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트리가 처음 켜진 날 / 한보람
- 한국연구원

- 7일 전
- 3분 분량
1894년 겨울, 경복궁의 한켠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불을 밝혔다. 조선왕실 역사상 첫 번째 트리였다. 트리를 꾸민 사람은 당시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부인이었다. 환한 낮 시간에 트리를 정성껏 만드는 동안 언더우드 부인은 어둠이 내리면 촛불과 함께 근사하게 빛날 트리의 모습을 감상할 국왕 부부의 모습을 상상했을 테지만,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밤까지 궁금함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언더우드 부인의 트리는 창호지 문을 통과해 들어온 환한 햇빛 아래 국왕 부부에게 공개되었다. 훗날 그녀는 환한 대낮의 햇빛 아래 처량하게 깜빡이던 작은 양초들의 모습을 회상하며, 완벽한 트리의 모습으로 공개하지 못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해 가을과 겨울, 그리고 이듬해인 1895년 봄까지 언더우드 부인은 궁궐에 자주 들어갔다. 명성황후가 계속 만나자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 때 명성황후는 외국인 여성들을 궁궐로 초대해 친밀한 교류를 이어갔다. 언더우드 부인은 통역도 없이 왕비와 대화를 나누면서, 왕비가 너무 자상하고 친절해서 자신이 절친한 친구와 남몰래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부인의 마음에는 언제나 서양 기독교를 조선 왕실에 전파하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유교 문명이 공고하게 자리한 조선에서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비를 진료하러 처음 궁궐로 들어가던 날, 그녀는 동료 선교사로부터 왕비를 만나면 종교적인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다. 조선은 서양 선교사가 그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단지 묵인하고 있을 뿐이라는 이유였다. 그랬던 조선의 궁궐에 1894년 겨울 크리스마스 트리가 밝혀졌다. 왕비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트리를 바라보며 이를 만든 미국인 여성에게 한껏 호감을 표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의미까지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 했다. 이는 언더우드 부인에게 기독교 교리와 복음을 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왕비는 무척 흥미를 보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언더우드 부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국왕과 세자에게 몸을 돌려 그녀의 이야기를 되풀이해 주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심경 변화, 아니 조선 왕실의 태도 변화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때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굳히고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던 시점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1895년 을미사변까지 이어져 명성황후 또한 조선의 운명과 함께 희생되었다. 이 시기 명성황후는 유럽과 미국에서 온 여성들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1894년 겨울 동안 왕비는 두 번이나 언더우드 부인의 친구들을 모두 초대했다. 왕비는 경복궁 안에 있는 연못에서 이 서양 여성들이 스케이트를 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마음을 썼고, 왕비 처소 근처 작은 정자에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위기의 시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서양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자 한 왕비의 필사적 노력이었다.

명성황후는 언더우드 부인에게 미국에 대한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조선도 미국처럼 행복과 자유와 힘이 있었으면 하고 탄식했다. 언더우드 부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비에게 미국보다 더 훌륭한 나라가 있다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했다. 죄악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나라, 한없는 영광과 착함과 기쁨만 있는 나라를 설명하는 언더우드 부인에게 명성황후는 말했다.
“전하와 세자와 나 모두가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대목에서 익숙한 조선 여성의 자세가 떠올랐다. 가족의 운명을 책임지는 결연한 조선 부인의 모습은 명성황후도 예외가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전근대 사회 조선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행위의 주체였다. 여성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 있지 않을지라도 각자의 소속 공동체의 주체로서 당연하게도 역할을 담당했다. 이점에서는 왕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조선에서 왕비는 개인이 아닌 왕실이라는 팀에 소속된 하나의 주체였다. 고종과 세자는 국가의 상징이었지만 명성황후에게는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남편과 자식이었다. 따라서 국가와 가족을 넘나드는 명성황후의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 조선사회의 여성들의 생각을 찾아내고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국정 운영을 위해 정치에 거침없이 뛰어드는 대담함, 자식을 위해 무속에 빠져 국고를 탕진한 어리석음, 외교를 위해 서양인들을 매료시킨 총명함 등등. 명성황후를 묘사하는 서로 들어맞지 않는 이 모든 각기 다른 설명들이 모순 없이 결합되기 위해서는 그녀가 서 있던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명성황후만큼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역사적 인물은 흔치 않다. 국가의 운명이 다해가던 19세기 말 그 위기를 헤쳐 나가고자 했던 왕비로 평가되기도 하고,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매관매직을 자행했던 부정부패의 상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을미사변이라는 전대미문의 국가 범죄 희생자이기에, 수많은 대중 매체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숭고한 최후를 맞은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성녀와 악녀의 극단적 갈림, 무엇이 명성황후의 진짜 모습인가? 아직 정답을 말하기는 힘들다. 명성황후가 살았던 시대, 그녀가 생활에서 숨 쉬고 있던 공간들이 어떤 환경과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외세의 침략과 조선의 대응이라는 큰 틀에서만 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행동과 선택을 바라본다면 시대와 인간에 대한 이해는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명성황후에 대한 이해 역시 지금까지 익숙했던 큰 틀을 넘어 실제로 그녀의 삶을 이끌었던 여러 요소들을 파악해야 진정한 이해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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