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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소멸할지언정 / 마준석

언제나처럼 유튜브에서 쓰잘데기없는 영상들로 뇌를 녹이다가 흥미로운 쇼츠를 하나 보았다.1) 코미디 팟캐스트 진행자인 앤드류(Andrew Santino)와 보비(Bobby Lee)는 필리핀에서 나고 자란 루디(Rudy Jules)에게 필리핀에는 어떤 미신이 있는지 물었다. 루디가 진지하게 답하기를, 밤에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켰다면 곧바로 자신의 그 손가락을 깨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행위 원칙에 앤드류와 보비는 웃음을 터트렸고 루디는 이 미신을 해명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무에는 괴물이 살아서, 그를 가리킨 손가락을 스스로 깨물지 않는다면 그 손가락이 결국에 잘릴 것이기 때문이다. 보비는 그 특유의 귀여운 말투로 빈정거리면서 어째서 발을 세 번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팔을 들어 휘젓는 것도 아니고 굳이 손가락을 칵 깨무는 것이 손가락을 살리는 해결 방안일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보비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정말로 손가락을 구하기 위해서는 발을 세 번 두드려서는 안되고 손가락을 칵하고 깨물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엄격한 필연성이 있다. 왜냐하면 감히 자신을 가리킨 죄를 묻기 위하여 괴물은 손가락을 물어뜯을 터인데, 이 재앙과도 같은 해결법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괴물보다 먼저 죄를 청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끔찍한 진짜 해결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마치 진짜 같은’ 가짜 해결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손가락을 스스로 먼저 물어뜯는 일이다. 그 어떤 존재도 이미 잘린 손가락을 다시 잘라갈 수 없다.

 

‘진짜 같은’ 가짜 해결을 통해 진짜 해결을 회피하는 일은 비단 미신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 전에 치러진 수능에서도 동일한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뿌리 깊은 학벌주의와 과도한 사교육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 정부는 ‘킬러 문항’을 제거하는 아주 효율적인 선택을 했는데, 이를 통해 정부는 교육 정책과 입시 제도를 변화시키는 골치 아픈 진짜 해결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킬러 문항을 제거함으로써 무엇이 달라졌는가? 사교육 카르텔은 혁파되었나? 상대적으로 쉬운 수능이 출제되었을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사교육은 융성하고 학생들은 고등학교 자퇴를 하고서 재수학원에 들어가는 형국이다. 가짜 해결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보다 진정한 해결을 배제하고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문제를 존속시키는 데 기여한다. 


 

