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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대한 변화, 우리의 미미한 변화 / 나종현

‘실학의 신화’와 ‘담헌 신화’


조선시대 역사 서술에서 ‘실학(實學)’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역사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는 식민사학에 맞서, 많은 연구자들은 한국사의 자체적 발전성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이 집중되었던 시기 중 하나는 조선 후기, 근대로의 이행 가능성이 다양한 모습으로 발아하던 시기였다. 봉건적 질서를 뒷받침했던 정주학(성리학)에 맞서 근대지향적 새로운 사상도 검출되었다. 그것이 바로 ‘실학’이며, 실학의 근대성에 입각한 조선후기 사상사 서술은 실로 ‘실학의 신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학파는 ‘실학의 신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용후생학파 또는 중상학파라고도 불리는 이 학술집단은 정주학의 세계관인 화이론에서 벗어나 오랑캐인 청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조선 지식인들은 병자호란으로 청에게 비참하게 무릎을 꿇은 다음에도 화이론을 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중화의 중심이었던 명 왕조를 잊지 못하고 그 마지막 공식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했으며, 중원을 도둑질한 청을 정벌하여 복수설치하겠다는 ‘북벌’을 마음에 간직했다. 북학파는 이러한 화이론의 좁은 세계관에 갇힌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로 질타하면서 청으로부터의 문물 도입을 주장했다. 이에 그들은 오랜 중세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을 지향했던 조선 내부의 움직임을 잘 보여주는 존재로 주목받았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전근대사 비중이 줄어들어 부족한 지면에서도 조선 후기의 세계관 변화를 ‘북벌’과 ‘북학’으로 대비시켜 설명했다. 이는 북학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담헌 홍대용은 북학의 새로운 세계관을 특히 잘 보여주는 ‘실학자’였다. 천문학과 수학에 대한 큰 관심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연구 끝에 지전설과 우주무한설을 주창하고, 조선 사회를 오랫동안 잠식했던 화이론을 타파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데까지 나아간 홍대용은 우리 역사 속에서 서양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과학자이자 선지적 사상가로 인식되었다. 정주학자이자 전통적 조선 지식인을 상징하는 허자와 새로운 사상에 입각한 실옹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의산문답(醫山問答)』은 홍대용의 변혁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저술로 평가된다.

기존 학설에서는 세종 대의 찬란한 민족문화 발달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것을 조선시대의 단점으로 꼽은 바 있다. 서양 과학의 우수성을 몸으로 절감한 소현세자와 같은 인물이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지만, 그 노력이 결국 보수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서사도 유행한 바 있다. 이러한 과학의 불모지 조선에서 서양 과학에 근접하는 성취를 이뤄낸 홍대용은 그야말로 역사 속의 거대한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홍대용에 관한 연구는 많은 경우 이 ‘담헌 신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무너진 ‘담헌 신화’와 역사적 변화의 동력


『홍대용 평전』은 ‘담헌 신화’에 대한 의문에 기반한다. 홍대용이 남긴 자료를 통해 그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그의 학술적 문제의식은 어떠한 변화과정을 거쳤는지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이 책에서는 ‘담헌 신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제기한다. 책머리에서는 홍대용을 높이 평가해 온 주류적 해석도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며 그쪽을 따를 수 있다고 했지만, 본문에서는 주류적 해석에서 바라본 홍대용의 이미지를 대부분 무너뜨린다.

경화세족 출신의 홍대용은 올바른 학문의 방식에 대해서는 분명한 고민을 가지고 고민의 결과를 실천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신분사회의 질곡을 무너뜨리기 위한 구체적인 시도는 보여주지 않았다. 조선 후기 사회의 역사적 변동 속에서 당시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이 제기되고 또 일부 실행되었지만, 홍대용은 여기에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비교적 젊은 시기에는 자신이 속한 정파인 노론의 정치 의리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 책의 세밀한 검토 속에서는 그에게서 붕당의 병폐를 없애고 노론의 편협한 의리를 타파하기 위한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담헌 신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보여준 우수성과 변혁성일 것이다. 그러나 천문학에 관한 홍대용의 사유는 정주학적 자연관의 전제 속에서 구성된 것에 머물렀다. 과학이 아니라 “정주학적 전통 위에 구축된 자연학”이었다는 날카로운 평가는 ‘담헌 신화’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손쉽게 무너뜨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혹자는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이 중세적 화이론을 전도시켰던 점을 들며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초기에는 북벌론에 기반한 전통적 화이론을 고수했던 홍대용이 연행을 계기로 한 엄성 등 중국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화이론에 대한 부정으로 극적 변환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당대에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홍대용의 변화가 가진 의미를 이 책에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화라는 중심을 부정하는 홍대용의 논리가 과연 조선이라는 새로운 중심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던가? 이 책에서는 홍대용의 발언이 ‘민족의 주체성’으로 이어질 소지를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세밀하고 실증적인 검토를 통해 ‘담헌 신화’는 무너진다. 홍대용은 조선 후기의 거대한 역사적 변화에 조응한 ‘실학자’가 아니라, 경화세족 출신의 특권계급을 유지했던 “실천적 정주학자”로 남게 된다. 그의 사상은 “발본적 사고”에 기반한 “유교적 근본주의”로 규정된다. 역사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동력은 경화세족 출신의 정주학자보다는, 오히려 명화적과 같이 혁신적 개혁안을 내세운 반란자들에게서 찾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변화하지 못하는 우리의 관점


사실 ‘실학의 신화’에 대한 비판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실학의 신화’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근래 들어서는 ‘실학의 신화’를 창출해냈던 우리 역사학에 대한 성찰과 향후 사상사 연구를 위한 모색도 부쩍 시도되고 있다. 단순히 예전에는 ‘실학자’라고 불렀지만 이제부터는 성리학자라고 부르자는 규정 변화 정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를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은, 특정 집단에게 기대했던 역사적 변화의 부재에 실망하고 다시 다른 대상에게 희망을 건다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를 바라보던 기본 관점에서부터, 연구의 소재가 되었던 여러 집단과 사건 그리고 조선시대의 세계관까지 새롭게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화이론, 북벌, 붕당, 인물성동이론 등도 바로 그 대상이 된다.

이 책은 효과적이고 설득력있게 ‘담헌 신화’를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에게 덧씌워진 근대 이후 연구자들의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한때 그가 우리 역사의 거대한 변화에 동참하고 선도했을 것이라는 기대 또한 철회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 역사에서 근대적 변화를 갈망했던 욕망 자체를 제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책에서는 화이론, 북벌, 붕당 등에 대해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부정적 인식이 거의 그대로 표출된다. 물론 이 소재들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학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시도들은 근대로의 이행 여부를 넘어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의 역사성을 그 자체로서 살피고자 하는 것이며, 현대 사회의 변화 속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또한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이 과연 홍대용과 조선후기 지식인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역사 속 사상가들에게 너무 쉽게 거대한 변화를 촉구한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과연 변화하고 있는가?

     

     

사진: 복원된 홍대용의 혼천시계. 국립중앙과학관에서는 2023년 홍대용이 나경적과 함께 만든 혼천시계(통천의)를 기록에 의거하여 복원했다. 홍대용이 가진 과학자로서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사진: 복원된 홍대용의 혼천시계. 국립중앙과학관에서는 2023년 홍대용이 나경적과 함께 만든 혼천시계(통천의)를 기록에 의거하여 복원했다. 홍대용이 가진 과학자로서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나종현(서울여대 사학과)
나종현(서울여대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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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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