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화된 삶 속에서: 장강명,『먼저 온 미래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동아시아, 2025 리뷰 / 김민수
- 한국연구원

- 5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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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당신 앞에 네모난 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당연히 정말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서평이라는 장르가 나날이 무용해져만 가는 시대에 부러 시간을 낸 독자이니만큼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는 제안을 너그러이 받아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을 따름이다.
자,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상자 속에 동물이 한 마리 들어가 있다. 과연 어떤 녀석일까? 『어린 왕자』의 감수성을 잊지 않은 사람이라면 양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아니야, 상자에는 역시 고양이지. 누군가는 슈뢰딩거의 사고실험 속 고양이가 떠올랐을지도. 이 녀석들은 어쩐지 상자와 퍽 잘 어울린다.

오늘은 비록 양과 고양이만큼 인지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상자와 뗄 수 없는 동물을 한 마리 소개하고자 한다. 스키너라는 사람이 자신의 실험용 상자 속에 집어넣은 쥐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스키너가 세팅한 상자 속에는 막대로 된 장치가 하나 설치되어 있는데, 막대를 누르면 쥐를 위한 먹이가 제공된다. 당신은 바깥에서 상자 속을 관찰하고 있다. 처음 내던져진 환경에 어리둥절 방황하던 쥐가 어쩌다 막대를 누르게 되고, 뜻밖에 주어진 먹이를 앞에 두고선 기뻐하고 있다. 아마도 쥐의 뇌 속에서는 도파민이 분출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쥐가 먹이를 얻기 위하여 막대를 냅다 눌러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이 당장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막대를 누르면, 먹이가 제공된다’라는 인과관계를 쥐는 아직 인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누적과 더불어 긍정적인 피드백이 반복됨으로써 쥐는 점차 스키너가 설계한 정답을 스스로 학습하기 시작하고, 막대 장치에 숨어있던 진의를 깨닫기에 이른다. 그때부터 쥐는 먹이를 얻기 위하여 막대를 누르기 시작한다. 즉, 피드백이 행동을 강화한 것이다. 바깥에서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참으로 만족스럽다. 기특한 녀석.
그런데 뚱딴지처럼 왜 상자 속 쥐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느냐고? 현행 인공지능 개발의 중대한 원리 중 하나인 ‘강화학습’이라는 개념이 바로 이 실험에 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기억하고 있을 법한 사건을 하나 소환해야 하겠다. 2016년 3월, 서울 소공동에서 세계를 경악시킨 이벤트가 벌어진 바 있다. 구글에서 개발한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속칭 ‘알파고 리’)가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을 꺾은 것이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결과는 알파고의 4승 1패로 끝났다. 연이어 2017년에는 당대 최강의 기사로 알려진 중국의 커제가 ‘알파고 마스터’에게 무릎을 꿇었다. 더 나아가 같은 해 10월, 구글에서 개발한 알파고 최종 버전이 『네이처』를 통하여 발표된다. 알파고 마스터와 100판을 겨뤄 89승의 결과를 거뒀다고 전해지는 끝판왕 ‘알파고 제로’가 바로 강화학습으로 만들어진 AI였다.
알파고 제로는 기존에 존재했던 바둑의 기보를 단 하나도 학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바둑 규칙을 따라 ‘이겨라’라는 피드백을 거의 무한정 수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 ‘전인미답’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알파고 제로는 72시간 동안 스스로 490만 판을 둔 뒤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알파고 리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수준이 되었으며, 40여 일 동안 2,900만 판을 두고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알파고 마스터를 압도적인 수준으로 이기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개개인의 인간은 2,900만 판을 두기는커녕, 평생 490만 판의 기보를 검토하는 일마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처지에서는 이세돌이라는 천재가 ‘신의 한 수’를 두어야 겨우 1판 이길 수 있던 ‘알파고 리’조차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여겨졌다. 말하자면 알파고 제로가 도달한 수싸움의 세계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영역에 도달해 있다. 즉, AI는 일종의 블랙박스와도 같다.
이제 상상을 넘어 비약을 허락하여 주길 희망한다. 당신 앞에 놓인 상자는 이제 ‘바둑판’이 된다. 여기서 바둑판이란 물질적인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는 네모난 바둑판일 수도 있고, 사회적 관례와 언어적 유희를 허용한다면 ‘바둑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판. 생각해보면 인간은 다분히 격자화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2014년에 방영된 TV 드라마 <미생>을 즐겁게 감상한 사람이 여전히 사멸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프로기사로서 바둑판에 안착하지 못한 장그래가 사회로 뛰어들어 처음으로 취직한 기업 ‘원 인터내셔널’의 건물이 흐릿하게나마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기억이 희미하거나, 드라마 <미생>을 감상한 적이 없는 독자는 ‘서울스퀘어’를 검색하길 권한다).
