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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미로 속에서 살아가기 / 오영진

최종 수정일: 2023년 4월 27일


보르헤스는 그 자신의 자전적인 삶이 담긴 단편 「작가」를 통해서 장님이 된 후에 불현듯 사로잡히게 된 옛 기억들에 대해 서술했다. 그는 기억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구리 단검으로 대변되는 마술적 힘과 전투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어두운 지하실에 기다리고 있는 여인으로 수렴되는 미로와 욕망의 이야기이다.


전자와 후자는 낮과 밤의 대비를 이룬다. 구리 단검을 받아든 아이는 오딧세우스가 되어 여행을 떠난다. 제 고향을 떠나 드넓은 바다로 항해해나가는 이 모험의 정신은 그 궤적이 곧 이야기가 되는 걸출한 무용담의 근원이다. 반면, 어두운 지하실이라는 내면의 세계, 그 고독의 공간에 돌입하게 되는 자는 허망하나 끝없이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형벌을 받은 자이다. 그는 누빔점 없는 순수한 미끄러짐 속으로 자신을 던져버린다. 여기서 이야기의 동력이 되는 것은 미끄러짐 자체이다.


이때 미로는 길찾기의 어려움이 아니라 의도적인 길 잃기의 공간적 표상이다. 모험의 정신이 갈구하는 무한은 미래를 향하는 무한인 데 반하여, 미로를 지향하는 정신이 갈구하는 무한은 무한히 쪼개지는 현재-순간으로서의 무한이다. 그러나 양자는 동등한 지위를 갖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보르헤스는 전자로부터 후자가 파생되어 온 것이라 말한다. 그가 무한한 이야기에서 이야기적 무한을 발견하고, 끄집어 올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보르헤스를 읽을 때 주의할 것이 이 점이다.


보르헤스가 지하실이라는 어둡고 한정된 공간을 표상한 이유는, 이 공간이 더 이상 새로운 여행의 궤적이 불가능한 장소이지만 내부로 무한히 갈라져 증식하는 즐거운 미로가 되어 오히려 새로운 여행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문학을 전복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으로서 이야기' 자체를 전복하고 있다. 이러한 '미로로서 이야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스테리온의 신전」이다. 이 작품은 테세우스가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영웅이 아니라 괴물의 관점, 즉 거대한 미로속의 수인, 미노타우로스의 관점에서 쓰여 있다.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냈던 놀이들은 이것들뿐만이 아니다. 또한 나는 집 안에 들어앉아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집의 모든 부분들은 끝없이 같은 모양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하나의 장소는 곧바로 다른 장소이다. 집 안에는 단 하나의 물웅덩이도, 마당도, 가축들이 물 마시는 통도, 구유도 없다. 그러나 집 안에는 14개(그러니까 무한한)의 구유와, 가축들이 물을 마시는 통과, 마당과, 물웅덩이가 있다. 집은 우주와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다.”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상상력으로 자신의 집인 거대한 미로를 채운다. 테세우스의 무용담만큼이나 길고 긴 이야기가 이 미로를 통해 발생한다. 이때 여행-이야기는 미로-이야기로 전환된다. 때문에 테세우스의 일격을 아무런 저항 없이 하나의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미노타우로스는 이야기를 자신의 선택으로 종결한다는 점에서 이 거대한 무용담에서 테세우스의 몫이었던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는다.

테세우스를 기다리는 즐거운 미노타우로스(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보르헤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드넓은 바다와 광활한 들판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전통의 순조로운 보존, 시간적 순서에 따라 구술과 구술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가 병렬로 시작되고 커다란 이야기가 작은 이야기 속으로 파고들며, 이미 끝난 이야기가 분해되어 제멋대로 조합되어버리고 마는 분열증적인 이야기다. 쥬네트는 이것을 보르헤스 문학의 공간적인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 공간 속에서 음성적 발화가 갖는 시간적인 불가역성은 배반되고 그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난교하는 자유를 얻게 된다.


보르헤스는 지하실 한 귀퉁이에 있는, 모든 지점을 포괄하고 있는 어떤 공간 지점들 중의 하나인 ‘알렙’을 통해 무한성을 형상화한 적 있다. ‘알렙’은 직경 2-3센티미터에 불과한 빛나는 구체에 불과하지만 “크기의 축소 없이 우주의 공간이” 들어있는 공간이다. ‘알렙’은 세상의 모든 책을 보여준다. ‘알렙’은 작중 화자인 보르헤스의 죽은 연인 베아뜨리스와 병렬적으로 제시되는 방법으로 사랑의 이미지를 얻는다. 알렙이 사라지는 순간, 그의 베아뜨리스에 대한 신비감도 상실한다. 우리는 전체를 획득할 수 없다. 다만 그 전체 안에서 놀 수 있을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보르헤스는 말하고 싶었을까? 이 때 전체를 사랑으로 바꿔 쓰면, 사랑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서 헤매는 것이라는 주제가 드러난다. 그가 만든 미로가 어둡지만 실은 즐거운 이유다.


오영진(서울과학기술대학교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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