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것은 실학인가?
①노비를 양인으로 할 것,
②3정승, 6판서도 양․천민 중에서 골고루 담당하기로 할 것,
③유학(幼學)․교생(校生)․무학(武學) 등 한유(閑遊)한 양반들에게 군역을 부과할 것,
④궁방(宮房)과 권세가의 농장을 몰수하고 이를 상급할 것,
⑤원부세(原附稅)이외의 각종 잡역을 금지할 것,
⑥노비 노동에 대신하여 고공제(雇工制)를 도입할 것,
⑦형벌제도를 완화할 것 등
노비를 양인으로 해방시킬 것, 영의정․좌의정․우의정과 6조의 판서도 양민과 천민이 골고루 담당할 수 있게 할 것, 군역을 피한 양반들에게도 모두 일률적으로 군역을 부과할 것, 궁방과 권세가의 농장, 곧 토지를 몰수하여 분배할 것 등이다. 이 개혁안은 현재까지 알려진 어떤 개혁안보다 철저하고 근본적일 것이 터이다.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사족체제는 붕괴하고 조선은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될 것이다.
당연히 이 개혁안은 ‘실학’으로, 그 제출자는 ‘실학자’로 규정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개혁안을 제출한 주체는 명화적(明火賊) 집단이다. 1629년 2월 사형을 당한 명화적 이충경(李忠景)․한성길(韓成吉)․계춘(戒春)․막동(莫同) 등은 원래 황해도 지방의 광한적(獷猂賊)으로 호란(胡亂)을 틈타 유민을 모아 군도집단을 이룬 뒤 강원도로 옮겨가 철원․평강 일대에 출몰하며 살략(殺掠)을 자행했다고 한다. 이들은 드물게도 문초 기록에서 자신들이 목적하는 바를 뚜렷하게 남겨 놓는다. 그들은 산골짜기 깊은 곳에 담장을 치고, 최영(崔瑩)장군, 남이(南怡) 장군의 화상을 그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약조(約條)․관원․부서(局)을 만들고 서로 맹세하여 이충경을 우두머리로 삼아 대역(大逆)을 도모했다고 한다. 이들은 명화적 집단이지만 정식으로 내부의 법을 만들고 관원과 부서를 두었다 하니, 아주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다. 이들의 반서(反書)는 지극히 흉악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평민․천민으로 구성된 이 명화적 집단은 서울을 점령하고 15개 조의 사회개혁안을 실행하려 했으니, 위에 든 것은 그중 일부다. 요컨대 실학은 유형원(柳馨遠)․유수원(柳壽垣)․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정약용(丁若鏞)과 같은 사족 출신의 이른바 실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2. 실행되지 않은 제도개혁론
실학의 중심은 제도개혁론이다. 1670년 유형원의 반계수록, 유수원의 18세기 전반의 우서(迂書), 1778년 박제가의 북학의, 1817년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 1858년 최성환(崔瑆煥)의 고문비략(顧問備略) 등 실학의 대표적 저작은 예외 없이 제도 개혁을 주장한다. 아, 물론 그 사이에 이익과 홍대용, 박지원 등 대단한 일류 지식인들의 개혁안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서울과 경기, 충청도에 세거하는 사족들,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곧 이른바 지금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실학자’는 경화세족이다.
제도개혁론은 실학자만 제출한 것이 아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제도 혹은 관행(특히 수탈과 관련한)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엄청난 분량의 상소가 실려 있다. 구체적 내용을 다루기에 상소는 길어지기 일쑤이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긴 것은 ‘만언소(萬言疏)’라고 부른다. ‘만언’으로도 부족하면, 따로 책자의 형태로 만들어 올린다. 예컨대 우하영(禹夏永)의 천일록(千一錄), 박제가의 진소본(進疏本) 북학의 같은 것이다. 이런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린 사람은 다양하다. 낮은 위계의 관료일 수도 있고 향유(鄕儒)일 수도 있다. 이들은 실학자인가, 아닌가?
