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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으로 수다 떨기: [자기 생성과 인지] / 박성관

최종 수정일: 2023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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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부터 노버트 위너의 걸작 [[사이버네틱스]]를 가지고 대안연구공동체에서 강의(총 6강)를 하고 있다. 1948년에 출간된 이래, 워낙 세상에 끼친 영향이 컸고 또 앞으로 그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는 책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강의에 관심을 표했다. 그 결과, 대안연(등 이런 인문사회계 단체)의 보릿고개로 꼽히는 이 황폐한 초겨울에 나름 흥행에 성공했다. 물론 ‘나름’ 선방했다는 거지 무슨 대박 같은 건 전혀 아니다. ^^; 참여하시는 분들중에는 오래전부터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지능 등에 관해 공부를 해오신 분, 조만간 논문이나 저작을 쓰게 될 분들도 있다. 아무튼 수강자들 다수가 강사인 나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하신 눈치다. 그럼 그런 분들이 굳이(?) 강의를 들으러 오신 이유는 뭘까? 1차적으로는 이 책이 꽤나 난해하여, 아무리 박식하더라도 모든 장들의 주제에 다 빠삭하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또 심오한 통찰력이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번득이기 때문에, 혼자 읽어오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논의할 필요를 느끼시기도 했으리라. 내가 이 강의를 열길 정말 잘했구나!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대략 이런 상황들 때문이다. 이런 장이 열리지 않았다면 각자 고생하며 읽다가 많은 이들이 중도 포기해 버렸을 테고, 설령 힘들여 겨우 다 독파했다 해도 딱히 함께 얘기해 볼 사람들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나도 처음 해보는 주제의 강의라 여러모로 버벅거리지만, 이 분들을 위해 장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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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원래 더 중요한 관심 주제는 오토포이에시스 또는 자기 조직화다(보아하니 요즘은 ‘오토포이에시스’ 대신 대략 ‘자기 생성’으로 번역되는 분위기다). 움베르또 마뚜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공저로 세계적으로 힛트를 친 [[앎의 나무]]라는 책 말이다. 1995년에 번역되었지만 얼마 뒤 절판되었고, 그래서 나는 복사해서 2001년에 셈나 동료들과 함께 읽었다. 그리고 책 속표지에는 2016년 8월에 재독했다고 메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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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출간 당시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이상하게도 그 뒤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나는 종종 이 두 학자와 이쪽 노선에서 무슨 신간 나온 게 없나 종종 궁금했지만 특별한 게 나와주진 않았다. 나온 게 아예 없진 않았다. [[있음에서 함으로]], [[윤리적 노하우]], [[몸의 인지과학]] 등이 나왔지만 [[앎의 나무]] 만큼의 강력한 펀치는 영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첫째, [[윤리적 노하우]]는 최근에 샀고 아직 읽지도 않은 상태다. 그러고 보니 둘째, [[몸의 인지과학]]은 2016년에 사서 다 읽었는데 이게 2004년에 사서 1/5 정도 읽었던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와 같은 책이라는 건, 이번에 알았다. 제목이 바뀌어 새로 출간된 책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읽었다니, 몰랐다는 사실도 7년 만에 알다니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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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복사해 둔 영어책 [[Autopoiesis and Cognition]]이 있었다. 첨엔 무슨 책인지도 정확히 모르고 그저 마뚜라나와 바렐라가 지었다고 적혀 있으니 막연히 [[앎의 나무]]의 영어본인데 국역본 나올 때 제목을 [[앎의 나무]]라고 했나 보다 했다. 집에 있으니 심심할 때 가끔 열어보곤 했는데, 이상하게 한 두 페이지를 넘어가지 못했다. 잘 읽히질 않았다. ‘내가 피곤한가?’, ‘영어라서 그런가’ 뭐 그러다 말고 그러다 말고 하다 보니 긴 세월이 흘러버렸다. 언젠가부터 이게 [[앎의 나무]]와는 다른 책이라는 감을 잡았고, 또 [[앎의 나무]] 같은 대중적 입문서(?)가 전혀 아니라는, 그러니까 뭐랄까 본격적인 논의가 펼쳐진 책이라는 느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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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월간지 <現代思想>은 내 공부길이 끊어지려 할 때마다 계속 길이 이어지도록 징검다리를 제공해주고 또 나를 끊임없이 격려해 전진하게 해주어온 소중한 텍스트다. 이 월간지의 2001년 10월호 특집 ‘오토포이에시스의 원류’가 시들어가던 나의 오토포이에시스에 대한 관심에 다시 불을 당겼다. 어떻게 된 일인가? 우선, 이 10월호는 당시 갑자기 사망한 프란시스코 바렐라를 중심으로 꾸려진 특집호이며 지난 달 칼럼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이 월간지의 서두에 실린 대담 ‘마음과 몸의 포이에시스’에 보면 가와모토 히데오(河本英夫)의 기이한 이야기가 술회되어 있다. 참고로 [[Autopoiesis and Cognition]]의 국역본 [[자기 생성과 인지]](갈무리)의 일러두기에 보면 우리 번역본의 역자가 가와모토의 일역본 [[오토포이에시스 – 생명 시스템이란 무엇인가]](東京 : 国文社, 1991)를 참조했다고 적혀 있다.

