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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LM의 지성사 지식 사전 / 노관범

노트북 LM이 정말 유용할까? 한번은 지성사 논문 50개를 소스에다 넣었다. 각 논문을 읽고 그 핵심적인 논점을 5개씩 제시하라고 시켰다. 첫 번째 논문은 F.L. Baumer의 <Intellectual History and Its Problems>(1949)였다. LM이 제시한 논점은 1)지성사의 정의와 대상, 2)시대정신의 규명, 3)지적 변화의 인과관계 탐구, 4)사상이 현실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 5)지성사의 유용성과 역사철학적 가치. 스무 해 전 지성사 강의안 만들면서 처음 읽은 논문인데 다시 보니 새로웠다.


이런 식으로 50개 논문을 마쳤고 모두 250개의 논점을 얻었다. 상당한 분량을 쉬지 않고 통독했는데 제법 재미있었다. 이번에는 LM에게 무슨 작업을 줄까? 지성사의 개념을 알고 싶었다. 소스에 들어간 각 논문에서 intellectual history에 관한 정의적인 진술이나 설명적인 진술을 추출하라고 시켰다. 다음으로 용어가 궁금했다. 다시 소스에 들어간 각 논문에서 지성사 연구와 관련된 주요 키워드를 추출하고 각 용례를 설명하라고 시켰다. 예를 들어 Baumer의 위 논문에 보이는 “climate of opinion” 같은 어구이다. 


LM이 제공한 결과물을 읽다가 즉석에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만약 지성사에 관한 100개 이상의 진술을 토대로 지성사 개념 사전을 만든다면? 만약 지성사 연구와 관련된 100개 이상의 키워드를 토대로 지성사 용어 사전을 만든다면? 다시 지성사 논저 사전에도 생각이 미쳤다. 이에 따라 소스 논문에서 주요 논저 100개(저술 50, 논문 50)를 추출하고 비평의 용례까지 모두 도출하라고 시켰다. 


이제 LM에게 지성사 사전 편찬의 임무를 하달했다. 이미 산출한 정보를 토대로 대주제, 소주제, 그리고 용례로 구성된 사전. 어떤 사전이 나올지 정말 기대된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LM은 순식간에 작업을 마쳤다. 먼저 개념 편은 5개 대주제와 16개 소주제로 구성되었다. 1)지성사의 본질과 학문적 정체성(①지성사, ②관념사, ③개념사, ④의미의 역사), 2)지성사의 연구 대상(⑤사상과 의식, ⑥텍스트와 담론, ⑦전제와 시대정신), 3)지성사의 방법론적 실천(⑧맥락과 상황, ⑨의도와 언어행위, ⑩정합성과 합리적 재구성, ⑪지식장과 관계망), 4)지성사의 학제적 위치(⑫학제성과 지적 공유지, ⑬사회문화사와의 교차, ⑭철학과 역사의 경계), 5)지성사의 가치와 목적(⑮자기 성찰과 해방적 가치, 사상적 사건과 논증의 탐구).

 

다음으로 용어 편과 논저 편도 후속했다. 양자는 대략 비슷한 범주를 보였는데 논저 편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1)고전적 지성사의 정립: 관념사, 신사학, 정신사, 2)케임브리지 학파와 맥락주의 혁명, 3)독일 개념사와 역사적 의미론, 4)언어론적 전회와 포스트구조주의의 도전, 5)지식장, 신문화사, 그리고 글로벌 지성사로의 확장. 이것들을 일단 지성사 지식 사전이라 명명했다. 개념 편, 용어 편, 논저 편으로 구성된 소박한 형태였다.


다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데 얼른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LM에게 무슨 작업을 하면 좋을지 물었다. LM은 방대한 소스를 바탕으로 사전이 훌륭하게 완성되었다고 기뻐하고 이 자료가 지성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논평했다. 그리고 이제 사전 형태의 정리 작업을 넘어 지성사의 실제적인 적용과 학문적 확장을 위한 심화 프로젝트를 구상할 때라고 충고했다. 


LM은 구체적으로 5가지 작업을 제안했다. 1)지성사 방법론 실전 매뉴얼, 2)지성사 학문 공동체와 네트워크 지도, 3)인접 학문과의 학제적 교류사, 4)지성사 핵심 쟁점별 가상 논쟁, 5)글로벌 지성사 연구 아젠다 기획. 위에서 만든 사전이 지성사의 기초 체력을 다져준다면 이 작업을 통해 지성사 또는 메타-지성사 작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좋다! 그럼 순서대로 기획1 <지성사 방법론 실전 매뉴얼>에 관한 지성사 사전부터 기획하라. LM은 6개 대주제, 51개 소주제, 그리고 각각의 개념과 적용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대주제1 「연구 설계 및 대상 설정」의 소주제는 ‘단위 관념’, ‘의견 풍토’, ‘사유 전제’, ‘연속 관념’, ‘반복 관념’, ‘지식장’, ‘공유지’, ‘현지 지식’ 등이다. 여기서 Lovejoy의 ‘단위 관념’(unit-idea)이란 복잡한 철학 체계나 사상을 분석 화학의 원소처럼 분해했을 때 나타나는,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관념인데, 이것의 실전 매뉴얼은 특정 사상가의 텍스트 전체를 다루기보다 특정 관념이 철학, 문학, 과학 등 여러 학문 경계를 넘나들며 어떻게 결합하고 변천하는지 추적하는 것이다. 


