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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영원히 현재로 오고 있다: 정여름론 /오영진

작성자 사진: 한국연구원한국연구원

최종 수정일: 2023년 5월 25일

10여 년 전 군대에서 일이었다. 휴가 잘린 상병 하나가 군대 내 pc방에서 뭔가를 클릭하고 있었다. 뭔 일인가 해서 살펴보니, 그는 다음 로드 뷰를 통해 자신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이렇게 하면 집에 간 것 같아 기분 좋아" 가상으로 즐기는 휴가를 (속으로 조롱하며) 이해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보고 있는 장면은 최소한 수개월 혹은 몇 해 전의 과거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소위 메타버스 시대가 열리며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고 있다. 하지만 중첩은 오로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지는 않는다. 수년 전의 현실이 가상의 영역으로 옮겨져 압도적인 시뮬라크르를 구성하고, 그 가상은 지금의 현실과 뒤죽박죽 뒤섞인다. 가상과 현실의 중첩은 필연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중첩도 야기한다. 데이터화된 과거가 영원히 현재와 섞이는 기술, 그것이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메타버스의 실체다.


정여름의 단편영화이자, 시각예술 작품인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과 <긴 복도>(2021)는 이러한 중첩 과정에서 겪는 미확인의 공간과 인물들, 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 <그라이아이>는 화자이자 작가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한다. 데니오(Dino), 에뉘오(Enyo), 펨프레도(Pemphredo) 세 자매는 그라이아이(the Graeae)라 불리며 하나의 눈을 공유한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하나의 눈에 세 개의 시각을 담는다. 이 중 전쟁의 여신, 에뉘오는 두 자매 몰래 눈을 들고나왔고, 화자는 에뉘오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전쟁광 에뉘오의 관점을 중심에 두지만 다른 두 자매의 시점도 중첩되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GO를 한다. 포켓몬 GO는 GPS 정보를 기반으로 현실 공간에 게임 공간을 혼합해, 길을 걷다 특정한 포인트에서 몬스터들을 만나고 대결해 포획하는 게임이다. 유저들끼리 결투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체육관이라 부른다. 이러한 체육관은 보통 역사적 상징물이 있거나 교회와 같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에 지정되며, 대개는 플레이어들의 요청으로 선정된다.

영화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의 한 장면. (C)정여름.

화자는 근처에 있는 체육관을 향하다가 미군기지 앞에서 멈춘다. 그곳은 분명 게임 속에서 10여 개의 체육관이 퍼져 있는 지역이지만, 정작 사전신청을 하지 않은 자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 작가의 탐구는 시작된다. 이 지역은 왜 존재하고,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포켓몬 GO의 GPS 시스템을 해킹해 가상으로 미군 기지 안으로 화자는 침투한다. 이제 화자는 인터넷 도처에 흩어진 이미지와 정보를 추적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간다. 이 점이 정여름 작업의 특이한 점인데, 네트워크에 흩뿌려진 과거의 편린들만을 사용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그 빈틈을 만들고 허구적인 이야기로 채운다. 그는 콜라주적 조립 방식의 풋티지 필름의 약점을 사변적(思辨的)으로 돌파한다.

화자는 미군 용산 기지 터에 일제가 러일전쟁(1904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주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후 미군의 주둔 기간까지 무려 114년 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땅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곳은 구글 맵에서도 그저 녹지로 표현되는 비밀의 공간이었으며, 존재하지만 갈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여기에 더해 화자는 미군 기지 내 미군들의 삶을 추적한다. 그들은 향수병을 군사적 장애로 규정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미군 기지의 인테리어와 건물 디자인을 철저히 유사 미국화시킨다. 카페테리아는 본토보다 더 실감 나게 입주해 있으며, 거리의 건물은 낮다. 그들은 자신의 유년 시절 겪었던,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미국적 삶을 기지 안에서 즐긴다.


미군 기지 앞에서 포획한 포켓몬과 114년 동안 개방되지 못한 땅, 할리우드와 같은 세트 장에서 살아간 미군 사이 무엇이 더 가상적인 경험의 결과물일까? 정여름은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에 있다"고 말한 장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역전시켜 보여준다. "포켓몬 GO는 실제의 식민지, 한국을 드러내고 미군의 이데아를 폭로하기 위해 거기에 있다". 게임적 알고리듬에 대한 예술가의 무기화 전략이 돋보인다. 증강현실을 탑재한 눈과 인터넷 아카이빙 탐색 덕에 역사는 오히려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점에서 가상현실은 가상적인 무엇을 생산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현실의 잠재되어 있던, 그러니까 분명히 존재했지만, 우리의 의도적 망각으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소환되는 기술로 자리매김한다. 정여름에게 가상은 모방이나 이본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들의 다른 말이다. 작가는 이 잠재적인 유령들을 소환하는 영매다.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기보다는 과거 현실의 데이터들이 한편으론 가상화되고, 또 한편 지금 여기와 중첩되는 것이 유령의 출몰 조건이 된다.


"기록은 현실에서는 사라지지만 가상의 세계에서는 잔존한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중.