가와모토의 일화는 이 책의 번역 과정에 얽힌 이야기다. 짧게 줄여 말하면 번역할 때 죽도록 고생했다는 얘기다. 내용이 너무 비현실적이랄까 표현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경우들이 있어서, 아~ 이건 정말이지 잘못 쓴 걸거야, 최소한 우리 독자들(즉, 당시의 일본 독자들)에게는 말이 되게 번역해줘야지 하면서 의역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원서와는 다른 번역도 감행했다고 한다. 그렇게 했음에도 출판사에서는 도저히 못 알아먹겠다고 불평하며 빨간줄이 불그죽죽 선혈이 낭자하도록 그어진 교정지를 보내오곤 했다. 그런 시간들이 계속 이어지다가 가와모토는 어느날 급작스런 깨달음이 왔다. 자신은 그동안 이 책의 내용과 문체에 대해 거대한 오해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고쳤던 대부분의 대목들이 완전 오역이었다는 깨달음. 그뒤 몇 주간 식사와 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아프기도 했으며 등등의 시간을 거쳐 온전히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온 것은 몇 년 뒤였다고 하는, 하도 리얼하게 말해서 쌩 거짓말일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믿기 힘든 기이한 이야기였다. 원래 영어로 쓰인 책이 독일 독자들을 위해 독일어로 번역되는 이례적인 사례 중 하나였다는 얘기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독일 독자들에게 독일어 번역본이 출간된 게 뭐 이상하냐, 싶으시겠지만, 독일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영어를 하도 잘해서 현실적으로 영어책을 굳이 독일어로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뭐 분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인데 1980년에 나온 영어책이 1892년에 독일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왜? 영어로 도저히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마뚜라나와 바렐라가, 아니면 마뚜라나만(?) 영어를 그닥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래저래 이야기가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아무튼 그렇게 적혀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일화들을 보고 “아~ 이 책은 꼭 영어로 독파해야겠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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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네틱스> 강의를 하면서도 나의 관심은 6개월 뒤쯤 이 책(물론 영어본)으로 하드한 강의 혹은 집중 세미나를 할 계획에 뭉게뭉게 가슴 설레고 있었다. 힘들긴 하겠지만, 열심히 해서 뭔가 큰 성과를 얻어야지 즐거운 다짐도 했다. 수강생들에게 살짝 그런 계획을 비치기도 했다. 한데 <사이버네틱스> 강좌에 참가중이신 한 분이 글쎄 이 책의 국역본이 <자기 생성과 인지>라는 제목으로 최근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셨다. 이번 달인 11월 3일 출간! 짜잔! 오호~ 이게 웬 복이람?! 그럼 굳이 영어본으로 고투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냐?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치만 .... 번역이 잘 되었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에이~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은 했겠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없는 것보단 최소한 낫지 않겠나 싶었다. 하지만 유명한 학자이기도 한 일역자의 신비 체험을 읽은 적도 있고 해서 우리 국역본이 어떨까 심히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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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니 내 걱정은 기우였다. 기뻤다. 하지만 다른 방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걱정의 출현! 기우였다는 건 번역본의 번역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짚어두자면, 좀 긴 영어 문장들을 대부분 두세 문장으로 번역하였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한글 독자들에게 이 배려는 70, 80%는 좋은 효과를, 10, 20%는 나쁜 효과를 낼 듯하다. 그럼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읽고 있냐? 번역본을 주욱 읽어가다가 가끔 어색한 단문들을 만나면 영어책을 펴고 확인해보는 정도로 읽어나가고 있다. 요컨대 큰 문제는 없는 것이다. 번역 품평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한 김에 덧붙이자면 성실한 번역이지만 훌륭한 번역인지까지는 모르겠다. 영어로 일독을 해보지 않은 관계로 이 이상의 평은 삼가기로 하겠다. 갠적으로는 나쁜 번역이 아니라 참으로 다행이다, 라고 기뻐하고 있다. 중요한 책이 어찌해볼 방법이 없도록 나쁜 번역으로 출간되었을 때의 그 낭패스럽던 기억들, 아~ ! 그런 번역본이긴커녕 최소한 괜찮은 번역이라니, 천만다행이다. 특히 어려운 텍스트를 다루는 강의를 할 때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는 번역본이 있다는 건 거의 천복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주 일욜엔 갈무리 출판사에서 마련한 출간 기념 역자와의 만남이 줌으로 열린다(12월 3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그 전엔 다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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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참으로 이상한 건, 일역자인 가와모토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라고 했던 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3 넘게 읽은 현재 스코아 그러하다. 그래서 가와모토의 일화를 다시 찾아보았다. 흠... 맞아, 내 기억이 틀린 게 아냐, 역시 이랬어, 그의 일화는 솔직히 100% 이해는 안 돼. 다시 읽어보니 대략 이런 심정이 되었다. 대체 그가 무슨 얘길 했길래... 하며 여러분도 궁금해하실 거 같아 좀 길지만 번역해 인용해보겠다(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최근 루만 때문에 새로 유명해진 ‘작동적 폐쇄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야기다). 읽고나면 가와모토의 술회와 나의 말이 모두 얼추는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달 리뷰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원래 쓰려던 내용이 반은 더 남았는데, 글이 넘 길어져서 그건 담달에 보기로 하자.