이어서 LM은 기획2 <지성사 학문 공동체와 네트워크 지도>라는 제목으로 6개 대주제, 52개 소주제, 그리고 각각의 개념과 용례를 제시했다. 여기서 대주제1 「지식장과 사회학적 분석 도구」의 소주제는 ‘지식장’, ‘문화 자본’, ‘아비투스’, ‘뻐꾸기 신세’, ‘역사과학의 여왕’, ‘공유지’, ‘문턱 효과’, ‘지식인’, ‘정통과 이단’, ‘지식사회학’ 등이다. 이 가운데 ‘뻐꾸기 신세’(cuckoos in the historical nest)란 L.Krieger가 사용한 지성사의 비유인데 역사학, 철학, 문학 등 다른 학과에 기생해야 하는 불안정한 학문적 처지를 가리킨다. ‘공유지’(commons)란 D.Hollinger가 사용한 지성사의 비유인데 특정 학문의 배타적인 사유지가 아니라 다양한 학문이 자유롭게 모여드는 열린 교류의 장이라는 뜻이다. 


다시 LM은 기획3 <지성사와 인접 학문의 학제적 교류사>라는 제목으로 6개 대주제, 56개 소주제, 그리고 각각의 개념과 용례를 제시했다. 대주제의 구성은 「철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언어학」, 그리고 「학문 융합」이다. 「철학」의 소주제 ‘절충주의’(eclecticism)는 과거의 다양한 교리에서 진리만을 차용해서 종합하려 했던 특정 철학 사조(대표 인물 V.Cousin)를 가리키는데 현대 지성사의 학문적 전사(前史)로 간주된다.(D.Kelley, 2001) 「학문 융합」의 소주제 ‘지적인 지진대’(Intellectual Seismic Zone)는 여러 분과 학문의 교차점으로서 지성사가 끊임없는 외부의 충격을 통해 학문적 생명력을 갱신해 왔음을 비유한다.(Grafton, 2006) 


LM이 득의의 자평을 내린 것은 기획4 <지성사 핵심 쟁점별 가상 논쟁>이다. 이것은 세션1 「연구의 대상은 무엇인가? 관념vs언어vs담론」, 세션2 「텍스트의 자율성인가, 저자의 의도인가?」, 세션3 「맥락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가?」, 세션4 「개념사와 정치언어사」, 세션5 「제도를 넘어 세계로」 등 5개 대주제에 전체 53개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소주제의 세부 내용은 생략한다.


이제 지성사 지식 사전 3편(개념, 용어, 논저)과 LM이 제안한 지성사 기획 5종(실전 매뉴얼, 네트워크 지도, 학제적 교류사, 가상 논쟁, 아젠다 기획)을 갖추었다. 향후 소스 확장을 통해 현재의 지식 수준을 어떻게 향상시키면 좋을까. LM은 몇 가지 방향을 대답했다. ①이론적 혁명. 정치언어사(영국), 개념사(독일), 담론 분석(프랑스)을 융합하는 이론적 지평의 추구.(E.Palti, 2014) ②사유의 자주성. 단순한 과거 맥락의 복원을 넘어 현행 제도의 대안을 찾아 과거의 지적인 자원을 발굴하는 Q.Skinner의 계보학적 전환.(M.Lane, 2012) ③사상의 사건성. 위대한 사상이란 주어진 맥락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맥락의 제약을 파열하고 부단히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능동적인 사건.(M.Jay, 2011) 위대한 사상이 보편적 진리와 영속적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은 굴과 진주(Oyster=역사, Pearl=사상)의 비유를 통해서도 일찍이 제기된 바 있다.(J.Diggins, 1984) 

본 칼럼을 읽고, 인포그래픽으로 변환. ChatGPT.
본 칼럼을 읽고, 인포그래픽으로 변환. ChatGPT.

이제 작별할 때가 되었다. 노트북 LM으로 만든 지성사 지식 사전, 흥미롭게 구경했다. 하지만 구경에서 시작해서 구경으로 마쳤다. 피상적인 관광이었다. ‘관광 지성사’(?) 학습이었다고 할까. 그래도 관광의 매력을 떨쳐내기 어려워 다시 구경을 떠나고 싶다. 이번에는 영문 소스 지성사 탐험 대신 한문 소스 지성사 탐험이다. 구경의 즐거움을 추억하며 노트북 LM의 유용한 제안을 미리 기대한다. 


노관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노관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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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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