영화는 초반 한 게이머의 역사적 탐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다가 미군이라는 전쟁기계의 이데아와 음모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장르로 전환된다. 작품의 몽환적이고 으스스한 BGM은 이러한 모드 전환의 장치들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작가 자신의 눈, 시각적 경험을 의심하며 반성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에세이처럼 보인다. 인터넷 내외부 공간을 산책자처럼 걸으며 탐구하고, 키치적인 요소에서 숭고한 요소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방식은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21세기 한국에 도달했다면, 바로 이러한 작업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일으킨다.

<그라이아이> 이후의 작업 <긴 복도>에서 작가는 구글어스 기술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만든다. 이 유사지구는 실제 지구와 병존한 지 16년째다. 사실 지구 이미지를 스캐닝한 지는 무려 37년이나 지났고, 지금 구글어스는 우리를 1984년으로 데려다주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 [구글어스]라는 기계가 선물한 시간여행의 신비함과 마법성을 작가는 장르적 문법으로 소화한다. 영화는 마치 오컬트 영화의 오프닝처럼 사람들이 떠나간 미군기지 건물 안에서 사라져간 영혼을 불러오는 휘파람을 불며 시작한다.


화자와 작가가 비교적 일치된 지난 작품과 달리, <긴 복도>에서는 가상의 캐릭터들이 혼재하며 대화를 나눈다. 이 캐릭터들은 이시도라와 페도라, 린지, 정, 도시 마더 등의 인물로 각기 작가와 현실에서 모종의 관계를 맺거나 영향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데도 이국적이면서 신화적인 작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명확한 전후 맥락의 이야기보다는 각각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짧은 단편소설의 형태로 제공해서 캐릭터성을 보충하고 있다. 작가는 이제 관객도 영화 안팎에서 단서를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듯 보인다. 탐정 되기는 정여름의 주요한 방법론이다. 탐정은 집요하고 편집증적이기에 모든 단서를 연결하고자 한다. 본래 연결이 안 되는 촌수가 먼 것마저도. <긴 복도>가 <그라이아이>와 다르게 소박한 풋티지 필름이 아니라 완벽히 사변적인,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구축된 허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구글어스에는 놀랍게도 각국의 미군들이 사용하는 ATM 기계에 대한 위치정보가 남아있다. 이는 포켓몬 GO의 체육관처럼 그들이 거주했었음을 보여주는 유령의 흔적이다. 놀이와 금융은 실제의 정치로도 가릴 수 없는 이 세계의 강고한 법칙처럼 보인다. 돈의 흐름은 미군기지의 배치 속에 있으며, 어쩌면 미군의 흐름이 돈의 배치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영화는 보여준다. 이 점에서 <긴 복도>는 <그라이아이>의 서울 용산이 아니라 전 지구적 단위에서 가상성을 확대해 전쟁기계의 의지를 탐구하고 있다. GPS 측정과 위성사진 촬영술 등으로 구성된 가상의 지구가 최초에는 전쟁기계의 한 요소로서 발명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영화 <긴 복도>(2021)의 한 장면. (C)정여름. 실제 작가의 조부로 판단되는 작중 인물 페도라가 찍은 기념사진을 인공지능의 시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작가는 행복은 어디에 있고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기계적 시선을 통해 던진다.

<긴 복도>의 마지막 장면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행진하는 태극기 부대를 CCTV의 시점에서 조망하며 끝난다. 작중 인물 이시도라의 행복은 박근혜가 감옥에서 나오는 것, 큰 나라인 미국과 잘 지내는 것이다. 한때 미군 기지 건설을 위해 생활 터전에서 내쫓겼지만, 미군기지 근처에서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던 이시도라는 전쟁기계에 학대받으며 동시에 기생해 왔던 존재다. 그녀의 행복은 전쟁기계인 미국의 욕망을 대리하는 데서 나온다. 이 점에서 <긴 복도>는 구글어스의 시각으로 미군을 관찰한 거시적 분석처럼 보이지만 그 주변부에서 기생한 존재들에 대한 미시적 접근도 놓치지 않고 있다.

정여름의 작품은 논리적이면서 동시에 비논리적이다. 탐구대상에 대해 집요한 탐색과 정리를 시도하지만, 어느 순간 빛나는 직관으로 그 레이어를 뚫고 다른 층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포켓몬 GO에서 식민지의 역사를, 구글어스에서 전지구적 전쟁기계의 의지를 읽어내려는 그의 작업은 다큐멘터리와 풋티지 필름의 가면을 쓴 눈먼 예언자의 적중된 예언처럼 보인다.


현재로서는 추리와 미스터리의 장르적 문법을 차용하고 있는 정여름이 어떤 서사 전략을 세워 다음 작품을 만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영원히 현재화되는 과거의 데이터들 사이에서 성좌를 그어 특정한 이야기를 만드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 시대, 예술가의 눈에는 유령들이 잘 보이는 편이고, 그것은 그가 하나의 눈에 세 개의 현실을 중첩해서 인식하는 분열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보고 탐색하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가 다음에는 어떤 유령을 데려다줄지 기대가 크다.


*이 글은 2021년 <뉴 래디컬 리뷰> 창간호에 실린 비평문을 웹진에 맞게 다시 개고한 것입니다.


오영진(서울과학기술대학교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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