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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철학 / 김동규

어쩔 철학 : “어차피 이해 안 되쥬? 읽어도 모르쥬? 이해 안 되쥬? 어쩔티비? 저쩔티비? 안물티비? 쿠쿠루삥뽕 지금 화났쥬? 개킹받쥬? 그냥 화났쥬? 눼~~알겠섑니댸.”

     

출처: snl 쿠팡플레이
출처: snl 쿠팡플레이

‘어쩔 철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요즘 젊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이런 관념들이 스쳐 지나간단다. ‘어쩔’이란 ‘어쩌라고’라는 표현에서 파생된 말이다. 가깝게는 대화의 단절과 정서적 불통, 멀게는 냉소주의와 허무주의의 토양 위에서 성장한 낱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이 시대와 철학이 처한 상황을 잘 말해주는 낱말 같다. 철학 바깥의 사람들은 철학에 전혀 관심이 없고, 내부 사람들은 소통의 제스처만 취할 뿐 내심 무식한 대중을 무시한다. 이 글을 두고 아마 철학 안팎에서 모두 이렇게 외칠 것이다. 어쩔 철학!


생은 난감하게 시작된다. 삶의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그냥 내던져진다. 갓 태어난 아이가 미소 대신 울음을 터트리는 이유다. 기기묘묘한 세상과 난맥으로 뒤엉킨 인간관계, 게다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도래. 철학은 줄곧 이런 난감한 문제들을 다뤄왔다. 철학의 난해함은 일차적으로 다루는 ‘문제의 난감함’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언어학자는 언어가 무엇인지, 생물학자는 생명이 무엇인지, 의학자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철학자에게 의뢰한다. 요즘 핫하게 주목받는 AI 전문가는 자기의식을 가진 AI(강한 인공지능)를 논하면서 ‘자기(self)’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잘나가는 분과학문의 학자들은 항상 바쁘기만 하기에, 중요하지만 난해한 문제를 성찰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은 모두 철학자에게 떠넘긴다. 아무도 관심 없는 난해한 문제들을 혼자 떠안고 난감해진 철학자는 속으로 외친다. “나보고 어쩌라고?” 하지만 진정한 철학자라면, 그런 난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이기에. 난제와 씨름하는 것을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진짜 철학자다. 이런 점에서 어쩔 철학이다.


헤겔은 철학이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 기준에서 본다면 ‘어쩔 철학’은 이 시대의 정신을 온전히 담고 있는 말이라 하겠다. 다만 나는 어쩔 철학에 담긴 ‘어쩌라고’를 ‘어쩌자고’로 바꾸기를 제안한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 철학이 경박한 느낌의 ‘어쩔 철학’이라 불려도 상관없다. ‘어쩌라고!’를 내뱉으며 냉소 짓는 우리 스스로가 처량한 신세임을 자각함으로써 자기 극복과 초월의 발판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한 가지를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내가 얄팍한 철학자인 줄 이전엔 미처 몰랐다. 한심해서 말문이 막힌다. 어쩌자고 요모양 요꼴이 되었을까? 어쩔 철학(The Philosophy of So What)!

‘어쩌라고’는 ‘어떻게 하라고’의 준말로서 ‘나보고 무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정도를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사용맥락의 측면에서는, 대화 상대자의 (대개는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중단시키려는 의도로 받아치는 화법을 가리킨다. 즉 상대의 어안이 벙벙해지는 침묵을 유도하는 화법이다. 유명인사로 추정되는 노래 속 화자는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중을 향해 ‘어쩌라고’로 되받아친다. 익명의 소문, 숙덕질, 여론을 대하는(유명인뿐만 아니라 SNS를 사용하는 모든 이의) 간편한 대응 방법이다. 말참견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창이다.


대화 상대자의 불분명하고 핵심에서 어긋난 말들이 때론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말들이 계속 이어지면 청자는 부담스럽다. 말 안에 딱히 지시하고 명령하는 표현은 없지만, 듣는 이는 알 수 없는 압박을 받는다. ‘어쩌라고’는 상대방의 말에서 막연한 요구를 감지하고 그것에 즉각 반발하는 감정 표출이다. ‘무엇을 하라!’(‘-라’는 명령형 어미다)고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냐며 되묻고 따지면서, ‘어쩌라고’의 화자는 상대의 어투에 함축된 명령/강요조에 대한 강한 불쾌감을 표현한다. 동시에 ‘어쩌라고’는 짜증을 냄으로써 상대의 화를 돋우는 언표이기도 하다. 좋게 봐준다면, 인용된 노래에서처럼 오지랖 넓은 사람들의 간섭을 막아내는 튼튼한 방패다.