“나는 바렐라와 마투라나에서 시작된 오토포이에시스라는 구상에 대해 씨름하고 있었는데, 이해에 가장 큰 난관이었던 것은 ‘입력도 출력도 없다’라는 사태로, 그들의 원전을 번역하고 있던 때에도, 스스로 생각할 때에도 대단히 괴로웠던 것이다. 괴로워한 이유는 간단한데, 입력도 출력도 없다는 것은 통상은 폐쇄계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예를 들어 뇌의 신경세포가 뇌 안의 신경교세포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있다는 것 등을, 전문 신경생리학자인 바렐라와 마투라나가 모를 리 없다. 뉴런은 단독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영양의 보급을 받고 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알고 있는데 ‘입력도 출력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토포이에시스의 생명의 특징은 ‘개체성’, ‘단위성’, ‘경계의 자기 결정’, 그리고 ‘입력도 출력도 없다’, 이렇게 네 가지다. 이 중 첫 세 가지는 상식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외부의 자극이나 다양한 외적 작용에 대해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는 것이 개체성이고, 외부에서 공급받은 영양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 단위성이고, 또 면역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물체에 대해 이물질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정한다는 의미에서 경계는 자기 결정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시스템에는 ‘입력도 출력도 없다’라는 말이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아까 말한 개체성도 단위성도 경계의 자기 결정도 모두 입력, 출력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입력도 출력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에는 고유성이 있다, 라고 하는 이해 방식으로 되어 있다. 한데 만일 이런 얘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첫 세 가지 특성의 전제를 무너뜨려 버리게 되는 셈이다. 만일 입력도 출력도 없지만 정합적인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보자면, 처음 세 가지도 전혀 다른 의미여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통상적인 의미로 생각했던 것은 죄다 틀렸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생각하다 보니, 번역을 하던 때에는 교정지에다가 담당자로부터 노여움을 살 정도로 교정을 가하여 ‘입력도 출력도 없다’라는 것을 통상적인 의미로는 이해가 안 되니까 어떻게든 이해가 되는 형태로 만들어 보겠다고 작업을 했던 것이다. 정확히 번역을 출간했던 해의 6월경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초고 교정지 작업을 하면서 점심 무렵 전갱이말림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먹다가 갑자기 뭔가 번득이더니 먹은 걸 전부 토해버리고 인근에 있던 방으로 가서 헐떡거리면서 2시간 정도 뒹굴었다. 그때 모든 걸 다 알아버렸다, 라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알 수 있는 형태로 만들려고 그때까지 애써온 일들이 모두 헛수고였다, 모두 틀렸다, 라는 것이 돌연 분명해졌다.

