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양극화 / 최황
- 한국연구원

-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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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형과 비서울형의 양극
언젠가부터 서울시의 행정 언어에 '서울형'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서울형 청년 일자리', '서울형 복지'처럼 서울시 고유의 정책을 브랜딩하는 방식은 2007년경 오세훈 시장 1기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서울 중심적 사회 구조 안에서, 세상의 중심이 서울인 기형적 세계에서 도대체 서울에 특화된 형태라는 것이 무엇일까? 타 지역과 서울이 형태적으로 어떻게 다르며, 서울이 행정적으로 어떤 특이성을 띠기 때문에 이 '서울형'이라는 접두어가 필요한 걸까? 오늘날 서울과 서울 바깥 지역의 양극화를 바라보면서 ‘서울형’이란 표현을 단지 지방자치단체의 브랜딩 용어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이 접두어를 분석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울과 지역의 관계를 먼저 들여다 봐야 한다.
이제는 물류 시스템의 변화로 오늘 주문하면 내일 택배가 도착하는 건 당연한 시스템이 됐지만 한때 유명한 인터넷 밈으로 '옥뮤다 삼각지대'라는 게 있었다. 옥천 물류 허브와 버뮤다 삼각지대의 합성어로, 택배가 사라지는 마의 구간을 의미했다. 국토 중심부에 위치한 옥천 물류 허브는 CJ대한통운의 전국 택배 물량 대부분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그야말로 택배 시스템의 핵이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인해 배송이 지연되거나 며칠씩 멈춰 있는 현상이 곧잘 일어났다.
2010년대 이후로 옥천군 인근 고속도로나 국도에서 화물차에 의한 교통사고 사망률이 크게 증가했다. 물류 허브가 만들어진 이후 옥천군을 경유하는 화물차 수는 당연히 급증했고, 교통량과 사고 확률은 정비례 하므로 굳이 교통사고 수치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증가했음을 추정할 수 있을 테다. 중요한 건 전국 택배 물량 중 무려 70%가 수도권, 즉 '서울'로 향한다는 사실인데, 간단히 택배 추적만했을 뿐인데도 교통사고 증가, 환경 부담, 소음 공해 등 지역 주민이 일방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방의 작용은 가시화되는 반면 그에 따른 대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역학이 드러난다.
서울 사람이 오늘 주문한 상품이 내일 배송되게 하는 당연한 시스템은 이렇듯 지역의 희생을 담보로 작동한다. 그러나 ‘서울형’의 감각은 이런 문제에 가 닿지 않는다. 서울에서 최대한 먼 곳에 화력발전소를 만들어 전기를 끌어오거나 바다에서 모래를 퍼다 아파트를 짓는 일, 그 반작용으로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서울은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엄청난 규모의 발전소가 필요 없는 삼척 주민의 건강이 나빠질 미래도, 인왕산 부피의 모래를 퍼낸 후 신안의 해변 땅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을 서울형 비극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하는가? 아니라면 서울형이란 접두어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서울형 청년 일자리’와 지역의 일자리 제도를 비교하면 서울과 지역이 서로 얼마나 다른 세계를 만드는지 극명하게 보인다. 서울형 청년 인턴은 경영사무, 영업, 광고, 마케팅, 국제협력과 같은 직무가 정확하게 표기된 반면 수도권 이외의 지역들이 소개하는 청년 일자리 제도는 해당 지역 소재 제조업체 연계가 대부분이다. 서울이 제공하는 일자리의 다양성과 지역이 제시하는 제한된 선택지 사이, 그 간극의 공동에 "좋은 일자리는 서울에 있다"는 메시지가 메아리 친다. 생존자들이 모인 안전지대를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빈집에서 흘러나오는 좀비 영화의 클리셰처럼.

