 대표되는 ‘문명’, ‘살아있는 합법성, 법의 정신과 법률에 관한 교양’의 세력이 있다. 그것은 법전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규율인 강제력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 누구나 거처가 있어야 하고 소재가 정해져야 하며 강제적으로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한다. … [반면] 방랑생활은 질서에 어긋나고 사회를 혼란시킨다.” 다른 한편에는 방랑자가 있다. 그는 정해진 거처와 직업도 없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낙오자다. 그럼에도 이 낙오자는 사회 속에서 건실한 삶을 사는 것이 사실 노예 상태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자유가 “통상의 질서 속에서는 더 이상 향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자기변호는 그가 순전히 부랑자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와 법률의 테두리 바깥에서 오히려 법의 진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에 말이다. 우리가 삶에서 직접적으로 올바른 것을 선택하려는 이상, 우리는 권력의 문법에 사로잡혀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착실하고 성실한 사회의 일꾼으로 나고 자라 그렇게 죽을 것이다. 반면 법의 정신에 도달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주어진 규범을 준수하기를 실패할 때, 그리고 그 속에서 문명에 대한 저항과 진정한 자유의 얼굴을 읽어낼 때 이루어진다.

 

철학을 한다는 것, 예술을 한다는 것 혹은 더 넓게, 사유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회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낙오자가 된다는 것. 정말로 그렇다. 그렇게 나는 철학을 전공한다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인간의 힘으로 북한산보다 높은 거대한 마천루를 세우고, 로봇이 개를 산책시키며, AI가 정신 상담을 해주고 사주팔자도 봐주는 이 현대 사회에서, 평생을 바쳐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읽고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기이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실패의 자리를 기꺼이 떠맡는 동료 연구자들과 선생님들을 나는 좋아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를 구태여 함께 떠안는 나의 아내와 가족들을 사랑한다. 이것이 우리가 오류 속에서도 저마다의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1)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오생근 역, 2016, 440-444쪽.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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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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