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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관하여 - 정치와 윤리 사이 / 김동규

어느 날 선배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고지식하게 도덕에 얽매인 내가 조금 한심해 보였던지, 그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내 생각엔 ‘살인하지 말라’는 것 딱 하나만 지키면 된다네, 나머지는 너그럽게 넘어가도 괜찮다네.” 이 말은 최소한의 윤리적 원칙만 지키며 살아도 별 문제 없다는 뜻을 함축한다. 도덕법칙을 우상 숭배하는 율법주의자가 도리어 자신과 타인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 경우를 고려한 말이라고 이해된다. 평생 반듯하게 살아오신 분의 함구 끝에 나온 말이었기에 울림이 컸다.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는 이 분에게도 ‘살인하지 말라’라는 윤리적 마지노선은 존재했던 것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것마저 없는 상태, 윤리의 최후 보루마저 무너진 상태가 바로 전쟁이다. 지금 전쟁이라는 핏빛 전염병이 지구촌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어리석은 인류는 세계 대전의 참담함을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전쟁의 한복판에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진다. 더 많은 적을 죽이는 것이 전장(戰場)의 미덕이다. 살인을 많이 할수록 명예의 훈장이 더해진다. 전시에는 연쇄 살인범도 유능한 베테랑 군인으로 칭송될 수 있다.

윤석열의 내란이 이전에 탄핵된 박근혜의 과거 죄과를 사소하게 보이게 했듯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란에 대한 이스라엘/미국의 무력 도발 덕분에 사소한 게 되었다. 러시아는 최소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자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이유를 댈 수 있었지만, 미국은 그 어떤 정당한 이유를 대기 힘들다. 미국 고위 관료의 양심선언대로, 미국의 이번 전쟁개시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공들인 정치적 로비의 결실에 가깝다. 이스라엘은 시오니즘적 국가 창설의 순간부터 아랍 국가들과의 불편한 동거를 자처한 셈이기에, 베풂을 통해 주변국들의 신망을 얻는 길로 나갔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웃들을 배척하고 척결하는 길을 선택했다. 같은 하늘을 이고 공존할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이웃을 대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윤리가 원천 봉쇄된 전쟁터에서 숱한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있다. 인간이 아닌 AI가 정밀 살상 무기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돌고 있다.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은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은 철학자의 고뇌를 담고 있다. 책의 첫머리에서 그는 그 점을 분명히 밝힌다.

     

전쟁 상태는 도덕을 중지시킨다. … 전쟁은 도덕을 가소로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쟁을 예측하고 모든 수단을 다해 승리하는 기술인 정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이성의 실행인 것처럼 행세한다. 철학이 어리석음에 맞서듯, 정치는 도덕에 맞선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문성원·손영창 옮김, 그린비, 2019. 7쪽.     


윤리가 제 1철학이라고 보는 레비나스는 철학적인 반전주의자이다. 인용문에 따르면, 윤리를 중지시키는 전쟁은 정치의 산물이다. 정치가 중에 호전적인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악으로서 전쟁을 용인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치가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치가는 결코 완벽한 반전주의자가 될 수 없다. 왜 그럴까? 레비나스의 논리에 따르면, 정치가는 동일성을 확보한 전체를 가정하고(예컨대 하나의 ‘국가’를 가정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일에 복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체 속에서 개개 구성원의 존재 이유를 매긴다. 전체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죄악시하여 단죄하는 일은 그에게 정당한 행위로 보인다. 그래서 정치 영역에서는 소위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해진다.

이란 초등학교에 대한 미군의 오폭 그리고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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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철학자와 정치가는 현실 속 인물은 아니다. 그저 이론상의 인물을 가리킨다. 실제 2500년 동안 철학자들은 전체성의 함정에 빠진 정치가였다고 레비나스는 비판한다. “철학자들은 정치의 기초 위에 도덕을 세운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위의 책, 9쪽.) 타인의 얼굴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목소리를 들었던 철학자는 거의 없다. 레비나스가 천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철학자라며 존경했던 하이데거마저 나치에 동조할 정도니 말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인간이 만든 공동(전)체도 유한하다. 무한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전체성의 테두리 내에서 언급되는 진리와 정의는 모두 유한한 것이고, 고만고만한 유한한 것들끼리의 다툼(전쟁 포함)은 죄다 헛된 짓이다. 오직 죽어가는 타인의 얼굴이 말하는 목소리(‘나를 죽이지 말라’)를 따르는 것만이, 즉 윤리의 으뜸 계명을 지키는 것만이 무한의 가냘픈 빛에 인도되는 것이다.

