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알렙’: 무한히 쪼개지는 이야기와 즐거운 미로들 / 오영진
- 한국연구원
- 9월 12일
- 4분 분량
이지윤의 작품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순간은 단순한 피로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문턱과도 같다. 그녀의 서사 속에서 잠과 꿈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장소다. 특히 악몽 같은 터널 속에서 아이가 기어다니는 장면은 불안과 무의식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중요한 모티프다. 이 장면은 단순한 공포의 연출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분화되는 수많은 가능성과 억눌린 기억들이 기어 나오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무의식을 다룬 작품들이 흔히 그렇듯, 억압된 것의 귀환이 만들어내는 '낯익은 낯설음(Unheimlich)'의 기이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익숙한 일상이 무한히 분화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바뀌어 설레어 기다리는 감정으로 발전한다. 마치 프랙털 구조처럼, 하나의 순간이 끝없이 쪼개지며 각각의 파편이 독자적인 이야기로 확장된다. 하루를 마감하며 잠이 들었을 때, 불현듯 그 날 하루의 기억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들이 새로운 모험의 무대가 되는 일은 이지윤 작가가 보여주는 특이한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지윤의 작품은 일상의 단면을 미분하듯 세밀하게 쪼개어 무한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관객들은 작품 속에서 순간순간이 끝없이 분화되며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동시에, 다시 전체적인 서사와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상력을 우리는 보르헤스의 소설 <알렙(ALEPH)>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알렙은 부엌 지하실 계단 밑에 있는 신비한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단 하나의 점이자 무지갯빛의 구체다. 연인 베아뜨리스를 잃고도 13년째 잊지 못해 기일에도 무덤을 찾는 화자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점이 존재하는 알렙은 잃어버린 연인을 재회할 수 있는 장소다. 이처럼 ‘알렙’은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점’과 연결되며, 무의식 속에서 끝없이 생성되는 이야기의 조각들이 무한히 분화되는 확장되는 구조체다. 말하자면 찢기면서 계속 결합한다.
보르헤스의 『알렙』에서 주인공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점을 부엌 지하실에서 발견하듯, 이지윤의 작품에서도 사소한 순간이야말로 중요하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길 한가운데 떨어진 작은 종잇조각이나 택시 안에서 보는 도시의 풍경, 길거리에서 스쳐 가는 타인들의 대화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고, 다시 그 안에서 더 작은 이야기들로 나뉘어간다. 이는 알렙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겨우 하나의 점이라는 특징과 맞닿아 있다.

작품은 시간의 찢김 뿐 아니라 공간의 찢김으로도 확장한다. 이지윤의 개인전 <Room for Escape>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수많은 스크린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조각들을 보여주며, 이 영상들은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한다. 각각의 스크린은 독립된 서사를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스크린들과 시각적, 청각적으로 소통하며 하나의 거대한 파편화된 서사를 구축한다. 관람객들은 이 복잡하게 얽힌 스크린들 사이를 걸으며, 무한한 점들 사이를 유영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작은 전시장 내부에서는 어떤 시점에 어떤 각도로 촬영해도 이미지의 반복은 없다.
전시 제목 <Room for Escape>는 역설적인 의미를 갖는다. 방안의 미로화와 그 안에서 무한성을 추구하면서도 어디론가 탈출을 꾀하기 때문이다. 폐쇄된 공간이기에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는 역설, 즉 제한된 공간이 역설적으로 무한한 상상력과 이야기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알렙적 특성을 전시공간이 보여준다. 돌아오지만 반복은 없다.
