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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한국학의 현재와 미래』-한국학을 자리매김하는 대화의 기술     

최종 수정일: 8월 8일

한국학의 현재와 미래󰡕, 요즘 출판계가 던지는 매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에 비하면, 감각적 자극에 중독된 나 같은 독자의 취향에 비하면, 좋게는 고전적이고, 나쁘게는 고루하게 들린다. K-문화의 파도에 올라탄 ‘한국학’의 때맞은 자화자찬도, ‘현재와 미래’가 던지는 성찰과 전망의 분위기도 얼핏 그려진다. 어디선가 문화철학도 귀동냥 좀 했다고 거들먹이는 습관이 몸에 밴 까닭이다. 하지만 막상 책장을 열면, 그것이 얼마나 서툰 각주였는지 당장 깨닫게 된다. 먼저는 인문학을 지탱하는 네 기둥(문학, 역사, 철학, 종교)의 화려한 건축가 대열에 한 번 놀라고, 그들이 실험하는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사유 공법에 또한 놀란다. 학문적 경계를 넘나드는 창발적 합작의 시도, 디지털 기술에 올라탄 혁신적인 학문 방법론, 절묘한 긴장과 균형 속에 펼쳐지는 역설적인 대화의 기술, 그 아래 씨름하는 각 분야의 다채로운 풍경들. 경계 없는 한국학은 그렇게 자기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학의 현재와 미래󰡕는 그 치열한 파노라마를 밀도 있게 그려낸 일종의 ‘한국학 최전선의 현장 보고서’라 해도 과찬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 실린 24편의 작품이 던지는 공통의 질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같음(동일성/보편성/교집합)’과 ‘다름(차이/특수성/차집합)’을 차별 없이 엮어낼 다양한 사유의 실험이 아닐까? 내재적 관점에 매몰된 자기도취나 외재적 관점에 종속된 노예근성을 넘어 ‘지금-여기’에서 안팎을 입체적으로 엮어낼 새로운 대화의 기술 말이다. 그저 한국 국적의 사람이 한국의 영토 안에서 한글을 도구로 지은 모든 산물이 ‘한국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물질적 토대 위에 정립된 한국적인 정신의 역동성일 테니 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간된 한병철의 철학이나 영어로 번역 출간된 한강의 소설은 한국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본토 유학자 중에는 저들의 학문 방법뿐 아니라 저들의 이념과 저들에 대한 동경까지 함께 들여와 이 땅에 이식하려는 사대주의자도, 그들의 경전과 원전을 금과옥조로 받들며 평생을 자구 해석(훈고학)과 역사 검증(고증학)에만 몰두하는 것을 ‘학문적 성실함’으로 포장하는 현실 도피자도 없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대화도 어울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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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한국과 중국의 신유학을 연구한 손영식은 「주인의 철학」에서 우리의 그러한 학문 풍토를 한국학의 “죽음(204)”으로 일갈한다. 다원적 평등에 이르지 못한 현실의 국제 관계는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고착되어 있으며, 거기서 노예의 유일한 생존법은 주인에 대한 자발적 복종뿐이라고 말이다. 노예는 자신의 생존권을 쥔 주인의 욕구와 향유를 위해 노동할 뿐이며, 그 이상은 ‘대역죄’다. 더욱이 군사와 시장의 패권이 삶의 모든 영역, 심지어 학문과 예술의 영역까지 장악한 현실은 더욱 참혹한 비극이다. 그는 그러한 획일적인 패권주의를 주인의 폭력성과 (특히) 노예의 비굴함이 뒤얽혀 빚은 합작품으로 본다. 철학은 자신의 자유를 노래하는 주인의 전유물이며, 따라서 고증학과 훈고학에 대한 예찬은 “노예의 이성(204)” 혹은 “지적인 노예 상태(211)”의 방증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노예근성에서 탈피하는 것이 한국학의 방아쇠라는 것이 그가 선언하는 “청산주의(205)”의 골격이다. 나아가 그는 보편적인 소통 가능성을 배려하지 않는 동양철학의 고립적이고 반-논리적인 문학주의도 비판한다. 동양철학이 구사하는 비유적이고 모순적인 문학적 사투리가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적 표준어로 번역되지 못하면, 그것은 자폐적인 고립주의나 망상적인 자화자찬에 그친다는 것이다. 이는 ‘같음’만을 추종하는 사대주의나 ‘다름’만을 고집하는 국수주의에는 한국학이 설 수 없다는 자성적인 고발이자 후학에게 던지는 도전의 메시지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이승종은 「철학적 대화에서 대화의 해석학으로」에서 그 두 양상을 ‘대화’의 부재나 소멸로 간주하고, 대화적 관계(이인칭)의 회복을 한국학의 고향으로 이해한다. “대화는 삼인칭과 일인칭에서 이인칭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창출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230).”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대화는 “시각의 다양성”과 “자기 사유의 점검”을 통해 “입체적인 사유”를 형성하는 통로가 된다(231). 차이를 외면하는 자폐적인 국수주의나 차이에 예속되는 노예적인 사대주의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다. 따라서 ‘대화’도 있을 수 없다. 국수주의에는 대화가 필요치 않고, 사대주의에는 대화가 가능치 않으니 말이다. 다름이 만나는 ‘관계’가 ‘나’와 ‘너’의 근원이며, 그것이 서로에게 ‘너(이인칭)’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의 지난한 학문적 궤적은 바로 그러한 대화의 향연이었다. 그는 시공간의 타자를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 현재화-현지화하는 실존적인 ‘자기화’ 과정을 한국학의 참 길로 본다. 차이에 대한 비판적 수용(232)과 우리의 응답(233), 과거와 현재의 연결 가능성 탐색(234), 한국이 당면한 문제들과의 결부(234), 어제-오늘-내일의 창의적 연결(235), 비판과 재비판을 이어가는 창발적 토론(236) 등의 치열한 시도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철학 방법을 보편적인 진리 인식을 위한 ‘철학적 대화’가 아니라 개별적인 의미 이해를 위한 ‘대화의 해석학’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한국학의 자리를 마련한다.


