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更張은 경장인가, 갱장인가? / 노관범
언젠가부터 학문 공동체의 학술 글쓰기에서 한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술지 논문의 본문은 한글로 쓰고 각주에서 한문 원문을 밝힌다. 논문 본문에 한문 사료를 열거하고 입론을 전개하는 옛날 방식은 요즈음 찾아보기 어렵다. 본문의 한자는 가급적 한글로 변환해 주거나 괄호를 쳐서 병기해 준다. 이는 가독성 때문이다. 본문 중간 중간에 한자가 튀어 나오면 잘 읽다가도 흐름이 끊길 수 있다. 여기에 학술지 논문의 분량 제약도 한몫 한다. 투고 논문의 분량을 줄이는 좋은 방법은 본문에서 한자 병기를 삭제하는 것이다. 각주에서 출처만 밝히고 한문 인용을 생략해도 효과적이다. 학술지 논문에서 한자가 사라지는 현상은 때로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일으킨다. 한자의 독음이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일 경우 그것의 한글 표기가 정확한지 점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예전에 한자를 쓰면 그만이었던 시절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문제이다. 예를 들어 1

한국연구원
Apr 13 min read


전쟁에 관하여 - 정치와 윤리 사이 / 김동규
어느 날 선배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고지식하게 도덕에 얽매인 내가 조금 한심해 보였던지, 그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내 생각엔 ‘살인하지 말라’는 것 딱 하나만 지키면 된다네, 나머지는 너그럽게 넘어가도 괜찮다네.” 이 말은 최소한의 윤리적 원칙만 지키며 살아도 별 문제 없다는 뜻을 함축한다. 도덕법칙을 우상 숭배하는 율법주의자가 도리어 자신과 타인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 경우를 고려한 말이라고 이해된다. 평생 반듯하게 살아오신 분의 함구 끝에 나온 말이었기에 울림이 컸다.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는 이 분에게도 ‘살인하지 말라’라는 윤리적 마지노선은 존재했던 것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것마저 없는 상태, 윤리의 최후 보루마저 무너진 상태가 바로 전쟁이다. 지금 전쟁이라는 핏빛 전염병이 지구촌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어리석은 인류는 세계 대전의 참담함을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전쟁의 한복판에

한국연구원
Apr 14 min read


계약의 도시, 서울 -경험은 넘치고 삶은 유예되는 곳 / 김보슬
서울에서의 삶은 현재보다 다음을 먼저 계산하게 만드는 구조 위에 놓여 있다. 계약 만료 시점은 단순한 일정이 아니라, 다음 거처를 준비해야 하는 기점이 된다. 지금의 생활은 언제나 이후의 이동 가능성을 전제로 이해된다. 이 도시에서 집은 더 이상 삶이 축적되는 기반이라기보다, 일정 기간 유지되는 조건에 가깝다. 거주는 지속이라기보다 갱신에 가깝고, 정착이라는 말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 그래서 서울에서의 삶은 ‘사는 것’이라기보다, 특정 상태를 일정 시간 유지하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이 감각은 단순히 주거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 전반과 연결되어 있다. 경험으로 소비되는 도시, 서울 서울은 지금, 어느 때보다 매력적인 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외국인에게 서울은 더 이상 관광 콘텐츠를 소비하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보고 싶은 목적지가 되었다. 최근 BTS의 컴백 공연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

한국연구원
Apr 14 min read


한국사 사료 총서의 지성사 - 매천야록(1955)에서 삼봉집(1961)까지 / 노관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1집은 1955년 삼일절에 발간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매천야록? 뜻밖이다. 매천야록은 ‘야록’이다. 야록이 사료, 그것도 한국사료총서의 제1집에 어울리는 글인가? 이선근(국사편찬위원회장 문교부장관)의 서문을 들어보자. 이 책은 ‘고종과 척신의 난정’, ‘탐관오리의 비행’,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악행’을 규탄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왜적과 투쟁하다 쓰러진 의병과 의사’를 기록한다. ‘일제의 간계와 중국과 러시아의 흉계’를 폭로한다. 이야말로 춘추필법의 역사서이다. 독자는 의분을 참지 못한다. 절로 애국심이 치솟는다. 그러하니 매천야록은 공공 분야(정치, 교육, 행정 등) ‘일반 인사의 교양서’이다. 중등 교육 ‘역사 교원의 참고서’이다. 간행 취지가 명확하다. 지금도 매천야록에 기대어 이승만 시절의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일은 없는지 의심할 일이다. 총서는 서문과 함께 사료 간행 경위를 알려주는 해설을 수

한국연구원
Mar 244 min read


분주한 3월 외톨이의 봄 - 은둔 고립 청년들의 삶과 쉼 / 강부원
3월은 늘 소란스럽고 분주하다. 학교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도 저마다 생기가 돈다. 캠퍼스에서는 어색한 긴장과 서툰 표정이 섞인 인사가 오가고 취업 시장도 상반기 공채 준비로 활기차게 들썩인다. 즉, 3월은 우리 사회 전체가 겨우내 묵은 먼지를 툭툭 털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엔진에 시동을 걸고 예열하는 시기다. 생동감 넘치는 풍경의 바깥 혹은 그 한가운데에서조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정지 상태로 머물러 있는 청년들이 있다. 등교도 출근도 모임도 끊은 채 방 안에 웅크린 채 살아가는 이른바 ‘은둔 · 고립 청년’. 새 출발을 뜻하는 3월이 누군가에게는 시작의 설렘이 아닌 꼭꼭 숨는 계절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못 본 체하고 있는 가장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렇듯 3월은 은둔자와 고립된 이들에게 외로움과 괴로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절이다. 은둔 고립 청년은 더 이상 일부 특이한 사례가 아니며

한국연구원
Mar 104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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