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한국학의 현재와 미래』-미래의 한국문학, 조금 더 담대하게 공부하는 길
- 한국연구원
-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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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2시간 전
한국문학 연구의 항로와 기록
20세기가 동틀 무렵 이 나라의 “담 크고 순정한 소년배”에게 바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바다의 유혹에 이끌려 담 크고 순정한 이는 조각배를 타고 가슴 벅찬 항해길에 나선다. “담이 큰지라 모험적이었고 순정한지라 무제한일 수밖에. 그 때문에 그들은 멀리 또 깊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너무 멀리 또 깊게 나아갔음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그 때문에 진흙탕에 발이 빠지기도 했고, 심연 앞에 매달리기도 했고, 귀신의 소리조차 들어야 했습니다.” (김윤식, 『내가 살아온 한국 현대문학사, 문학과지성사』, 2009, p. 94)
담트고 순정한 이들이 그려간 항해의 경로와 시행착오를 측량하고 헤아리는 사람도 등장하였다. 초기의 기록자 중 한 사람이 “무엇이 조선의 근대문학이냐 하면 물론 근대정신을 내용으로 하고 서구문학의 ‘장르’를 형식으로 한 조선문학이다.”라는 규정을 신중하게 제시한 것은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40년(임화,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p. 819). 20세기 초반에 근대적 학술로 성립한 한국문학 연구는 “일제강점기 뿐 아니라 해방 이후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 큰 줄기가 이어지고 있”다(p. 21, 이하 『한국학의 현재와 미래』(이영준·김동규·오영진 편, 민음사, 2025)의 페이지만 표기) 『한국학의 현재와 미래』의 제1부 「한국학 연구의 최전선」 , 「문학」에 실린 글 네 편은 한국문학 연구 100년을 돌아보면서, 과거를 새롭게 읽고 미래를 즐겁게 진단하도록 한다.

한국학의 시공간 규정을 넘어서
독립운동과 연구의 연결고리 찾기를 고민한 조윤제,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식민지 사관’의 극복을 사명으로 삼은 김윤식 등. 한국학의 첫 장면은 “저발전 혹은 미발전”(p. 71)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하지만, 100년의 시간과 함께 한국학의 위상 및 조건 역시 변모한다. “외국(어)에 대한 콤플렉스”(p. 17)를 받아안으며 “피동적 위치”(p. 80)에서 시작한 한국학은 이제 “한국문화의 독특한 전통”(p. 75)을 신중하게 긍정하는 한편 “우리가 세계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주체라는 관점”(p. 78)을 제안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이러한 변모는 한국학이 20세기 혹은 21세기 한국이라는 지식 생산의 시공간적 규정성을 넘어설 가능성과 연동하며, 한국학 연구를 위한 새로운 이념과 기율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조그만 발견이나 변화를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다. 한국문학 연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에 경험한 외적 환경의 변화가 너무 극심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외적인 여건의 변화가 우리의 삶을 조건 지은 경험이 강렬했기 때문에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미래의 한국문학 연구는 좀더 담대하게, 보편적인 관점에서 세계와 한국문학을 다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pp. 82-83)
이영준 선생님의 통찰에 힘입어 미래의 한국문학 연구의 이념 및 기율은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첫째, 20세기 한국(학)의 자기규정 및 소명이었던 후진성 인식 및 그 극복 시도의 역사화가 필요하다. 냉전 시기 한국학의 콤플렉스, 곧 “우리만 뒤처진 느낌”(p. 82)을 낳았던 인식의 구조를 안팎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문학만의 특이한 측면”(p. 71)에 대한 보편적 관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 접근은 “자세히 검토된 바가 없다면 다시 검토하면” 되리라는 여유를 가진 것인 동시에 “어쩌면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연구가 지속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p. 82)라는 반증가능성 역시 넉넉히 품는다. 셋째, 지금까지 연구의 시각으로 포착하지 못했던 “한국문학의 어떤 것”을 새로이 발견해야 한다. 이 발견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아예 누락되고 무시당한 무엇인가가 저기, 한국문학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p. 71)라는 설레는 질문와 함께 온다. 이 질문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한국학의 시공간 규정을 한정할 필요가 없다. “동아시아 문학 전통”(p. 74)을 경유하여 새로운 시공간으로 개방될 한국학을 기대한다.