  마지막으로 김동규의 「철학에 비친 한국학」은 앞선 모든 논의를 포괄하듯 ‘한국학’이라는 ‘열린 개념’에 내재한 생성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탐색한다. 그는 이승종이 제안한 “외래문화의 한국적 변용(보편의 특수화)”이라는 길에 “한국적 고유성의 세계적 보편화(특수의 보편화)”라는 길을 더한다. 그러한 양방향의 대화야말로 폐쇄성(특수성)과 획일성(보편성)을 역설적으로 융합하는 “글로컬(Glocal) 문화의 이념(184)”이자 ‘한국학’의 진정한 자리라는 것이다. 그는 그 원리를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 빗대어 설명한다. 모든 문화는 공통 조상의 특수한 분화이며, 그것들의 만남이 예측 불가한 진화(생명)의 원천이다(197). 한 생명체의 분화된 다름이 ‘마디’라면, 그것을 잇는 것은 ‘관절’이다. 관절은 단절이자 연속이며(198), “고통과 자유가 회합하는 장소다(199)”다. 각 문화는 접변 속에서 굴절의 고통을 겪지만, 그것이야말로 자기 변용의 자유와 인류 문명의 진화를 위한 생명의 원리라는 것이다. 그는 타자와의 대화가 생성하는 그러한 “잉여의 자기”를 “타자적인(관계적인) 생”이라고 부른다(199). 이에 따르면, 문화 간의 만남은 ‘보편의 특수화’와 ‘특수의 보편화’를 넘어 ‘특수의 특수화’라는 셋째 길도 열어 세운다. 한국학은 그래서 ‘열린 개념’이다. 우발적인 만남과 목적 없는 대화 속에서 늘 새롭게 생성되고, 그래서 늘 새롭게 규정되는 ‘수행적 과정( Performative Process)’이라는 의미에서다.


  이상의 관점에 따르면, 지배적인 ‘같음’에 굴종하는 열등한 노예근성이나 자신만의 ‘다름’을 절대화하는 유아적인(solipsistic) 주인행세는 한국학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의 종말을 예기하는 ‘죽음’의 논리다.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도 대화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그러한 일방적인 지배와 예속의 관계는 자멸과 공멸을 자초하는 가장 저급한 단계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차이의 공간에서 빚어지는 상호 배움과 성숙을 거부하는 비굴한 생존이나 획일적 지배의 기술에 불과하다. 앞선 세 철학자는 그러한 비대칭적 위계 구조를 넘어서는(손영식) 상호주관적인 대화의 길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같음’을 ‘다름’의 방식으로 공유하는 길(보편→특수), ‘다름’을 ‘같음’의 방식으로 공유하는 길(특수→보편), 그리고 ‘다름’을 ‘다름’의 방식으로 전유하는 길(특수↔특수)이 그것이다(김동규).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사유 전체는 일종의 ‘문화 해석학’이다(이승종). 상호주관적인 대화 속에서 펼쳐지는 번역(타자화)과 변용(자기화)의 역동적인 교류가 한국학의 자리라는 것이 그들의 한 목소리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한국문화의 세계적인 지배력에 대한 현재의 과도한 도취나 열광도 그리 달가운 현상만은 아니다. 도리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턱대고 남발하는 ‘한류(韓流)’라는 말 속의 ‘한(韓)’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정체 물음일 것이다. ‘K-문화’는 과연 한국만의 ‘다름’과 세계적인 ‘같음’을 역설적으로 융합하고 있는가? 달리 말해 ‘K-문화’는 과연 한국만의 ‘다름’을 세계적인 ‘같음’으로 번역하거나 세계적인 ‘같음’을 한국만의 ‘다름’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아니면 보편적인 상업주의와 고삐 풀린 시장주의에 능숙하게 올라탔을 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여전히 서방세계가 규정한 글로벌 스탠더드에 굴종하거나 그들의 패권을 탈취하려는 인정투쟁 단계를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K-문화’는 과연 우리 안에서 생겨난 독자적인 개념인가? 아니면 서방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규정한 하사품인가? 또한 ‘K-문화’는 과연 인류 문명의 공진화를 위한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원탁회의, 즉 세계 문화와의 전방위적인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칭 ‘같음’의 논리라고 우겨대는 문화산업의 패권자와만 은밀하게 독대하고 있는가? … 이것이 󰡔한국학의 현재와 미래󰡕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정 진 우 (부산대 철학과 외래교수) philosjw@gmail.com
정 진 우 (부산대 철학과 외래교수) philosj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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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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