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커크의 죽음과 ‘20대 한국 남성 극우화’ / 김상유
- 한국연구원
- 5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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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5일 전
찰리 커크 피살 사건 발생 이틀 후, 나는 ‘20대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20대 한국 남성의 극우화’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다. 나는 이 주제의 전문가가 아니고 특정 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아서 사양하려고 했지만, 지금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는 것은 비겁한 회피로 느껴져서 청탁을 받아들였다. 최근 미국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정치 테러를 보면, 정치적 양극화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각각의 특수 상황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순환되는 파시즘적 정서를 응시하고 사회 모든 층위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 글은 ‘극우화’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목적으로 쓰였지만, 궁극적으로 필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정치’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둔다. 찰리 커크의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대학교 캠퍼스에서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이 대낮에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사건을 목격한 후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행동이라도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도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이 트럼프의 미국처럼 변하는 것을 보기 싫다.
이 글에 담긴 생각은 지난 2년 동안 필자가 한국에서 생활한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에 미국으로 이민 갔고, 2023년 8월까지 그곳에서 계속 살았다. 학부를 졸업하고 한국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사는 기간에 한강 노벨 문학상, 12·3 계엄, 응원봉 시위, 윤석열 탄핵, 그리고 대선까지 목격했다. 나는 문화적으로 미국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나름대로 한국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면서 자라왔다. 그러므로 완전히 ‘외부인’도 ‘내부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글을 썼다는 점을 미리 알려둔다.
‘20대 남성 극우화’에 대한 의견과 감정들
한국에서 ‘20대 남성 극우화’의 배경은 복잡하지만, 이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비교적으로 간단하다. 4개의 주장으로 정리해 보았다:
1. 올해 대선 결과만 확인해도 20대 남성 극우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20대 여성들의 투표 방향과 비교하면 젠더간 갈등이 심각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 현재 경제상황으로 인하여, 예를 들어 취업이 힘들어 남성 청년의 극우화가 이루어진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20대만 힘든가? 20대 남성만 힘든가? 안 힘든 20대가 있었나? 오히려 이 현상의 원인은 오늘의 미디어 환경에서 찾는 게 더 정확하다.
3. 전 세계적으로 극우 진영은 공격했을 때 타격감이 있는 소수자들만 공격한다. 한국에서는 난민,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혹은 페미니스트처럼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자세는 지극히 퇴행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비판받아야 한다. 한국 사회는 ‘정상’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난 소수자에게도 좋은 삶을 보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여기서 ‘정상’은 공동체 내에서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사회적 규범을 의미함으로, 억압적인 함의를 가진다.)
4. 한국의 기성 언론과 세대는 ‘극우화’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이대남’의 표상을 앞장세워서 그들의 낡은 사회관에 젊은 이미지를 부여하려는 전략을 보여 왔다. 이것은 젊음이 가지는 미미한 특권마저 전유하려는 태도다. 그들은 진심으로 청년들의 삶과 어려움에 관심이 없으며, 그들만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에 몰두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보다 정리하기 더 어려운 생각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상황이 복잡할수록 기본적인 면에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0대 남성 극우화’에 대한 의견만이 아니라, 이 주제에 대해 한 개인이 느끼는 여러 감정과 그 이유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경우 다음과 같다. 극우 세력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분노’가 가장 강렬하고, 익명의 댓글과 싸우고 있다는 ‘무력감’이 그 뒤를 따른다. 극우와 별로 상관없는 주제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그 논리를 따르는 발언을 접할 때 ‘불쾌함’도 종종 나타난다.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 몰려오는 ‘피로’는 감정이 아니지만, 감정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반사회적이고 편협한 인식이 호소력을 갖게 되었는지 ‘당혹’스러우면서도,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 같은 구조적인 맥락을 상기시키면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혼란’이 찾아온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짜증’과 ‘공포’, 그 사이를 오가고 있다.
외국에서 살아온 입장에서 한국 사회가 ‘페미니즘’에 찍고 있는 낙인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청년 세대의 극우화가 지금보다 훨씬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말해지기 조금 더 쉬워질까. 젠더갈등에 대한 논의가 이미 가상공간으로 많이 이동한 시대에, 이전의 사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한폭탄’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완벽하게 연결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제 찰리 커크의 암살 사건을 재고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보고자 한다.