텍스트 읽기의 방법
20세기의 짧지 않는 시간 동안 한국문학 연구에서 “현실비판”은 중요한 기율이었으며, 21세기 이후 문화론적 연구라는 새로운 시각의 제안과 함께 한국문학 연구는 “물적 토대와 그 사상적·문화적 대응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왔다.”(p. 85) 한국문학 연구는 작품, 작가, 주제에 관한 논의를 넘어서 “독자”, “매체”, “글쓰기 관습”(p. 27), “정동적 반응”(p. 90)에 대한 관심으로 탈중심화된다. 확장되었던 시각은 이제 텍스트 읽기의 새로운 방법을 요청한다.
나의 연구는 문헌의 내용과 문자, 그리고 재료에 이르기까지 그 안과 밖의 모든 요소에 주목하여 텍스트의 이해를 넘어 문헌을 탄생시킨 당시 사회를 발견하고 복원하는 작업이다. (p. 32)
손에 닿는 실제적 증거가 되기 이전의 고유한 실재로서의 텍스트의 특수성과 그것이 품은 함의를 다채롭게 조망하는 경로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우선은 구심적으로, 다음은 원심적으로, 나아가 종합적으로 텍스트를 펼쳐 놓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은 굳이 문학을 전공한 이로서는 제법 시급한 일이었다. (p. 86)
노경희 선생님의 제안과 조강석 선생님의 제안은 “종합적으로, 그러나 차이를 세세히 고려하며 비정합적으로 참조”(p. 88)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고민할 것은 텍스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텍스트를 사상의 “알리바이” 혹은 현실의 “단순 표상이나 ‘목격원리(eyewitness)’의 증좌”로 한정하는 것에 거리를 두면서, 체계와 질서를 갖추었으면서도 특정 방향의 “진술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p. 86) 문화적 구성물로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 내부의 이질적인 요소와 다방향의 벡터에 대한 섬세한 판별 역시 필요하다. 텍스트의 “물질성”(p. 30)에 대한 관심과 “내적 실재”(p. 88)로서 텍스트에 대한 관심. 손의 촉감을 신뢰한 직접적인 접근과 디지털 이미지 및 데이터를 활용한 간접적인 텍스트 접근. “연구자의 오랜 훈련과 경험으로 습득된 직관과 감각”(p. 37)과 텍스트 안팎의 “연락과 교통”p. (87)을 위한 이론과 사유. 텍스트의 복합성을 “유심히 살피는” 경청(傾聽)을 통해 연구자는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던 많은 정보가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는”(p. 44) 경험에 도달한다. 텍스트의 “자기 전개”(p. 93) 역시 그때 포착 가능할 것이다.
빛나는 우연을 위한 지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성실히 한국문학 연구의 길을 걸어가신 연구자의 “난관과 노고”(p. 29), 그리고 보람과 지혜를 만난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지만 그렇게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문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질문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내 나름의 연구의 길을 가면서 얻은 작은 깨달음 가운데 하나인데, 이 경우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p. 25)
질문을 멈추지 않으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연구의 황금률 앞에 고개를 숙인다. 답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p. 29) 혹은 “우연히”(p. 25) 주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 또한 마음에 새긴다. 다만, 우연을 구성하기 위한 다양한 조건은 갈무리해야할 터. 김영민 선생님은 두 가지 만남의 경험을 공유해주신다. 첫째 만남은 미국에서 일본인 연구자와의 만남. 이 만남은 곤란함을 경유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신소설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당혹스러운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작은 깨달음”은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계기”(p. 19)가 된다. 둘째 만남은 한국 대학에서 일본인 연구자 사에구사 도시카쓰(三枝壽勝) 선생님과의 만남. 사에구사 선생님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혈의 누」의 문장이 일본식 표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단정하지만, 일본인인 자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p. 25) 김영민 선생님은 두 번째 만남을 토대로 “한국의 근대 초기 문체의 전반적 특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p. 26).
