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의 서기 환산, 역사학 공부의 필수 / 노관범
- 한국연구원
- 8월 28일
- 4분 분량
옛글을 읽다 보면 간지와 자주 만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박혁거세 즉위 기사가 있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년 사월 병진일에 즉위했다고 적혀 있다. 『고려사』 세가에 태조 즉위 기사가 있다. 원년(무인년) 여름 6월 병진일에 포정전에서 즉위했다고 적혀 있다. 조선 『태조실록』에 태조 즉위 기사가 있다. 원년(임신년) 가을 7월 병신일에 수창궁에서 즉위했다고 적혀 있다.
신라, 고려, 조선 모두 건국한 제왕의 즉위 기사가 있고 그 기사는 공통적으로 연, 월, 일을 갖추었다. 차이가 있다면 신라는 고려 및 조선과 달리 즉위한 공간을 적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라 박혁거세 즉위 기사의 날짜와 고려 태조 즉위 기사의 날짜는 모두 병진일인데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와 달리 시조 즉위 기사에서 월과 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연도는 기록되어 있다. 다만 삼국 시조의 즉위 기년을 비교하면 신라와 고구려는 연도의 간지도 밝혔으나 백제는 이를 생략했다.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의 기록 방식을 서로 비교하면 통일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게 하나둘이 아니다. 『삼국사기』 편찬의 최종적인 책임자 김부식이 과연 열성을 다해 국사를 편수했는지 잘 모르겠다.
다시 간지 이야기로 돌아온다. 갑자년, 무인년, 임신년. 이는 각각 신라 박혁거세, 고려 태조, 조선 태조의 즉위 기년으로 기록된 해이다. 이 해를 서력 기원으로 환산하면 어떻게 될까? 한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들은 금방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력 기원 전 57년, 서력 기원 918년, 서력 기원 1392년이다. 일단 간지 그 자체는 그렇게 환산된다.
이것은 쉬운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물어도 대답하기 쉬울까? 곧 신라 박혁거세가 즉위한 서력 기원 전 57년, 고려 태조가 즉위한 서력 기원 918년, 조선 태조가 즉위한 서력 기원 1392년은 간지로 환산하면 어떻게 될까?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금년 2025년이 을사년인데 여기에서 출발해서 하나 하나 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미리 간지를 서력 기원으로 환산하는 훈련을 마치면 편리하다. 훈련이라 말하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별것 아니다. 자기가 관심을 두는 시기를 정해 놓고 갑자년 시작부터 계해년 종말까지 서력 기원으로 환산하고 그 결과를 학습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어느 시기가 좋을까? 간지가 사건 이름에 자주 노출되는 시기를 고르라면 역시 조선말기가 제일감으로 떠오른다.
간단히 문제를 풀어보자. 다음 사건이 일어난 해는 서력 기원 몇 년인가? ①병인양요, ②신미양요, ③임오군란, ④갑신정변, ⑤갑오개혁, ⑥무술변법, ⑦을사늑약, ⑧경술국치, ⑨신해혁명, ⑩경신참변. 정답은 차례대로 1866, 1871, 1882, 1884, 1894, 1898, 1905, 1910, 1911, 1920이다. 열 문제 모두 정답을 맞추었다면 일단 이제부터 아래의 과제를 수행할 기본 소양이 있다고 자부해도 좋다.
자, 본래부터 기억하는 간지를 밑천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자. 조선말기 고종이 즉위한 해는 갑자년, 1864년이다. 이를 기점으로 제1열(1864~1873)은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신미, 임신, 계유. 제2열(1874~1883)은 갑술, 을해, 병자, 정축, 무인, 기묘, 경진, 신사, 임오, 계미. 제3열(1884~1893)은 갑신, 을유, 병술, 정해, 무자, 기축, 경인, 임진, 계사. 제4열(1894~1903)은 갑오, 을미, 병신, 정유,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인, 계묘. 제5열(1904~1913)은 갑진, 을사, 병오, 정미, 무신, 기유, 경술, 신해, 임자, 계축. 제6열(1914~1923)은 갑인, 을묘, 병진, 정사, 무오, 기미, 경신, 신유, 임술, 계해.