‘찰리 커크 사망사건’의 도구화
찰리 커크는 고등학교와 대학 캠퍼스에서 ‘터닝 포인트 USA’라는 청년 보수 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한 인물이었다. 이 단체는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대학 캠퍼스에서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커크가 인종과 젠더, 종교, 기후변화, 그리고 총기규제에 대해서 말한 허위사실과 혐오발언은 여러 매체에서 보도된 바 있으니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겠다. 그가 터닝 포인트 USA를 통해 펼친 기획을 보면 그를 ‘운동가’로 볼 수 있고, 온라인상에서의 영향력을 보면 ‘정치 인플루언서’라고 할 수 있다. 이준석처럼 공식적인 직책을 맡은 적이 없고, 그보다 나이가 8살이나 어리다. 그들의 대표적인 공통점을 말하자면, 관심경제에서 ‘젊음’이 가지는 힘을 이해하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의 암살사건은 근래 미국에서 연이어 발생한 정치테러 중 가장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전에 일어난 사건을 돌아보면, 2022년 10월 한 남성이 펠로시 전 하원의장의 집에 침범해서 그녀를 찾지 못하자 남편을 구타했다. 2024년 7월에는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 2024년 12월 유명 보험사 ‘유나이티드 헬스케어’의 CEO 브라이언 톰슨이 총격 살해당하고, 범인이 미국의 의료보험 정책을 비판할 정치적인 목적으로 계획 암살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졌다. 2025년 4월 한 남성이 새벽에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의 주택에 불을 질러서 그의 가족을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2025년 6월 미네소타 주 의원 멜리사 호트먼과 그녀의 남편은 자택에서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찰리 커크 암살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들의 피해자는 다양한 정치적 진영과 가치관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좌파’가 ‘우파’를 공격하거나 ‘우파’가 ‘좌파’를 공격한 것이 아니다. 찰리 커크의 죽음만 보면 그 개인이나 MAGA(트럼프) 진영을 향한 공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소통이 붕괴되는 사건들의 연속 속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정확하다. ‘말’이나 ‘투표’가 아니라 ‘폭력’을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당연히 찰리 커크의 죽음을 ‘우리’를 저격한 ‘그들’의 문제로 제시하는 수사를 사용했다. 그는 추도 연설에서 좌익 세력을 기꺼이 짓밟고 배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폭력의 씨앗을 심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찰리 커크의 추모식을 무대로 삼아 다시 한 번 그의 정치적 메시지를 선언한 것이다. 트럼프가 이 연설을 전달하는 영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찰리 받아들였다 죽음을 정치적 기회로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고방식은 서울에서 열린 찰리 받아들였다 추모식에서도 반복되었다.
이 집회는 혐중 시위와 계엄을 옹호하는 받아들였다 지지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가 찰리 받아들였다’라는 구호를 내세우긴 했지만, 찰리 커크와 연관 없는 팻말로 가득했다. 찰리 커크의 총살은 끔찍한 사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에서 그가 추모받는 풍경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태극기와 성조기(그리고 종종 이스라엘 국기)를 함께 흔들고 있는 풍경은 정말 기괴하고, 시위에서 매번 영어 통역사를 투입하는 것도 적응이 안 된다. 극우 세력이 강력한 한미동맹을 주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찰리 커크 추모회’를 통해 한국의 극우 세력이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에 편승하려는 움직임은 확인할 수 있다.
서울 거리 한복판에 모인 무리는 커크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웅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둘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애도는 상실감에 중점을 둔 것이며, 영웅화는 희생을 부각하며 이상화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찰리 커크’라고 외치는 무리는 자기 자신을 핍박받는 ‘영웅’으로 상정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행동의 더 중대한 효과는, 그들이 애도의 정치를 짓밟고 있다는 점이다. 커크의 죽음은 그가 위대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청년이어서 비극인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한 카페를 찾았는데, 내 옆에 앉아있는 여성 3명이 모여서 나눈 대화가 공교롭게도 이 주제와 연결되어 있어서 결론 대신 그 내용을 옮겨본다. 그들은 20대 중반,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중 한 명의 어떤 친구가 SNS 계정에 갑자기 “극단적인” 정치 릴스를 자주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친구도 여성이었는데, 내용상 극우 릴스였다. 이야기를 하던 사람은 특정한 정치적 성향은 가질 수 있지만, 공유해서 이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런 게시물을 올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친구한테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았더니, 뭔가 자기만의 의견이 없고 주위 사람들을 모방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주위 남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20대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기만의 의견을 찾아가는 시기라면, 이 세대의 극우화는 생각보다 쉽게 ‘대화’로 완화될 수 있지 않을까. 동년배 사이에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잘못 했을 때는 좋은 어른들이 확실하게 말해주고, 궁금점과 비판을 거침없이 꺼낼 수 있는 자유로운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7세에 미국 이민 후 23세까지 거주했다. 한국문학과 영화를 연구하기 위해 연세대학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주 연구 분야는 한국 문학과 문화에 나타난 미국의 재현이다. 현재는 한국 문화에 나타난 미국의 재현을 중심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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