연구의 맥락, 언어, 장소가 다른 두 국적의 연구자가 만나는 과정에서 빛나는 우연이 생겨난다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터. 시차(視差/時差)의 어긋남과 시행착오가 만들어낸 우연. 한국인, 한국어, 한국어에 기반한 한국학과 한국인, 한국어, 한국어 이외의 조건에 기반한 한국학 사이의 마주침. 마찬가지로, 대학에 기반하여 수행하는 한국학과 “재단”(p. 38), “도서관, 박물관, 사찰”(p. 41) 등 “다양한 기관”(p. 38)에 기반하여 수행하는 한국학의 마주침.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잠심(潛心)하면서도, 다양한 주체, 언어, 매체, 시간, 장소와의 우연한 마주침에 즐겁게 열려 있는 한국학. 우연한 마주침에 열려서 “작은 깨달음”(p. 19)을 얻는 것. 그 작은 깨달음으로부터 한국학의 미래 또한 “신기할 정도로 뚜렷이”(p. 45) 열리기를 기대한다.

한국학의 자유
김윤식이 한국문학 연구에 뜻을 두었던 시기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그가 처음에 힘썼던 것은 자료 수집. 그는 국공립도서관과 소장가의 서재로 동분서주하며 자료를 검토하였다. 한국연구원이 설립된 것 역시 그즈음이다. 반 백년의 시간동안 한국 안팎의 연구자들은 “국내외의 각종 기관에 소장된”(p. 49) 한국학 자료를 섭렵하면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언제든 보고 싶은 자료를 쉽게 열람”(p. 48)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조금더 절차 및 규칙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디지털 자료는 예기치 못한 연결을 가능하도록 한다. 한국학의 축적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 옆에 한국학 아카이브는 가능할 것인가 라는 질문도 적어둔다. “고서와 현대의 연구서를 한 자리에 진열한”(p. 49) 한국학 아카이브.
한국학 아카이브에서 문헌을 읽는 한국학 연구자의 형상 또한 “‘신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성지 탈환을 목표로 일직선으로 말을 달리는 십자군 기사가 아니라, 성지(Saint Terre)로 향한다고 말하면서도 이곳저곳 머뭇거리고 빈둥거리리는 순례자(Saunterer)가 발에 차이는 길가의 돌을 문든 주워들고서 돌에서 표정을 읽어내려고 하는(어쩌면 신이 그에게 윙크를 전해줄지도 모른다) 모습”으로 다시 떠올려 볼 수 있다(미하라 요시아키, 「읽다」, 『문학 ‘읽기’의 방법들 – 문학이론 도구상자』, 이음, 2024, p. 89). 그렇다면, “자신이 완성한 하나의 작품으로 인해 세계가 조금, 그것이 아주 조금일지라도 움직인 것을 보”(p. 81)았던 김수영의 자유는 한국학 연구의 빛나는 보석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겠다. 학문과 자유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생각.
아가야, 담 크고 순정(純情)한 소년아, 바다로 나가라. 거기 크고 빛나는 보석, 여의주가 있단다.
(김윤식, 「문학평론가 3인 탄생 백 주년의 의의 - 김기림, 임화, 최재서」, 『엉거주춤한 문학의 표정』, 솔, 2010, p. 161)
※ 학술적 여정과 그 지혜를 후학에게 나누어준 김영민 선생님, 노경희 선생님, 이영준 선생님, 조강석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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