청자(聽者)의 입장에 서 보면, ‘어쩌라고’를 듣는 즉시 말문이 턱 막힌다. 하던 이야기를 더 진행할 수 없다. 가시 돋친 억양의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짜증을 거침없이 쏟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권력 서열의 윗자리를 차지하든가 최소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아무에게나 ‘어쩌라고’를 내뱉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가 무시당했다고 느끼기가 쉽다. 그래서 그것은 듣기 불편한 말, 무례한 언사다.

이 표현을 애용하는 사람은 대화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지 못한다. 도리어 상대의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 선을 넘는 요구, 은근한 책임 전가 등에 화만 치밀어 오른다. 저 입을 틀어막고 싶지만 물리적인 폭력을 써서 그럴 수는 없기에, 그만한 위력을 가진 언어를 찾는다. 그래서 고안된 표현이 바로 ‘어쩌라고’다.


‘어쩌라고’라는 기호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소통 단절을 읽어낼 수 있다. 단절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르시시즘에 있다. 타자 사랑과 호환이 불가능한 자기 사랑, 그 병적인 나르시시즘이 ‘어쩌라고’를 외치고 있다. 이런 나르시시즘은 공동체적 관계망을 붕괴시킨 근대 개인주의적 원자화·도시화와 연동되어 있고, 돈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며 미친 듯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와도 관련되어 있다. 돈 외에는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궁핍한 시대의 허무주의 및 냉소주의와도 연관되어 있다. 요컨대 ‘어쩌라고’는 현대적 삶의 구조에서 파생된 대표 화법이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 살면서 이 말을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다. 또 내뱉지 않기도 무척 어렵다. ‘어쩌라고’는 이 시대가 빚어낸 어쩔 수 없는 필연의 부산물이다. 이쯤해서 다시 글을 읽는 독자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어쩌라고? 혁명이라도 하자고?”


나는 소박한 해법을 제시하고 싶다. ‘어쩌라고’를 ‘어쩌자고’로 바꿔보자고 말이다. 단지 자음 ㄹ을 ㅈ으로 바꾼 것뿐인 데도, 어감이 확 바뀐다. 명령형 ‘-라’를 청유형 ‘-자’로 고쳐 말하자.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은 명령이 아닌 청유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청유형 어미는 해당 문제를 우리 모두의 사안으로 만든다. 운명 공동체임을 전제하고 대화를 이어가자는 뜻이 담겨있다. ‘어쩌라고’의 주체가 나르시시즘의 ‘나’에 갇힌 형국이라면, ‘어쩌자고’의 주어 자리는 열린 장소다. 그 자리에 ‘나는, 너는, 그는, 그것은, 우리는 어쩌자고…’ 등의 표현이 모두 가능하다. 예컨대 진은영의 시 「어쩌자고」에는 인간과 함께 다양한 사물들이 ‘어쩌자고’의 주체로 등장한다.

     

어쩌자고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는지.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 검은 버찌나무 위의 가을로 날아가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 17쪽. 


이렇듯 ‘어쩌자고’의 발화자는 관련된 것들의 공동체를 전제하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안을 공동의 문제로 인식한다. ‘어쩌라고’를 ‘어쩌자고’로 바꾸는 정제의 동력원은 사랑이다. 사랑의 불길로 증류된 감정이 시적 언어에 담긴다. 이런 점에서 ‘어쩌라고’에는 없지만 ‘어쩌자고’에는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어쩌자고’에 내장된 사랑은 대화 상대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것에게까지 두루 미친다. ‘어쩌자고’의 발화 주체는 사랑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사랑스럽지 못한 것까지 사랑한다. 대책 없고 난감한 상황마저 밀쳐내지 않고 끌어안는다. 예나 지금이나 시(詩)란 속수무책인 세계와 냉혹한 운명에 직면해 속절없이 사랑의 기도만을 봉헌하는 언어(言)의 사원(寺)이다. 그리고 기도의 첫 일성이 바로 ‘어쩌자고’다.

     

** 이 글은 『현대시학』(621호, 2024)에 실렸던 「어쩌자고 ‘어쩌라고’를 남발하게 되었나」의 일부를 ‘어쩔 철학’이란 개념으로 확장한 것임을 밝힌다.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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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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