뭔가 새로운 입력이 들어온 게 아니다. 아무것도 새로운 입력은 들어오지 않았는데,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는 사이에, 뭔가 돌연, 어느 날, 알아버린다. 그리고 알아버렸을 때 일거에 죄다 바뀌었다고 할 정도의 변화가 온다. 그것은 다른 인간으로 되어버렸다는 느낌의 변화다. 이 느낌에 익숙해지기까지 처음 수습이 며칠 걸리고, 감취(感取)한 변화가 무엇인지가 나에게도 이해되기까지 몇 개월, 전면적으로 친숙해지고 그래서 매일의 생활이 가능해지기까지 3년 가까이 걸렸던 기억이 있다.

단, 어떡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고 무엇에 휘말렸는지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알 수 없는 바가 있었다. 그때 일어난 변화를 겨우 이해한 위에서 수습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1, 2년의 일이다.

오토포이에시스의 이론상 문제를 말하자면, 바렐라, 마뚜라나가 구상한 것에는 엄청난 불연속적 비약이 있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것으로부터의 불연속이 아니라, 구상 자체 안에 일반적으로는 아무래도 연결되지 않고, 한데, 그들은 그것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었다. 게다가 그게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복수(複數)였다.

“입력도 출력도 없다”라는 것은 비둘기의 신경생리학적 실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비둘기에게 색종이를 보이고, 망막에 전극을 끼워 전위(電位) 변동을 잰다. 그런데 색에서 유래하는 빛의 파장에 대응하는 전위 변화는 전혀 없다. 물리적 자극과 생리학적 반응 간에는 전혀 대응 관계가 없다. 이 문제가 계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받아안아 정식화되었을 터인 시스템의 메커니즘은 운동이 계속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토포이에시스의 정의다. 요컨대 포착된 문제와 무관계한 답변을 그들은 내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외의 해답은 없다는 답변을 갖고 있던 것이다. 이 확신이 아마도 어딘가 일관성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출된 것은 불연속적인 비약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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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기 생성과 인지]]>를 1/3 너미 읽었다. 마뚜라나와 바렐라가 등장하고도 몇십 년이 지났고, [[앎의 나무]]를 포함해 몇 권의 책과 여러 해설 논문과 아티클들을 읽은 상태에서 독서중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런 다양한 번역 및 소개 활동의 가장 초기 참여자였던 가와모토 선생은 나와는 처지가 무척 달랐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의 술회가 그에 대한 나의 감상과 크게 상반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 ‘자기 생성’론의 핵심은 지금도 통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라는 점이다.

다음 달 칼럼에선 이들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사유가 어떤 점에서 나카자와 신이치의 󰡔곰에서 왕으로󰡕와 오버랩되고, 윅스퀼의 [[동물들의 시선에서 본 세계]] 및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캠벨의 [[생명과학]] 및 현대 뇌과학과 함께 읽어야 하는지 써보겠다.



박성관(독립연구자, <분해의 철학>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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