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시간이여 / 나희덕
- 한국연구원

- 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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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고 벌써 한 달 남짓 지났다. ‘어, 어’하는 사이 금세 여기까지 떠밀려 온 셈이다. 이렇듯 회고를 통해 감각되는 시간의 속도는 유난히 빠르다. 아니, 순식간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돌이켜 보는 반성 과정 자체가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죽기 직전, 의식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면 일생의 파노라마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이다. 마지막이 예정된 유한한 시간은 단숨에 주파될 수밖에 없는 ‘순식간’의 운명을 부여받았다.
새해 벽두에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마음의 장소』가 출간되었다. 국내외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인의 마음이 머물렀던 자리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 글이다. 책을 읽다가 내 눈길이 멈춘 곳은 시계가 등장하는 두 꼭지였다. 하나는 런던 근교 옥션에서 구입한 백 년 넘은 괘종시계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셰익스피어 초상과 그의 작품 『십이야』의 몇 구절이 새겨진 손목시계 이야기다. 두 이야기 모두 시계와 시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의 ‘장소’를 논하는 책에 왜 시간 이야기가 끼어들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하필 그 점에 꽂혔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간은 시간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시간도 공간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둘은 원래 한 몸이다. 둘을 분리시킨 것은 지적 추상의 영역에서 세운 가설(假設)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불가분의 한 몸인 시공간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건(Ereignis)’이다. 현대 철학자들이 거듭 강조해 온 그 사건 말이다. 시간 따로 공간 따로 논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성찰할 것은 그 시공간을 펼쳐낸 사건 자체다. 예컨대 21세기 초입에 터진 2001년의 911 사건을 떠올려 보자. 그것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음을 똑똑히 알려준 사건이었다. 요즘 회자되는 베네수엘라나 그린란드와 같은 공간과 국가적 각자도생의 시간은 그 사건이 펼쳐낸 시공간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선을 일상의 영역으로 돌리면, 태어나고 죽는 인간의 생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다. 그 사건의 지평 아래 수많은 디테일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특정한 시공간이 펼쳐진다. 마음이란 그 사건의 파도 위를 떠다니는 돛단배와 같다. 그것은 한없이 무력하지만 사건(자기존재, 사명, 운명)의 전모를 밝히려 발버둥치는 주체다. 이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공간의 특징을 거리 좁힘(Ent-fernung)과 방향잡기(Ausrichtung)라고 말한다.1) 사건의 낯설음을 낯익음으로 바꾸는 ‘가까움’과 사건의 향방을 좇는 ‘방향 설정’이 우리의 공간 개념 속에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마음의 자리란 인생이라는 사건의 방랑길에서 마음이 지향하고(쏠리고) 가깝게 다가선 곳을 뜻한다. 예를 들어 고즈넉한 강변의 ‘벤치’에 마음이 머물렀다면, 그래서 죽거들랑 묘비 대신 벤치를 놓아달라는 부탁까지 했다면,(나희덕, 『마음의 장소』, 달 출판사, 2026. 13-15쪽.) 시인의 공간은 벤치다. 이를 확장하면 그녀의 시적 공간 역시 잠시 머물며 편히 쉴 수 있는 벤치라고 말할 수 있다. 매번 방황하고 해찰하고 서성거렸기에, 오히려 그랬기에 벤치라는 마음의 자리를 시적 공간의 기본 레이아웃으로 깔아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의 마음의 장소가 벤치라면, 그와 결부된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이미지로 고정하기 쉬운 공간과 달리, 시간은 이미지로 고정시키는 게 불가능하기에 이해가 어렵다. 무엇 하나 고정시킬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시간이라면, 그런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시인의 책에 담긴 시간 이야기에 더욱 주목했던 것 같다. 시인은 시간을 어떻게 보았을까? 시인은 『십이야』에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한다.
오, 시간이여.
이 엉킨 매듭을 풀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이 매듭을 푸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어렵구나.
나희덕, 앞의 책, 164쪽
이 문구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해석한다.
… 시간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빼앗아가는 시간과, 뒤엉킨 인생의 매듭을 풀어주며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 하는 시간이 그것이다. …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보다 시간의 너그러움에 좀더 기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나희덕, 앞의 책, 166쪽.
여기에는 두 가지 시간의 얼굴이 등장한다. ‘삶의 가해자이자 해결자’로서의 얼굴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레비나스의 저서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도 등장한다. 레비나스는 이 책에서 하이데거의 시간론과 대비되는 자신의 독자적인 시간론을 피력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론이 ‘죽음으로부터 사유된 시간’이라면, 레비나스 자신의 것은 ‘시간으로부터 죽음을 사유하기’라고 요약한다. 전자가 망할 수밖에 없는(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실존으로부터 바라본 시간이라면, 후자는 유한한 타인(고통 받고 죽어가는 이웃)을 향하는 사랑에서 바라본 시간이다(“시간은 … 타자를 향한 동일자의 전환이다”2)). 전자가 유일무이한 개인의 관점(자기-중심적 사랑, 곧 나르시시즘)에서 본 시간이라면, 후자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 관계의 관점(타자-중심적 사랑)에서 본 시간이다. 전자가 개체를 뒤흔드는 불안과 공포의 시간이라면, 후자는 타자를 환대하고 용서하는 너그러움의 시간이다.
레비나스는 시종일관 하이데거의 시간론과 대적하며 자신의 시간론을 옹호하고 있고, 우리가 두 철학의 차이점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시인의 말처럼 그저 시간의 두 얼굴일 뿐이다. 게다가 두 시간관의 공통점도 있다. 둘 모두 옹졸한 자기를 떠나는 시간을 가져야만 진정 편히 쉴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벤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무시무시한 세계로부터 안전해지는 길은 자기 주위에 높은 성벽을 두르는 게 아니라, 자기를 떠나 세계와 더 친근해지는 길이다.

흥미롭게도 독일어 단어 verlassen은 ‘떠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을 떠나면(재귀적 용법 sich verlassen으로 사용되면) 역설적으로 두루두루 믿고 의지할 수 있다(Verläßlichkeit-신뢰성). 죽음을 선취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모두 비루한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순간 성취된다. 물론 자신을 떠나는 시간은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무거운 시간을 온전히 떠안은(책임지고 감내하는) 사람만이 두툼한 나이테를 얻는다. 무한한 심연의 깊이를 얻는다. 시인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시간은 필시 이런 두터운 시간일 것이다.
새해에도 어김없이 ‘오, 시간이여!’라는 탄성(탄식과 감탄)은 터지겠지만, 그리고 종국에는 하염없이 훌쩍 지나가버리고 말 인생이겠지만, 시인처럼 얄팍한 디지털시계가 아닌 묵직한 괘종시계의 시공간을 희망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헛된 희망이 아닌 ‘불가능의 가능’으로서의 희망을 미래의 등대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1)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148쪽 이하 참조.
2) 에마뉘엘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옮김, 그린비, 2013. 166쪽. 원문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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