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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에게 취미를 허하라 / 오영진

한국의 하위문화를 계보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잡지 『별건곤(別乾坤)』(1926.11~1934.03)에 대해 관심을 갖어야 한다. 별건곤의 창간이념과 이후의 체제변화들은 식민지 시기 ‘취미’ 혹은 ‘재미’가 어떻게 하위문화로서 안착되고 생산․소비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별건곤은 혹자가 농담 삼아 말하듯 “‘선데이 서울’의 큰아버지뻘 되는 잡지”(천정환, 「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 6, 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신동아』, 2009.12)라 할 수 있다. 식민지의 궁핍함과 민족주의적 열망이 주는 무거움을 뒤로 하고 경성이라는 모던한 도시를 배경으로, 근대적 취미독물이 야기하는 자극들을 체험하는 일은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 매력적인 일이었다.

별건곤 창간호의 편집후기인 「여언(餘言)」을 보면, 편집부는 별건곤 같은 취미잡지를 “벌서 일년이나 전부터” 경영하려 했으며, 이는 금지된 잡지 『개벽(開闢)』(1920~1926)의 후신이 될 잡지와 함께 “이종(二種)의 잡지”가 될 것이니 기대해달라고 한다. 또한 자신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취미잡지”는 “무책임한 독물” “방탕한 오락물” 같은 “비열한 정서”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별건곤이 계몽주의 잡지였던 개벽의 폐간을 틈탄 단순한 대체물이나 방향전환의 산물이 아니라 “이종의 잡지”의 노선 속에서 이미 충분히 고려된 매체라는 것이다.

『별건곤(別乾坤)』(1926~1934)
개벽(開闢)』(1920~1926)















비열한 정서가 아닌 ‘취미’, 저급한 ‘취미’를 박멸하는 ‘취미‘란 무엇일까? 같은 호에 실린 벽타의 글 「빈취미증만성의 조선인(貧趣味症慢性의 朝鮮人)」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윤택케 하고 원기나게 하고 광명잇게 하고 희망잇게 하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또한 같은 호, 야뢰라는 작가의 「대우주의 취미(大宇宙와 趣味)」라는 글에서는 “인간은 취미이다. 취미에서 모든 고상한 창조력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무디어진 삶을 새롭고 창조적인 삶으로 바꾸어주는 것. 그것이 취미의 역할인 것이다. 가까운 일본의 다이쇼기의 사전에서 취미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엿볼 수 있다.

1. 인간의 감흥을 야기할 수 있는 것. 흥미, 오모무키
2. ‘영어 taste', 美를 감상하는 능력
3. 어떤 물건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것
- 『言泉』 , 1921 초판, 1928

진노유키, 『취미의 탄생 -백화점이 만든 테이스트』, 소명출판, 2008, p.25 재인용.


위의 정의 중 오직 3번 항만이 ‘취미’의 용법으로 쓰여진다면, ‘취미’는 단지 오락물의 통칭으로 쓰이게 된다. 통상의 '취미‘는 신변잡기적인 것, 노동의 진지함과는 다른 기분전환의 것이기에 이러한 통용이 가능하다 하겠다. 『별건곤』의 ’취미‘ 이념은 1번과 2번의 항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단지 예술품에 대한 감상능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활력있는 삶을 위해 요구되는 어떤 감성적 고취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잡지 별건곤가 지닌 취미의 이념은 감성적 고취를 통한 경험의 확장이라는 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별건곤』이 제기하는 무산자 대중에게 요구되는 자극과 새로운 취향의 문제제기는 단순히 소비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취미의 창조적 사용법을 통해 생활의 감각을 드높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1931년부터 기존에 50전에 팔았던 『별건곤』의 가격이 종합지 『혜성(彗星)』의 창간에 맞추어 5전으로 인하됨으로써 보다 많은 독자대중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그만큼의 통속화로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후반기의 과도한 통속화 때문에 애초 별건곤의 취미이념이 본래는 다소 계몽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자주 망각하게 한다.

