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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건너온 것일까? / 김동규

한강 작가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지금도 이따금씩 시를 쓴다고 한다. 등단 1년 전인 1992년 연세대 학보사인 연세춘추가 주최하는 연세문화상에서 한강은 ‘윤동주 문학상’을 받았다. 당선작의 제목은 「편지」이다. 심사위원은 정현종, 김사인 시인이었으며,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라며 심사 소감을 밝혔다.1) 그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이 문장이다.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단어는 ‘사랑’이다. 나는 한강 작품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핵심어가 사랑이라 생각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에는 8세 때 썼다는 글이 이렇게 소개된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한강, 『빛과 실』, 에크리, 2025. 10쪽. 원문 이탤릭.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의 뒷부분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서 한강은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2)라고 말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평생 존재라는 별을 보며 철학의 길을 헤쳐 왔다고 술회한 적이 있는데, 한강은 사랑이라는 별을 바라보며 창작활동을 해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린 한강은 사랑이 가슴 속에, 그리고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가느다란 실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금실이 끊기자마자 내 가슴 속의 사랑도 한순간 사라진다. 전력이 끊어져 순식간에 불이 꺼진 것처럼 어두워진다.

앞선 「편지」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시어는 ‘지나’이다. ‘특정 시간과 공간을 지나왔다’라는 동사다. 여기에서 지나온 곳은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이다. 그것은 사랑의 금실이 끊긴 공백의 기간이자 블랙아웃(Blackout)된 세계이다. 피할 겨를조차 없이 그 시공간을 그저 온몸으로 지나온 것이다. ‘배로 바닥을 밀며’ 간신히 지나왔다.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중략)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이것은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담긴 글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시일까? 이것은 시집 내 본문에 있는 시가 아니고, 시집 뒷 표지에 적힌 글이다. 보통 이곳에는 평론가들의 작품 소개 글, 아니면 시집의 성격을 알려주는 작가의 짧은 산문이 실린다. 이 글은 작품 제목도 없고, 행갈이만 했을 뿐 사건 기술(記述)이 태반인 산문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마지막 문구, “무엇을/나는 건너온 것일까?” 때문에 이 글이 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이 없었다면 시라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시란 생기 없던 것을 있게 만들어 주는(poiesis) 영혼(psyche)의 떨림(vibration)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나는 건너온 것일까?”라는 문구가 왜 떨림을 자아낼까? 아마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 끊어진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통상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실낱같은 길을 끊어내는 장소로서 산, 바다, 강 등의 이미지가 소환된다. 그런 곳에서 길이 막히고 끊어진다. 사랑의 가시밭길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우리는 온갖 고통과 치욕을 당한다. 하지만 에둘러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속절없이 이 고통의 장소를 지나야 하고 건너가야만 한다. 이것이 삶의 현실이자 진실이다. 아무리 허구를 짓는 작가라 하더라도 이 진리의 종을 울리지 못한다면, 결코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떨림을 기대할 수는 없다.

험준한 산을 넘어가려면 깔딱대며 고개(嶺)를 지나와야만 한다. 한강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미시령에서 일어났던 세 사건이 줄거리의 뼈대를 이룬다. 시간의 순서대로 사건을 재배열하면, 먼저 어린 이동선이 겪었던 사건이다. 그녀가 어렸을 적 미시령에서 버스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일이 있었다.

     

미시령을 넘은 버스가 교각을 받으며 벼랑에 반쯤 걸쳐졌던 것…난 고작 아홉 살 난 아이여서, 내 몸무게만으로 다시 버스가 기울어질 리 없었어. 뒷문 옆에 세워진 봉을 붙잡고 반쯤 몸을 일으켰어. 천천히 버스가 회전하며 절벽 쪽으로 좀더 기울었지. 방금 차에서 내린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어. 동생을 안은 엄마가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 하지만 누구도 다시 버스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어.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문학과지성사, 2010. 292-93쪽.

     

동선은 남동생만 버스에서 데리고 나온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버스에 탄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려졌다는 유기(遺棄) 공포를 트라우마로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그녀는 조실부모(早失父母)한 소녀 가장으로서 지병을 가진 동생을 돌보며 굳세게 살아간다. 학비가 싼 국립 대학교를 다니고 과외 교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러다가 또 다른 과외 교사 그리고 학생과 함께 눈 내리는 미시령에 가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눈에 갇힌 차 안에서 두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될 남자에게 들렀다가 질투에 눈 먼 학생이 그 남자를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임신 중이었던 동선은 딸 서인주를 낳지만, 알코올에 의존하며 폐인 생활을 하다 자살한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인주는 육상 선수를 꿈꾸며 씩씩하게 자란다. 하지만 다리를 다쳐 운동을 그만두게 되고, 자신을 돌봐주던 화가였던 삼촌이 죽자 3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다가 화가가 될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화가와 미술학원 선생을 병행하며 억척같이 살며 결혼하고 아이를 갖게 되지만, 이혼하고 양육권 다툼이 생기면서 다시 삶이 고통스러워진다. 그 즈음 폭설이 예고된 미시령에 가서 서인주도 죽는다. 이것이 세 번째 미시령 사건이다. 인주 죽음의 진실(자살이냐 아니냐)을 두고서 인주의 친구인 이정희와 미술 평론가 강석원이 대립하는 이야기가 이 소설 서사의 기본 뼈대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고통스러운 생을 건너가는(살아내는) 인간 실존의 군상을 그린 소설이다.  

     

12.3 불법 계엄령 소동이 일어난 지 거의 1년이 지났다. 국가 전체가 블랙아웃의 시간을 지나온 셈이다. 그 사이 과연 내란이 종식되고 다시 불이 환히 켜졌을까? 국가적 정전 사태가 종식된 것은 두 가지 지표로 확인될 수 있겠다. 첫째, 내란 가담자들 모두 정의의 이름으로 처벌되었는가? 둘째,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행여 응징의 주체가 사랑을 잃지는 않았는가? 아직 두 지표를 만족스럽게 이행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간 무엇을 건너온 것일까?


사진 출처 = 정혜경 진보당 의원실
사진 출처 = 정혜경 진보당 의원실


2)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 문학동네, 2021. 329쪽.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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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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