마치 바둑판을 통째로 옆으로 세워놓은 것만 같은 건물 속에서 장그래의 사회생활은 매 순간 바둑판 위 수싸움으로 비유되고 있다. 비록 ‘완생’은 아니라 할지라도, 살아남기 위한 전투는 한수 한수가 곧 삶의 비유이자 에피소드로 남는다. 지금 돌이켜보면 AI가 바둑판을 통째로 뒤흔들기 이전이기에 가능했던, 낭만 넘치는 드라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쾌한 비약은 이제부터다. AI 이후의 인간을 스키너 상자 속 쥐에 비유한다면, 이는 지나친 일일까. 스키너가 상자 속에 집어넣은 쥐와 인간이 다른 점이 있다면, 쥐와 달리 인간은 격자화된 삶의 양태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속으로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종류의 동물이라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 장그래나 오 차장과 같이 우리네 삶이 ‘미생’이라는 사실을 애써 다독일 수 있는 것은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라는 언명 덕분이다. ‘완생’은 없으니, 미생이면 어떠냐는 도닥임.
하지만 격자화된 인간의 삶에, 우리가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정답지가 주어져 버린다면. 말하자면, 오 차장이 장그래에게 외쳤듯이 판을 흔들라는 말이 더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하여 부러 인간이 그것을 수행해야 할 근거율 자체가 본원적인 수준에서부터 재구축된다면. 혹은 내가 머무는 판 자체가 깨져버린다면.
이것이 장강명 작가가 우려를 꾹꾹 눌러 담아 작성한 신작 『먼저 온 미래』(부제는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가 전하는 메시지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책 표지에서부터 이와 같은 신호를 강렬하게 내비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지나친 비약일까?
소설가 장강명으로 하여 AI를 주제로 한 르포르타주를 작성할 수밖에 없도록 이끈 첫 번째 충격이 과연 무엇이었나 곱씹을 필요가 있겠다. 책에서도 소개가 되어 있다시피 때는 2016년 3월 10일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첫 대국에서 불계패한 다음 날이었다. 신문기자로부터 칼럼을 써달라는 청탁 전화를 받게 된 그는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노라 토로하고 있다. 금방 벌어진 사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세돌이 처음으로 패배한 날이 이 책의 출발점이 아닌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인간이 AI에게 패배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의미 자체를 가늠할 수 없다는 막막함이 한 명의 작가로서 더욱 큰 공허로 다가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강명은 조지 오웰을 따라 ‘테크노 낙관주의’에 저항하고자 전업의 직능을 되살리기로 마음을 먹은 듯하다. 『먼저 온 미래』는 기술문명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암면을 파헤치기 위하여 다시금 한 명의 기자가 된 심정으로, 전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기록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즉, 이 책은 AI가 도입된 이후 바둑판이 어떠한 방식의 변질을 통과해야만 했는가, 집요하게 대화한 결과물이다.
그의 책을 펼쳐 들고 읽고 있노라면, 알파고 출현 이후 바둑판이 말 그대로 본질적인 부분에서부터 총체적인 수준의 변화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착실하게 ‘정석’을 누적해온 인간의 바둑은 오답이 되었고, 대신 그 묘리를 가늠키 어려운 AI의 바둑이 정답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다름 아니라, AI가 강제한 것이다. 작가의 말을 한 대목 인용해보자.
어떤 기술은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기술은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과 다른 사람의 성취를 평가하는 기준을 바꾸고, 공동체에 새로운 금기와 규칙을 만든다. 그 규칙들은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되고, 그 질서에 따라 새로운 계급과 문화를 지닌 새로운 사회구조가 탄생한다.
(『먼저 온 미래』, 188쪽).
AI라는 신기술은 분명 우리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새로운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인지 그 누구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마치 AI가 두는 바둑의 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정답지로 삼아 바둑을 두고, 연구하고, 교육하고, 해설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인간은 아직 우리 앞에 놓인 상자(바둑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존재는 된다. 장강명이 시도한 바와 같이 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바둑판의 이야기를 바둑판 바깥의 사람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모리스 블랑쇼의 말을 빌리자면, “밤에는 언제나 짐승이 다른 짐승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문학의 공간』, 2010, 245쪽).
더 나아가 장강명은 바둑판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헤침과 동시에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다음과 같이 되묻기를 잊지 않는다. 소설은? 문학은? 예술은? 격자화된 인간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네모난 책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바둑판이 변질된 것처럼 시도, 소설도, 책도, 예술도 더는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될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둑계의 내밀한 이야기들은 곧 바둑판 너머 인간의 문화 지형에 관한 질문들과 겹쳐진다.
과장이 섞였다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오픈 AI의 CEO 샘 올트만은 범용적인 수준에서 인간 사회에 적용될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가 불과 5년 안에 가능할 것이라 호언하고 있다. 고인류가 사용하던 올도완 석기는 80만 년 동안 그 문화가 이어졌고, 아슐리안 석기가 무스테리안 석기를 기다리기까지 150만 년이 걸렸다고 한다. 현생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시기를 대략 6,000년 전으로 잡고 있으며, 바둑의 역사를 길게는 5,000년 정도로 보고 있다. 2016년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는 제로 버전과 함께 은퇴했고, 2022년 11월 거대언어모델을 학습한 챗GPT의 등장 이후 사회는 새로운 격변 속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한때 인간의 것이었던 상징체계는 더는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될 수 있다.
장강명 작가가 외치는 소리는 다음과 같다. 바둑판을 보라. 그들은 ‘먼저 온 미래’를 통과했다. 이제 비단 바둑판뿐만 아니라, AI는 인간 사회 모든 영역에 발을 뻗칠 것이다. 격자화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그 너머를 상상해야 한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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