위의 여섯 계열 중에서 어느 계열 간지가 제일 편하게 기억되는가? 상대적으로 제4열과 제5열이 쉬울 것 같다. 제4열에는 갑오개혁, 을미의병, 무술변법, 신축신정 등이 있다. 제5열에는 갑진개화, 을사늑약, 정미의병, 기유각서, 경술국치, 신해혁명 등이 있다. 이것들은 생소하지 않은 사건이고 그래서 사건 앞에 붙어 있는 간지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 시기로부터 앞뒤에 놓여있는 다른 시기에서 힌트를 받아도 좋다. 기해박해(1839)와 임술민란(1862)의 연도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60을 더한 1899와 1922는 자동으로 기해와 임술이다. 을축대홍수(1925)와 을유해방(1945)의 연도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60을 뺀 1865와 1885는 자동으로 을축과 을유이다. 더 멀리 움직이면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의 연도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60×5=300을 더한 1892와 1897은 자동으로 임진과 정유이다. 계미삼찬(1583)과 계해반정(1623)의 연도를 기억하고 있다면 역시 60×5=300을 더한 1883과 1923은 자동으로 계미와 계해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시기 60년의 간지를 갑자년부터 계해년까지 모두 서력 기원으로 환산하는 훈련을 마쳤다면 이제는 광명 세상이다.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정말 다르다. 사료에서 간지가 서력으로 환산되어 읽히는 기분은 아는 사람만이 알겠지만 그래도 정말 남다른 기분이라는 점만은 꼭 말하고 싶다.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 같은 사건, 기해예송(1659), 갑인예송(1674), 경신환국(1680), 갑술환국(1694) 같은 사건, 이런 사건의 연도는 이미 암기해서 본래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뚜렷한 사건이 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 연도, 예를 들어 고구려 광개토대왕 계사년이나 고려 광종 갑자년은 이들의 치세 기간을 대략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상기한 훈련 결과를 활용해 곧바로 암산할 수 있다. 곧 고구려 광개토대왕 계사년은 1893-1500(60×25)=393년이고, 고려 광종 갑자년은 1864-900(60×15)=964년이다. 물론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의 그 유명한 신묘년(391)에서 두 해 전진하면 계사년이고 과거제가 처음 시행된 고려 광종 무오년(958)에서 여섯 해 전진하면 갑자년이니 이런 식으로 기억해도 좋다.
물론 지금은 AI시대. AI에게 물어서 정확한 답변을 기대해도 좋다. 하지만 AI에게 이런 단순한 물음을 묻는 것은 조금 창피한 일 아닐까? 물론 정확하게 답변하는지 시험할 생각이라면 괜찮겠지만. 실제로 AI에게 고구려 광개토대왕 계사년과 고려 광종 갑자년을 서력 기원으로 몇 년이냐고 물었다. 정확하게 답변하기에 ‘어떻게 그렇게 간지를 잘 아니? 척척 잘 맞추네.’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그랬더니 하는 말. ‘제가 간지를 척척 맞출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방대한 지식 데이터.. 계산 능력.. 질의 이해 능력..마치 제가 거대한 역사 달력과 간지 계산기를 내장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나는 AI에게 간지를 물을 생각은 없다. 더 근사한 것을 묻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양 역사학자 랑케, 마이네케, 브로델, 월러스틴, 앙커스미트, 스키너, 이렇게 6인의 관점에서 한국 고대사의 토픽, 곧 고조선의 멸망을 논하라고 AI에게 시켰더니 아주 재미있는 답변을 들었다. 다음에는 H 웰즈의 세계사, J 네루의 세계사, M 페로의 세계사, T 안사리의 세계사, 그리고 녹색 세계사와 갈색 세계사의 시각에서 세계사로서의 한국사를 논하라고 시킬 생각이다. 아, 갈색 세계사는 실수이다. 이렇게 물으면 AI가 알아듣지 못한다. 『갈색 세계사』의 핵심 논지 ‘제3세계 프로젝트의 성쇠’로 고쳐 물어야 한다. 과연 AI의 답변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