최근 동덕여대가 남녀공학으로 전환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소란이 일고 있다. 학교 측은 비공식적인 논의 과정에서 제출된 단순한 하나의 아이디어라 해명했으나, 학생들은 그 해명을 믿지 않았다. 학교의 벽과 도로, 강의실과 게시판은 래커와 페인트로 다채롭게 색칠되었고, 계란과 밀가루가 날아다녔으며, 각종 비품과 시설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었다. 피해 추산액은 학교 측 최대 추정치 54억도 가뿐히 넘길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오고, 학생들의 시설 점거로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어서 대다수가 온라인 강좌로 대체되었다. 연구실에 출입하려는 교수를 에워싸고 “니가 먼데”, “꼰대 닥쳐” 소리치거나 멱살을 잡고 끌어내는 영상을 보고서, 학생들이 참 올바른 일을 했다고 기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동덕여대 총장뿐만 아니라 총동문회에서도 학내 사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으며, 건전한 지성의 장인 대학에서 대화와 경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를 청했다. 이준석 의원은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에 사용했던 “비문명적”이라는 규정을 다시 꺼내들었고, 개혁신당과 국민의힘의 여타 정치인들 또한 폭력과 야만을 규탄하는 목소리로 동조했다. 비공식적인 의견 제시에 불과한 논의 때문에 학교 자체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물리적으로 파괴되었으니, 학생들의 폭력 시위는 분명 과도하게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학령인구 감소에 대응하며 대학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대를 공학으로 전환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짓 해결책이다. 이는 대학 자체의 근본적인 역량을 증진하거나 여타 대학들과는 다른 차별점을 모색한다는 진정한 해결책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더 많은 학생을 모집하여 더 많은 등록금이나 정부 지원금을 확보하는 것으로는 대학의 소멸을 지연시킬 수 있을 뿐,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모든 난장판 속에서도 학생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 학생들의 비문명적인 소요 사태를 소수의 일탈이라 희석하지 않고서도 동시에 우리는 그 폭력이 밝히려는 바가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모든 정치적 의사 표현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려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동덕여대 총학생회는 학교 측의 공학 전환 논의를 밀실 합의라 규정하고 학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를 요구했다. 다시 말해 학교가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민주 동덕여대 비대위원장은 학교의 “행정 주체가 현실적으로 대학”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내용이 2차적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 해명하고, 추후에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었다고 반론했다.2) 학교 측이 염두에 둔 것은 아마 1996년 상명여자대학교의 상명대학교로의 전환일 것이다. 당시 실무자와 교수진으로 구성된 학교개발팀에서 30개월 간 공학 전환을 검토하여 승인하였고, 설명회를 개최한 후에 학내 구성원 총투표로 최종 가결되었다. 상명대에서도 공학 전환의 주체는 대학 실무진이었고 학생들에게 내용은 2차적으로만 전달되었다. 이러한 의사결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대학은 ........이다. 이는 학생들도 동의한 바이다.” 의사결정 과정의 최종 심급으로서 학생들의 총투표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학생들은 여전히 그 실질적인 의사결정에 배제되어 있다. 일반적인 총학생회의 매우 빈약한 실권을 생각해보라. 총학생회에게 허락된 고민은 학생 휴게실을 어디에 증설할지, 축제에 어떤 연예인을 초대할지 정도일 뿐이다. 반면에 동덕여대 학생들은 “........” 바깥에 남지 않으려한다. 학생들은 그 공란에 스스로 참여하여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요구한다. 이민주 비대위원장이 인정했듯이 학생들은 구조적으로 학교의 행정 주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남은 일이란 그러한 구조 자체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일이다. 학생들은 학교를 래커와 테이프로 알록달록 꾸미면서 우리가 여기 있다고, 학교에 너무 많아서 실제로는 보이지 않던 우리 학생들이 여기 있다고 외치고 있다. 지금까지 비가시적으로 은폐되었던 것은 실상 학교의 의사결정 과정에 마지막 잉여로서 부가될 뿐인 학생들이며, 폭력적인 소요 사태는 이 학생들을 다시금 가시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학내 소요 사태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학교와 학생은 어떻게 화해하는가? 헤겔은 ‘화해(Versöhnung)’ 개념을 철학적으로 사용했는데, 흔히 화해는 대립이 해소되고 원래의 동일자로 안전하게 복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때문에 헤겔 철학은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적이라는 평가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화해’는 개념과 실재의 일치로서, 설령 그 실재가 더이상 견디지 못해 파괴될지언정 자기 자신의 진리를 엄격하게 실현할 것을 요구하는 개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는 동덕여대 학생들의 표어는 헤겔적 ‘화해’로 읽힐 수 있다. 만약 동덕여대가 재정을 확보하고 취업률을 증진하기 위해 공학으로 전환된다면, 이는 여성 교육의 산실이라는 동덕여대 자신의 개념을 위배하는 것이다. 여대는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법을 익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재단이 부를 늘리거나 직업소개소로 기능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면에 여대가 스스로 소멸할지언정 여전히 여대로서 자신에 본질에 충실하다면, 여대는 자신의 개념과 진실로 화해한 것이다.

 

물론 여대가 공학으로 전환된다고 페미니즘 운동이 좌절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결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면 공유될 수 없는 독단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또한 여성들은 비여성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면 진정한 여성되기에 실패할 만큼 나약한 존재들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동덕여대가 설령 공학으로 전환된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여전히 주체일 수 있고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럼에도 여대가 존속해야만 하는 까닭은, 여대가 생존 논리에 따라서 공학으로 전환될 때 일종의 잘못된 부가적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여대가 더이상 필요 없어질 만큼 참된 평등이 이루어졌다는 메시지 말이다. 따라서 여대는 하나의 사회적 기표로서 존재한다. 아직 여성들의 진실된 해방은 성취되지 않았고, 페미니즘은 이 사회에서 미완의 투쟁이며,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는 상징으로서.

 

결국 “건전한 지성의 장”인 대학교에서 “비문명적”인 폭력 행위를 통해 물어지는 것은 대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여대의 본질이 무엇인지의 물음이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가짜 해결책에 안주할 때 대학은 “건전한 지성의 장”이기를 포기하는 것이지, 학생들이 난장판을 벌인다고 그러한 것이 아니다. 동덕여대 학생들은 멀끔하되 기만적인 허울 속에 사느니 차라리 랙커칠된 폐허 속에 살기를 결단했다. 그 모든 정당화되지 않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 결단 자체는 여전히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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