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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양식의 탐구로 가는 길 -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 리뷰 - / 박동수


브뤼노 라투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이름은 이제 한국에서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과학기술학(STS)이라는 연구 분야를 개척한 과학인류학자로, 혹은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이라는 혁신적 사회과학 방법론을 개발한 사회학자로, 혹은 기후위기 문제와 직면하기 위해 녹색 계급에 관한 성찰을 내놓은 신기후체제의 사상가로, 혹은 비인간 행위자가 갖는 행위 역량에 주목한 신유물론의 선구자로 그의 사상을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의 저작을 읽어보지 못했다고 해도 어디선가 풍문으로 듣고서 뭔가를 말해 볼 수 있는 익숙한 사상가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우리가 라투르의 사상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 책, 『존재양식의 탐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책이 갖는 위상은 무엇인가,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짧게나마 이 글에서는 그 답의 윤곽을 탐색해 보려고 한다.

     


『존재양식의 탐구: 근대인의 인류학』(2012)은 라투르가 집필한 최고의 대작으로 불린다. 첫 저작인 『실험실 생활』(1979)에서 마지막 저작인 『녹색 계급의 출현』(2022)에 이르는 그의 모든 사상적 여정이 이 책으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이 책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목과 부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여기서부터 이 저작의 독특함과 기묘함을 느낄 수 있다. 먼저 ‘존재양식의 탐구’라는 제목만 보면 전형적인 철학적 저작처럼 보이지만(흄의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를 연상케 한다), ‘근대인의 인류학’이라는 부제까지 보면 그러한 탐구가 인류학적 방법을 통해, 그리고 근대인을 대상으로 진행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인류학적 방법을 통한 근대인의 존재양식에 관한 탐구. 이것은 브뤼노 라투르라는 철학자가 일생 동안 해온 작업이며, 사실상 그는 오직 이 작업밖에 하지 않았다. 라투르는 ‘보편적 인간’이라는 추상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 인류의 국지적 존재방식을 다루는 인류학을 철학적 탐구의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라투르 이전에는 아무도 근대성의 핵심 영역(예컨대 과학)에 대한 인류학적 작업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인류학이란 비서구 공동체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었기 때문에 ‘근대인의 인류학’이란 말 자체가 일종의 형용모순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뉘앙스의 기묘함을, 그리고 거기에 담겨 있는 비대칭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라투르의 철학적 작업이란 비인간과 비서구를 오직 대상으로만 삼았던 서구 근대인의 인식론, 존재론, 윤리론을 대칭적 인류학의 관점에서 철저히 탈식민화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이 기획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 1973년 26세의 청년 라투르는 신학 박사 과정 중 군복무를 대신하여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로 가게 되고 거기서 처음으로 인류학을 접한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인류학자들은 비서구인만을 연구하는 것일까? 왜 근대인은 합리적이고 비서구인들은 비합리적이라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전제하는 것일까? 만약 인류학의 연구 방향을 돌려세워서 “코트디부아르 농부를 연구하는 데 사용된 현장연구 방법을 일급 과학자에게 적용한다면, 과학적 사고와 전과학적 사고 사이의 거대한 분리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너무나 순진한 질문을 던지며, 청년 라투르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소크 생물학 연구소에서 역사상 최초의 실험실 현장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그는 과학에 무지한 사람이었지만, 인류학자에게는 오히려 그러한 무능이 최고의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과학적 진리의 생산이 비과학적 차원, 비인간 행위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낸 이 현장연구는 『실험실 생활』로 출간되어 이제는 과학기술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라투르의 탐구는 과학의 실제 모습을 밝히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기술, 법, 예술, 정치, 종교, 경제 등 근대성의 핵심 현장으로 들어가 현장연구 작업을 계속해 왔으며 마침내 이를 종합한 책을 출간하게 된다. 이 책이 바로 『존재양식의 탐구』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이자 라투르가 독창적으로 주목해온 사실은 근대 세계는 그 공식적 이론이 내세우는 것과 달리, 이분화된 영역(합리성/비합리성, 자연/사회, 주체/객체, 물질/정신)으로 결코 한정 지을 수 없는 매우 상이한 존재자들과 행위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존재하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양식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다양한 존재양식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이유다. 그는 이 책에서 열다섯 가지의 존재양식을 식별했지만, 그 목록은 확실히 닫혀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존재양식들의 매개를 통해 지구의 온갖 생명들 및 비인간 행위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이렇듯 이 책은 근대인의 인류학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와 연결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룬다. 기후위기가 눈앞에 닥쳐온 파국의 시대, 지구와 인류의 운명이 새로운 시험대에 놓여 있는 이때, 녹아가는 빙하의 도덕성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빙하를 포함한 ‘사물의 의회’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공동 토론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존재양식의 탐구』는 그러한 존재자들과 함께 더 나은 공동 세계를 만들기 위한 대안적 좌표계를 제공해줄 것이다.

     

요컨대 이 탐구는 근대성에 대한 대항서사를 쓰면서도, 근대성의 가치들을 그저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실제로 수행되었던 실천들이 진실로 무엇이었는가를 낱낱이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근대 세계로부터 무엇을 계승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라투르는 우리가 이전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나은 세상에 살게 되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진보 서사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우리가 결코 원치 않았던 기후위기와 극한갈등의 사회를 만들게 되었는지를 되묻는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무엇을 놓친 것일까? 왜 진보는 기후위기라는 최악의 자기 파괴로 귀결되고 말았을까? 근대적 삶의 양식을 근본부터 변화시키려면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그 존재양식의 실천적 본질을 알아내야 한다. 이 위기의 시대에 근대인의 존재양식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그러한 탐구를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일까? 그러나 라투르가 분명히 말하듯이 우리는 긴급함 때문에라도 오히려 천천히 성찰하기 시작해야 한다. 파국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을 뿐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도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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