‘실학’의 제도개혁책이 실천된 경우는 얼마나 될까? 반계수록과 우서와 북학의와 경세유표와 천일록과 고문비략의 구체적이고 다양하고 정연한 개혁안은 종이 위에만 존재했던 것일 뿐이다. 실천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개혁책은 자신을 현실에서 구현할 방법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체로 개혁책들은 왕에게 그 실행을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왕은 경화세족 출신 관료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며, 그 역시 제일의 경화세족이었다. 개혁안이 실행된다는 것은, 왕과 경화세족이 스스로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과 부(富)를 포기하거나 제한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도개혁책은 포기와 제한을 강제할 방법을 동시에 제시해야만 하였다. 그 강제는 곧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670년 반계수록부터 1858년 고문비략에 이르기까지 저술로 이루어진 다양한 제도개혁책, 또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개혁 상소들(특히 장문의 상소들)의 존재는, 역으로 사족체제가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도리어 개혁의 필요성이 개혁에 대한 저항을 넘을 수 없는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한국사 연구가 무수한 제도 개혁책 중 극히 일부에 주목해 그것을 실학으로 특별히 명명했던 것은 개혁이 실행되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3. 화폐의 수장(水葬)
실학에는 경제학이 있다. 실학의 경제학은 상업론․무역론․화폐론을 포함한다. 예컨대 북학파의 상업론․무역론이 대표적인 것이다. 북학파의 대표자 박지원의 「허생전」은 박제가의 북학의와 함께 사족도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관념을 선전하는 것으로, 나아가 국제무역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허생의 상업은 2회의 매점매석으로 끝난다. 그가 매점매석에 나선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산반도의 군도(群盜)를 무인도로 데려가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서였다. 군도는 과잉 수탈로 인해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이었으니, 그것은 사족체제의 모순이 빚어낸 저항적 존재들이었다. 사족체제가 존재하는 체제 내부에서는 군도의 발생을 막을 수 없었다. 곧 허생은 군도를 데려간 무인도는 사족체제 외부의 공간이다. 허생은 그 공간에서 아나키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2차례 매점매석을 하였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하기 위해 상업에 종사했던 것이 아니다. 사족의 상업을 지지하거나 상업 자체를 옹호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나가사키에 기근이 들자 허생은 섬에서 수확한 쌀을 실어가 기민을 구제하고, 은 1백만 냥을 받아 돌아온다. 허생의 섬은 화폐가 필요 없는 곳이다. 허생은 1백만 냥 중 50만 냥을 바다에 수장(水葬)시킨 뒤 조선에 돌아와 40만 냥으로 빈민들을 구제하고, 10만 냥을 변부자에게 갚는다. 허생이 매점매석으로 나가사키로 곡식을 실어나르는 행위가 화폐를 얻기 위한 상업(무역)으로 해석되려면, 1백만 냥을 자본으로 하여 곡물을 포함한 다양한 상품을 운송, 판매하는 행위가 반복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반복되지 않았다. 그는 화폐를 소유하지도, 자본으로 사용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50만 냥을 수장하여 화폐에 대한 경멸감을 표시한다. 박지원이 양반이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거나, 상업을 적극 옹호했다고 볼 수 있는가? 허생이 했던 행위는 위기에 빠진 타자, 곧 토지에서 축출된 농민(군도), 굶주림으로 죽음의 위기에 빠진 나가사키의 기민(기민), 국내의 빈민을 아무 보상 없이 돕는 것이었다. 허생의 이타행(利他行)에는 화폐를 소유하는 것을 열망하는 상인의 형상이 전혀 없다! 이것은 상업과 화폐를 지향하는 상인의 형상이 아니다.
4. 지구가 스스로 회전하는 이유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알려져 있다시피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다. 이 자전설은 지구의 자전(自轉)만 주장하는 하는 것일 뿐 정작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구의 공전(太陽中心說, heliocentrism)은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의산문답」의 지전설이 대서특필된 것은, 이것이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갈릴레이에 이르는 heliocentrism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곧 착시현상이다. 지전설은 한국사의 ‘근대과학의 부재’란 콤플렉스를 치료하는 효과다. 이런 점에서 이 착시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의산문답」의 지전설은 지구설(地球說)을 전제하는데, 지구가 구형이란 사실은 별반 신기할 것도 없는 것이었다. 열하일기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서 중국인 기풍액(奇豊額)이 박지원과의 대화에서 ‘땅이 둥글다는 말은 서양인이 처음으로 꺼냈다’(地毬之說, 泰西人始言之)라고 말했듯, 지구설은 이미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다만 지전설은 홍대용이 처음 제출한 것이다. 하지만 지전설의 내부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지구설은, 지구 자체가 추락하지 않는 것과 대척지(對蹠地) 문제, 곧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사물이 추락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해야만 하였다. 홍대용은 우주를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위와 아래라는 방향의 설정 자체를 부정했다. 상․하의 방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의 추락과 지구 표면의 사람과 사물의 추락은 존재할 수 없다. 아마 우주무한설은 ‘추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으로 구성된 논리일 것이다.
