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혐오(self-hatred)는 스스로를 향해 가지는 강한 부정적 감정과 태도를 뜻한다. 자신의 외모, 능력, 성격, 행동 등 다양한 측면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자기혐오를 경험하는 사람은 자신을 가치 없고, 무능하며,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예술작품은 종종 자기혐오를 다루며, 이를 해석하는 데 유용한 이론적 개념들이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주체가 자신의 일부를 혐오하고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현상을 가리킨다. 로버트 매플손프(Robert Mapplethorpe)의 <Self-Portrait>(1978)는 기괴하고 가학적인 이미지를 통해 이러한 아브젝시옹을 시각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언캐니(Uncanny)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개념으로, 익숙하고 친근한 것이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변화하는 경험을 일컫는다.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La Poupée>(1935)는 절단된 인형을 가지고 언캐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로테스크(Grotesque)는 비정상적이고 음산한 것, 또는 우스꽝스럽고 소외될 만한 것을 의미하며,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Untitled #654>(2023)는 이를 활용하여 인간의 부정적 측면과 자기혐오를 표현한 경우다.
올해 4월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국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는 코미디언 지망생 ’도니’가 겪는 자기혐오와 학대를 그린 다크 코미디다. 도니는 자신이 일하는 바에 찾아온 손님 ’마사’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었다가 인생이 꼬이고 만다. 마사는 도니에게 자신을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소개한다. 그럼에도 당장 차값을 지불할 돈이 없다니? 사실 그녀는 여러 번의 스토킹 전과로 인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경찰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니는 대가 없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사 앞에 내놓는다. 그러자 마사는 도니의 친절과 친근한 농담을 자신을 향한 로맨틱한 감정이라고 멋대로 해석하고 집요하게 도니의 사생활을 파고든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수 개월이 지나도록 도니는 마사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괴롭힘을 참다못해 경찰서를 찾아가 보지만 결심을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그는 왜 이런 아이러니를 범할까?
드라마가 회차를 거듭하며 비밀이 걷힌다. 그 중심에 숨겨진 인물이 있다. 거물급 코미디언을 꿈꾸며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을 찾은 도니의 인생에 우연히 등장한 유명 영화감독, 대니언. 그는 도니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용기를 북돋워 줬다. 그랬던 그가 도니의 삶과 자존감을 처참히 꺾는 사건이 발생했고, 깊은 충격과 무력감에 빠진 도니는 어떠한 대응도 취하지 못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뒤 나타난 게 마사였다. 마사는 도니의 좋은 점들을 끝없이 고백한다. 비록 스토커의 왜곡된 애정 공세일 뿐이지만, 도니가 기댈 수 있는 긍정적 피드백이다. 마사는 도니의 썰렁한 코미디 연기에도 폭소를 터뜨린다. 도니는 점차 혼란에 빠진다. 믿었던 이의 파렴치한 행각에 속수무책이었던 자신이, 왜 유독 마사에게만 준법과 존중을 요구하는가? 정말로 신고했어야 할 사람한테 눈 감았던 스스로의 과거가 떠오른 도니는 다부지게 마사를 퇴치하지 못한다.
그가 우물쭈물하는 사정이란 다름 아닌 자기혐오다. 한때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맞서지 못한 찌질이”였던 주제에 상대적으로 힘없는 마사한테만 저항하려 든다는 가책 때문에 강하기 나가기를 주저한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밀려올수록 아무렇지 않은 듯 현실과 타협한 덕분에 일상은 그럭저럭 굴러간다. 밤에는 스탠딩 코미디 클럽에서 조금씩 목표를 키워나가고, 낮에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마침내 코미디 대회 무대에 오른 날, 도니는 객석의 싸늘한 반응을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다. 그 자리에서 연기를 집어치우기로 결심한 그는 객석을 향해 솔직한 독백을 던진다. 코미디언으로서의 부적합성, 대니언의 성착취, 마사의 스토킹, 사랑했던 여인과의 결별, 그러는 동안 평생 도망자였노라 주저 없이 말한다. 그렇게 무대를 떠나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전폭적인 팬덤을 이끌어내지만, 도니는 좀처럼 학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패닉에 빠진 상태로 들어선 어느 바. 비참한 몰골로 차 한 잔을 마시고 값을 치르려는 순간, 지갑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황한 도니에게 바텐더는 자신이 사겠다며 차값을 받지 않았고, 마사가 도니의 바를 처음 찾았던 그 날과 비슷한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자기혐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상 속에서 은밀하게,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개인의 삶을 잠식해 간다. 도니의 사례는 이러한 자기혐오의 복잡하고 미묘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른바 자기PR은 우리로 하여금 '가면자아'를 키우도록 부추긴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과 칭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장담하지만 끝임없이 스스로를 포장하고 꾸민다. 그 과정에서 내면의 '본연자아'와 점점 멀어지며 솔직해질 기회를 잃고, 진솔해지는 방법 자체가 기억에서 지워진다. 우리는 진실한 느낌과 생각, 욕구를 외면한 채 타인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성된 자아가 무너진 폐허에서 우리는 자기혐오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을 피하려면 자기 자신과의 진솔한 대화를 미루지 말아야 한다. 감추고 싶었던 약점과 결점까지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마지막 무대에서 도니는 자기 자신의 청중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던 그는 새롭게 출발하려는 중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마사처럼 처량하게 바에 앉아, 예전에 마사에게 베풀었던 호의를 그대로 돌려받는다. 이러한 순환을 통해 누구든지 언젠가 일그러진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스스로의 비참함을 용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냉철한 자기객관화의 출발이지 않을까? 냉철冷徹이라고 쓰지만 거기에 따뜻함이 깃들어 있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힐끔 보고 차 한 잔 건네는 바텐더처럼. 그러나 자기혐오에는 따뜻함이 없다.
한때 구호와도 같았던 ‘자기PR 시대’. 그 패러다임이 휩쓸고 간 자리에 자기혐오가 무성하다. 이제 우리는 습관적인 자기포장을 넘어 진정한 자기수용과 진솔함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설득력 있는 자기PR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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