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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도넛이라는 사실에 관하여 / 마준석

학부 대학생일 때 수학 교양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수학”이라는 과목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수학의 분과들을 개론적으로 소개하는 수업이었다. 수학으로 고통받았던 재수생 마준석에게 수학 교양과목은 학점 채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아쉽게도 대부분의 배움들이 지금은 소실되어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위상수학를 배울 때다. 공간 속의 형태와 위치를 연속적인 변화 속에서 탐구하는 이 학문은 우리의 직관적인 거리감을 매번 배반한다는 점에서 어렵고 독특하다. 예컨대 흔히 드는 예시로 도넛과 머그컵은 ‘같은 모양’(Isotope)인데, 그렇다고 해서 도넛의 구멍이 컵 가운데의 옴폭한 부분에 상응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손잡이에 상응한다. 컵의 오목함이 얼마나 깊고 넓든 간에 위상수학적으로는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런데 머그컵과 마찬가지로 또 도넛 모양인 것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입으로부터 소화기관을 거쳐 항문에 이르는 구멍이 뚫린 도넛이다. 조금 와닿지 않는다면 빨대를 생각해도 좋겠다. 빨대나 도넛이나 인간이나 위상수학적으로 동형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나의 ‘내부’라고 생각했던 소화기관은, 실제로는 나의 ‘외부’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인간 배아가 분열하며 성장할 때, 처음에 온전한 구 모양이었던 수정란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며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의 시작과 끝이 각각 입과 항문으로 분화한다는 발생학적 사실에 입각해서도 입증된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가 발생해서 분화하는 것을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예컨대 한 점에 불과한 구 모양의 수정란에서 팔, 다리가 뻗어나오고 뇌와 심장과 같은 장기들이 생겨난다. 없던 것이 있게 되고, 있는 것들이 서로 엮여 하나의 조직체를 구성하는 과정이 생명 발생의 경이로움이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것은, 그 발생 과정이 죽음과 함께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위상수학적으로 구는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도 도넛 모양이 될 수 없다. 입과 항문, 그리고 소화기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에 구멍이 뚫려야만 하고, 구멍이 뚫리기 위해서는 있던 것이 없어져야만 한다. 이 과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세포자살(Apoptosis)이다. 나 자신의 일부가 죽음으로써 나는 나의 몸을 관통하는 소화기관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신체에는 분명 생과 죽음이 두 겹으로 겹쳐져 있다. 오늘의 한 끼를 위해 선홍빛 살코기를 토막 내고 익혀 삼킴으로써 나는 타자의 죽음에 나의 생을 기대지만, 동시에 타자의 죽음을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나는 먼저 나 자신의 죽음을 겪어 내야만 한다. 그렇게 나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이 두 겹으로 나의 생을 이룬다. 나의 생은 죽음에 의존해 다른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죽음에서 생으로 건너간다. 이렇게 타자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 생을 매개로 결합될 수 있는 까닭은, 애초에 소화기관이 나의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이기 때문이다. 외부라는 점에서 나는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게 되고, 내부라는 점에서 나는 나 자신과 관계 맺으면서 나의 생을 염려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화는 안과 밖의,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중층적 상호작용이다.

 

인간의 먹고 사는 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일이 이와 같다. 교육이란 학생 자신의 내적 잠재성을 실현시키는 과정인지 아니면 스승의 외적 가르침으로 학생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인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이 있다. 답은 “둘 모두”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교육에 있어서 학생의 내적 역량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스승의 외적 가르침 또한 중요하다는 흔한 의미가 아니다. 반면에 내적 역량이나 외적 역량이 내외부로 구분되지 않고 중층적으로 겹쳐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교사의 가르침은 학생에 의해 ‘가르침’으로 정립되는 한에서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이러저러한 지도 중에 무엇을 가르침으로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학생의 역량이기 때문에, 외적 가르침은 내적 역량의 산물이자 더 나아가 학생의 내적 역량 그 자체이다. 결국 훌륭한 교사가 훌륭한 제자를 만들지만, 동시에 훌륭한 제자가 훌륭한 스승을 만들기에 안과 밖은 중층적이다.

 

사랑 또한 다르지 않다. 흔히 사랑은 외부로부터 세차게 들이닥쳐 주체를 흔들어놓는 경험으로 묘사된다.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내적인 결정을 내린 후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분명 나의 외부로부터 쇄도하는 타자의 침략이다. 따라서 저 사람이나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 나의 사랑의 대상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 대상에 놓여있다. 나는 이 사람이 의젓하기에/예쁘기에/부유하기에/키가 크기에 사랑한다. 그럼에도 그 대상의 특정한 속성이 사랑의 근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내적인 마음의 구조 때문이지 그 외부 대상의 고유함 때문이 아니다. 결국 사랑에서 나는 타자를 경유해 나 자신을 도로 발견하며, 여기서 안과 밖은 전도되어 있다.


영화 <오만과 편견(2005)>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다. 안과 밖, 내부와 외부가 겹쳐진 이 중층 공간에서 나와 타자 간에 교환되는 것이 꼭 실정적일 필요는 없다. 반대로 우리는 타자와 결여를 교환하기도 한다. 우리가 소화에서 나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을 매개로 생을 이룩하듯이 말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부유하고 솔직한 신사 다아시와 가난하지만 당찬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교환되는 것은 사랑의 메세지가 아니고 그의 부유함이나 그녀의 아름다움도 아니다. 오히려 다아시의 오만함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즉 각자의 결점이 교환되고, 당연히 둘의 첫 번째 만남은 파국으로 끝난다. 그럼에도 이 실패를 넘어, 아니 이 실패 덕분에 그들은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결혼하게 되는데, 이 실패가 안과 밖의 중층적 관계를 서로에게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아시의 오만함은 엘리자베스의 편견적인 시선 때문이었고, 엘리자베스의 편견은 다아시의 솔직함을 빙자한 오만함 때문이었다. 여기서 각자에 외적인 상대방의 결점은 각자 내부의 결점으로 매개되어 있으며, 따라서 상대방의 결점이 나 자신의 결점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 그들은 비로소 사랑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우리는 안과 밖을 대립된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의 개체에서, 혹은 하나의 공동체에서 안과 밖은 중층적으로 교환된다. 안은 밖으로 표출되고, 밖은 안으로 내입되며, 나는 타자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이미 타자를 통해 매개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책임져야 할 권역은 각자의 마음과 말과 행동에 멈추지 않는다. 내가 마주치는 사건이나 타자의 존재에도 나는 어떤 의미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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