또한 「의산문답」의 지전설에 의하면, 지구의 회전으로 말미암아 지구 표면의 사람과 사물을 쓰러지거나 날아가야 마땅하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홍대용에 의하면, 지구는 포기(抱氣)로 불리는 얇은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는, 지구가 맹렬히 회전할 때 포기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기(氣)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면서 아래로 몰려 쏠리는 기(氣)의 장(場)이 인간과 사물을 쓰러지지 않게 한다고(달리 말해 지구 바깥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우주에 가득한 ‘기’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포기’의 존재는 선언적인 것일 뿐 실증된 것이거나 실증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지구의 회전은 우주의 기와 지구의 포기의 마찰을 말하기 위해 역으로 구성된 궁색한 발상일 수 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요컨대 「의산문답」의 우주무한론과 지전설은, 당시까지 전해진 서양과학을 중국 전근대의 자연학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산문답」의 지전설은 heliocentrism에 버금가는 비중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왜?
5. 실학 너머
이제까지 언급한 ①제도개혁론, ①경제학(상업․무역․화폐론), ①과학(사실은 자연학)은 각각 다른 맥락에서 제출된 것이지만 한국사에서 이것들은 모두 실학이란 이름으로 묶인다. 여기에 다른 것들이 추가될 수 있다.
④실용생활학―예컨대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물론 이 이전의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등을 포함.
⑤민족학―언어학(ex. 유희의 언문지) 역사학(ex. 안정복의 동사강목), 지리학(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지도학(ex.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등.
①②③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 추가되는 ④실용생활학과 ⑤민족학 역시 모두 실학에 포괄된다. 각각 다른 맥락에서 제출된 이것들은 한국사의 어떤 서사 안에서 ‘실학’으로 불리게 된다. 그 서사란 ‘민족이 주체가 되어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근대로 향했던 진보의 역사’다. 알다시피 이런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20세기 한국인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 ‘근대 부재’의 콤플렉스가 역으로 상상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학의 내부 구성물들은 허구적 근대 서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원된 재료들일 뿐이다. 21세기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적 근대에 깊이 진입했다. 실학이라는 상상의 담론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경험으로 존재한다.
현금의 한국 학계는 ‘구성된 실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학은 시민권을 갖고 그대로 통용된다. 실학의 구성을 해체하는 것은 사실 간단한 문제다. 개혁론과 경제학, 자연학, 실용생활학, 민족학 등을 그것들이 있었던 각각의 컨텍스트로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실학을 해체하면, 조선후기에 민족이 자본주의적 근대로 진보하고 있었다는 서사 자체가 무너진다. 이것은 조선전기의 역사상(歷史像)과 임병양란에 대한 기존의 해석까지 뒤흔들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사를 다시 구성해야 한다는 난감한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실학이 구성된 것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선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골치 아픈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실학을 구성함으로써 만들어낸 ‘민족이 주체가 되어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근대로 향했던 진보의 역사’란 서사는, 기실 20세기 이후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의 완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뭐,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이 따로 있겠냐마는) 자본주의적 근대를 위해 역사가 동원된 것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한국인은 강력한(아니 강제된) 국사 교육을 통해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적 근대의 삶을 유일한 형태의 삶으로, 아니 절대적 진리로 믿게 되었다. 국가 권력이 구성하는 역사는, 그냥 듣기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이 서사를 폐기하는 것은,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한다. 이 반성은 근대 이후 한국의 역사학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역사학을 요구할 것이다. ‘실학 너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궁금하지 않는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