뿐만 아니다. 올해 법정 최저임금은 시급 기준으로 1만 30원이지만, 대구 경북지역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경우 여태 8년 전 수준인 7천원 정도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풍토의 고착이 심한 탓에 지난 7월에는 민주당 대구시당 주최로 최저임금 위반 대책을 위한 토론회까지 열렸다. 보다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고 싶다면 블라인드와 디시인사이드 중소기업갤러리를 비교하면 된다. 대기업 재직 인증을 마친 유저들이 올리는 연애 상담과 참치캔 선물세트를 소분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줬다는 명절 선물 인증은 서울형과 비서울형의 시공간이 얼마나 뒤틀린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비서울형'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우리는 동시대 한국 사회를 서울형 사고방식으로 오독하는 오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양극화
서울에 초집중된 구조적 불평등과 그로 인해 뒤틀린 시공간은 팬데믹을 거치며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다. 전통적으로 대학은 강의실, 연구실은 물론 복도나 학생식당, 동아리방 같은 '공동의 물리적 공간'을 토대로 학문 공동체로서 상호 학습과 윤리적 관계가 전제되는 장소였다. 하지만 팬데믹 시기의 대학은 원격으로 학사 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이 비대면 체제에서 새로운 관계 감각이 생겨났다. 영상의 해상도나 오디오의 품질, 온라인 플랫폼의 응답 속도 등을 골자로 하는 강의평가는 하나의 상품 리뷰처럼 변모했다.
소거된 접촉 경험은 신체 감각 기반의 신뢰 구조를 약화시켰다. 팬데믹 당시 관계는 텍스트-화면-데이터에 의존했고, 타인을 맥락 없는 정보 단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직접 만난 타인과 표정과 말투로 형성되는 육체적 감각이 만드는 신뢰가 축소되고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신뢰로 변했다. 택시 기사보다 카카오택시를 더 믿고, 유튜브 구독자 수를 신뢰도로 갈음하는 것처럼. 신뢰의 대체물로써 온라인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전환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팬데믹 기간 서울의 문화기관들은 조 단위 투자를 받아 온-오프라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구축했다. 박물관의 VR 투어, 미술관의 온라인 전시가 물리적 장소의 제약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됐으나 애초에 전국 시·군의 65%는 미술관이, 44%는 영화관이 없다. 서울은 디지털 옵션과 물리적 공간을 모두 누리며 오히려 시공간이 확장됐지만 지역의 시공간은 온라인으로 축약되거나 고립됐다. 원격 근무와 온라인 교육이 "어디서나 접속 가능"하다는 환상을 퍼뜨렸으나 실제로는 네트워크가 집적된 수도권이 기회를 독점했다.
지역 청년들은 이 변화에 더 취약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 대학은 학령인구 감소와 재정난으로 교육의 질이 저하되고 있던 탓에 "성공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내면화된 감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원격 근무-비대면 수업 체제는 "동시대의 세계에 어디서나 접속 가능"하다는 일시적 환상을 일으키다 말고 양극화를 가속했다. 여기에 고질적 일자리 부족과 임금 격차가 팬데믹을 거치며 심화되면서 오늘 지역 청년이 처한 어떤 환경은 '서울형'의 무엇으로부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졌다.
서울을 점프해 캄보디아로 가서 맞이한 비극
지역 청년이 정상적으로 수도권 청년을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에서 자본 축적은 무한히 유보되는 약속이다. 현실의 시간은 기약 없이 정체되고 있으므로, 유일한 탈출구는 비정상적 가속을 통한 점프뿐이다. 코인과 주식 투자 열풍은 불평등을 '운'과 '타이밍'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환각을 만들었고, 많은 이들이 뛰어들었으나 얼마 안 가 대부분 손절과 빚이라는 처음 겪는 공황 상태에 빠져야 했다.
그때, '해외 고수익 알바'라는 문장은 그들에게 훨씬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탈출의 언어로 다가왔다. 2023년부터 본격화된 캄보디아 사기 취업 사건은 높은 급여와 간단한 업무를 미끼로 국내 청년들을 현지로 유인한 뒤 여권을 압수하고 불법 온라인 도박 사이트나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강제 노동을 시킨 신종 범죄다. SNS와 구인 플랫폼을 통해 확산된 이 사기는 수백 명의 청년들을 피해자로 만들었고, 그중 상당수가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구조는 완전히 새로운 게 아니다. 20여 년 전 서울 방이동에서 다단계 청년들이 집단 숙식하며 인생역전을 꿈꾸던 광경과 닮았다. 고수익 약속, 집단 생활 강제, 끊임없는 인원 모집. 캄보디아 스캠은 이 착취 모델이 국경을 넘고 형태를 바꾼 것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결정적으로 다단계는 대면 모집으로 이루어졌다. 지인 권유, 오프라인 세미나, 숙소 방문으로 청년들이 물리적으로 상황을 감지할 기회가 있었다.

오늘날은 SNS와 구인 사이트로 전파되고, 면접은 화상으로, 신뢰는 '수익 인증샷' 몇 개로 구축된다. 팬데믹을 거치며 온라인에 익숙해진 청년들은 화면 너머 정보를 실제보다 더 신뢰하게 됐고, 이것이 사기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 과거에는 물리적 공간으로 끌어들여야 했던 청년들을 이제는 알고리즘과 디지털 증거만으로 유인할 수 있게 됐다. 방이동 다단계가 사라진 게 아니라 캄보디아로 장소를 옮겼을 뿐이고, 모집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이 사건은 범죄 조직의 유혹이나 개인의 오판이 아니다. 신뢰의 육체적 기반이 해체된 경험과 기울어진 사회의 알고리즘을 통해 가짜 기회가 제시되는 '비서울형 환경'이 작동한다. '좋아요', '조회수', '구독자 수' 속에서 '수익 인증'이 판단을 교란하며 특정 계층의 행위를 이끌어낸다.
지역 청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구조적 기회 부재, 경제적 절박함, 대안 제한성에서 더 취약하다. 이 사건은 디지털 자본주의와 수도권 중심 구조 속에서 팬데믹이 포개지며 인간의 신뢰가 데이터로 대체되고, 지역이 시간적 낙후로 고립되고, 청년이 축적 대신 점프를 꿈꾸는 시대의 교집합에서 솟아난 비극이다. 단순한 해외 취업 사기가 아니라 지역 기회 붕괴 이후 신뢰의 잔여물을 좇던 한 계층의 비서울형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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