그러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능력을 어떤 방법으로 획득할 것인가? 결국 취미(taste)의 고취는 취미(hobby)의 가능여부, 즉 취미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능력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시간적 여유의 창출능력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미적능력의 고취는 보통은 어떤 매개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꽃이라든가 도자기같은 사물을 소유할 수 있는 여유가 취미(taste)를 고취시킨다.

이에 벽타는 무산자의 취미는 대량인쇄물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오직 **갑헐한 인쇄물**이 **저급의 문체로 기록**되야 아모리 심산유곡에라도 갈 수 잇게 된다 하면 그에 의하야 **사진으로 기사로 한 자리 수백 수천의 대군중과 석기여 놀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말하고 춤추는** **감을 이르키여 인간적 취미에 어느 정도의 만족**을 줄 것이다” 유산자들의 호사스러운 취미를 갖지 못하는 무산자들은 대량복제가 가능한 책 읽기를 통해 비로소 취미에의 증진과 비슷한 것을 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취미의 대안으로 요구된 이러한 읽기는 이제 다른 성격을 갖게 된다. 즉 어떤 정보의 필요성이 아니라 정보의 신선함이 주는 환기의 효과, 유쾌의 효과가 오히려 중요해지는 것이다. 뉴스는 그 정보의 정확성보다는 뉴스의 새로움과 충격의 논리에 보다 근접해 있고, 교양은 지(knowledge)가 아니라 공통감각(common sense) 형성을 위한 상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어진다. 그것은 소박하게는 인민들의 창조적 여흥의 욕구를 채워줄 읽을거리이며, 거창하게는 당대인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을 소개하여 인식 체계의 재편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꾀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매체의 혁명성이 단지 유흥으로만 전유되는 것이 아니라 무산자들을 위해서도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별건곤에 기고한 조선 최초의 라디오 피디 최승일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의 라듸오- 문명- 그것은 정복자의 전유물이다. 지금의 문명이 몰락되는 날은 곳 우리가 새 천지를 발전하는 날이다. … **잇는 사람의 작란거리가 되고 말아 버린 문명의 산물!** 참으로 우리는 과학에 대해서 면목이 업다.
그러나 나는 어느 무선잡지에서 러시아의 어느 농가의 가정에서 지금 라듸오를 듯는 판인데 여덜시에 모스코바에서 스탈린의 농촌에 대한 연설이 잇다고 하여서 그 집 주인 늙은 영감이 얼골이 긴장이 되여서 텁석 부리의 수염 한아가 까딱이지 아니하고 수화기를 귀에다 다이고 안저 잇는데 그 엽헤는 그의 아들인 듯한 젊은 친구가 「아버지 나 좀 드릅시다.」 하면서 제 차례가 도라오기를 기다리고 잇는 그림- 이 마음에 맛는 그림을 본 일이 잇다.
레닌은 『미래에 나의 바라는 세계는 전기의 세계다.』고 하엿다.…”

최승일, 「라디오, 스폿트, 키네마」『別乾坤』, 2호, 1926.12


그는 양반집의 사랑채에 걸려 가야금 병창이나 들려주는 라디오가 아니라 무산계급을 위한 연설이 울려퍼질 수 있는 라디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고급오락을 무산자 대중들도 즐길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본래 매체가 가지는 진정한 혁명성을 개방해야 하여, 그것으로 인민의 자유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보여진 바, 라디오는 인민들의 세계인식을 재편하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멀리 모스크바의 연설을 촌부가 들을 수 있게 됨으로써 그는 자신의 지루하고 답답한 삶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최승일의 이 글은 별건곤의 ‘취미’이념을 부연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근대 최초 재미와 흥미거리 위주로 재편된 잡지 별건곤의 이념이 계몽의 전략 속에 취미(흥미)의 전술이 첨가되는 일이라든지, 취미(흥미)가 계몽의 전략을 전유하는 일만이 아닌, 취미 그 자체 용법 속에 숨겨져 있는 창조와 해방의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한국 하위문화의 역사에서 ‘인민에게 취미를 허하라’라는 명제는 초기부터 정치적 급진성을 내재했던 것이다.


오영진(문화평론가, 교과목 <기계비평>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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