진짜 철학자는 반전주의자여야 한다. 무한의 빛에 인도되는 철학자는 정치의 논리, 즉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전쟁(정당방위)을 용인할 수 있다는 논리를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기준에 따르면, 나는 철학 함량이 모자란 사람이다. 유한한 세속 정치에 물든 사람인 셈이다. 젊은 시절 나는 병역의 의무를 이행했고(전쟁 준비를 했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현실 부적응자로 간주했다. 인간 실존의 뿌리 깊은 어리석음과 폭력성을 고려할 때, 지금도 여전히 반전(反戰) 근본주의는 자기 기만적인 신념으로만 비친다. 그럼에도 전쟁을 옹호하거나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보기에 전쟁을 최대한 막을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이렇다. 전쟁이 필요하며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는 그래서 전쟁을 개시하자고 주장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본인과 사랑하는 가족까지 함께 전쟁의 불길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법률을 마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젊은 자식들은 총성 가득한 전투에 참가하고 네타냐후나 트럼프 같은 노령의 정치가들은 부대에서 소총이라도 닦는 일을 해야 한다. 군통수권자라서 안 된다고? 후임자에게 권력을 승계해 주면 된다. 이것은 구성원 모두가 주권자인 (신분에 기초한 왕정이나 귀족정이 아닌) 민주정의 장점이 아니던가? 이것마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타인의 얼굴에 기초한 레비나스의 윤리적 개념들(환대, 볼모, 타인에의 예속 등)보다는 분명 현실적이다. 덧붙여서 레비나스식 윤리란 오직 (타인이 아니라 행위-책임-주체 1인칭 단독자인) ‘나’에게만 해당되며, 일차적으로는 1인분의 현실성만을 갖는 것이다.


트럼프의 아들. 배런을 전장으로 보내자는 캠페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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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1906-1995)는 나치 시절 수용소에 갇힌 적 있는 유대인이다. 그가 아무리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비전을 펼친다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고뇌를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이웃 사랑의 환대 속에서 무한과 만난다는 아이디어를 소중하게 음미해야만 한다. 그런데 목에 가시처럼 경청을 방해하는 지점이 있다. 현실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그것이다. 내가 아는 한, 생전의 그는 이스라엘이 결정한 폭력과 전쟁에 대해 비판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굳이 창설되었어야 한다면, 오랫동안 반유대주의가 창궐하고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유럽(독일) 땅에 속죄 차원에서 세워졌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양해의 표시로 중동지역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전폭적인 배려와 지원 아래 진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영국)은 이스라엘을 중동 지배의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미국은 타자의 윤리를 철저히 파괴하는 대표적인 전체성의 국가가 되었다. 과연 이것을 두고 레비나스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그 철학자는 할 말을 잃을 것 같다. 양차 세계 대전을 경험하며 치열하게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아낼 해법을 찾았던 철학자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작금의 현실이 인류의 현 수준이다. 또한 이번 전쟁에서 인류는 (자신과 전쟁할 수 있는) 가공할만한 AI의 출현을 속수무책 바라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와 윤리 사이의 숨 막히는 외줄 곡예술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AI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특이점이 오기 전에, 평화의 지혜를 AI에게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하고 정치적 계산에는 더없이 탁월한 AI가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에서 그동안 무엇을 배웠겠는가? 마지막으로 평화를 기원하며 유대인들의 국가인 이스라엘에게 유대인 레비나스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그러니까 평화는, 한 편이 승리하고 다른 편이 패배하여 전투원이 없어진 탓에 전투를 멈추는 전투의 종말과 동일시될 수 없다. … 평화는 도덕성과 현실의 수렴을 확신하는 자아, 즉 번식성을 거쳐 자신의 시간이 되는 무한한 시간을 확신하는 한 자아로부터 출발하여 받아들여진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위의 책, 461-462쪽.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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