전시 <Room for Escape>는 로그라이크(Roguelike) 게임처럼 매 순간 새롭게 구성되는 공간을 선보인다. 마치 던전 크롤러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매번 다른 구조의 미로를 마주하듯, 전시장 안에서 작품은 끝없이 반복되지만 작가가 설계한 코드 안에서 랜덤하게 결합하기에 결코 같은 형태를 띠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닌 알고리즘에 의한 변주로, 현대 디지털 시대의 무한한 가능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공간적으로 구현한다. 관객들은 마치 절차적 생성(Procedural Generation)으로 만들어진 가상 세계를 탐험하듯, 매 순간 새로운 경험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전시장 안에 배치된 영상 이미지의 내용만큼이나 그것들의 절합(**節合)**이 중요한 메시지인 것이다. 일상 속에서 얻은 짧은 푸티지(footage)는 내러티브(narrative) 밖에서는 별 의미를 얻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이지윤은 이를 하나의 서사 안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한 사건은 반복적으로 변주되며, 마치 하나의 기억이 끝없이 다른 각도에서 재해석되는 것처럼 서사가 전개된다. 죽음과 재생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실험하는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순간이든 끝이 아니며, 언제든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게임의 세이브 포인트처럼, 각각의 순간이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점이 된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렙이 창조의 근원과 맞닿아 있듯이, 이지윤의 작품도 매 순간 생성된다. 이 점에서 작가는 무엇을 생성하는가가 아니라 왜 생성하는가를 질문할 필요를 느낀다.
이 무한한 변주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존재가 있다. 주변의 사물이 변형되고, 인물들이 그 변화에 영향을 받으며 이야기 속 존재론적 법칙이 달라질 때에도, 오로지 관찰자의 그림자만은 온전히 파편들의 퍼즐 속에서 굳건히 존재한다. 이는 마치 무한한 미로를 탐험하는 여행자의 정체성을 보장하는 닻과도 같다. 유한한 방 안에서 펼쳐지는 무한의 모험이 불안함 없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불변하는 그림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전시된 전시장은 어느 각도에서도 관람객의 그림자가 스크린에 포함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동굴의 구조는 단순한 어둠의 투영이 아닌, 오히려 진리를 향한 지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처럼, 이 그림자는 역설적으로 빛의 존재를 암시하며, <Room for Escape>라는 전시에서 무한히 변주되는 공간과 이미지들 속에서도 본질적 실재를 가리키는 지침이 된다. 관객들은 작지만 무한한 미로 속에서 결국 나 자신의 그림자를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관객의 모습을 풍자하듯 전시장 곳곳에는 그림자의 형태가 검은 페브릭 형태로 구현되어 모서리와 틈 곳곳에 붙어있다.
이지윤의 작품에 나타나는 불변하는 그림자는 끊임없이 변주되는 디지털 알고리즘의 공간과, 무한히 분화되는 이미지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론적 닻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르헤스의 알렙적 상상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포스트모던한 세계 인식 속에서 상실된 진리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현대성의 한가운데서, 이 불변의 그림자는 완전한 해체를 거부하는 정체성-인간의 마지막 보루이자, 진리를 향한 끝없는 탐구의 증거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그림자’를 작가 이지윤의 ‘그늘’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좋겠다. 우울과 결핍을 담은 그림자만이 아닌 결핍이면서도 창조의 근원이 된다는 늬앙스를 더 담기 위해서다. 그늘이 없는 자는 맑고 쨍쨍한 세계 속에서 명랑하게 말라가지만 그늘이 있는 자는 그늘로 숨어들어가 모험의 시간을 기다린다.
이 답사에는 많은 목적이 있겠지만 어차피 돌아올 거라는 걸 빼곤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없다.
이지윤의 작품은 단순한 서사를 벗어나, 세계를 언어와 이야기로서 끝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을 지속한다. 그녀는 알렙의 무한성과 반복성을 일상의 미세한 틈 속에서 구현하며, 초월적인 시선과 내재적인 순간을 연결하는 독창적인 예술적 방식을 구사한다. 그녀의 서사는 독자에게 하나의 사건이 무한한 이야기를 품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다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이지윤은 단순히 알렙 세계관을 반영하는 작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작가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설 <알렙>의 한 구절을 되뇌여본다.
“우리의 정신에는 망각으로 뚫려있는 수많은 구멍이 있다”
<Room for Escape>는 이 구멍들로 만든 창의적인 미로다. 작지만 무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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