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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신종 육아법 / 마준석

우리는 최근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화풍으로 그려진 사진들이 전 세계에 넘쳐나는 것을 목격했다. 여든이 넘으신 나의 할아버지께서도 즐겨 사용하시니, 유행은 전지구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세대를 망라했다. 챗GPT를 소유한 오픈AI의 최고경영자 샘 울트먼은 당사의 “그래픽처리장치가 녹아내리고 있다”며 우는소리를 하고 심지어 사용자들이 ‘고맙다’와 같은 감사 인사를 자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챗GPT가 매번 “천만에요!”라고 답하는 것만으로도 수백억 원의 전기요금이 추가되기 때문이다.1) 이제 챗GPT의 사용자는 5억 명을 넘어섰다. AI 챗봇을 구동하는 데이터센터는 현재 전 세계 전력 소비량의 약 2%를 사용하고 있지만, 2030년에는 소비량이 두 배 이상 증가하여 일본 열도 전체의 전력 소비량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2)


생성형 인공지능은 낯선 언어로 타향살이를 하는 나에게도 밀접하다. 섬유 얼룩 제거제를 하나 사려고 해도 얼룩이 잉크, 페인트, 과일, 음료수, 기름, 소스, 풀물, 흙, 피, 녹 중에 어떤 종류인지 그리고 섬유는 면, 울, 가죽 중 어떤 종류인지, 형태는 젤인지 솔인지 스프레이인지에 따라 온갖 종류의 얼룩 제거제를 만들어 놓는 기이한 전문성의 나라인 독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진 한 장으로 모든 제품의 특징과 차이점을 알려주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요긴하다. 나의 삼성 갤럭시25에는 구글의 AI 제미나이가 기본 탑재되어 있는데, 구글은 갤럭시폰에 제미나이를 독점적으로 탑재하는 대가로 삼성에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 있다.3)

 

제미나이와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삶의 일부다. 그 활용은 단순히 그림을 변환하거나 정보를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서적인 영역인 육아나 교육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그러니까 요즈음 “스마트한” 부모들은 챗GPT를 활용해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뿐만 아니라 1부터 100까지 수를 세어달라는 반복적인 요구를 대신하고, 현기증 나는 “왜요?”의 무한퇴행으로부터도 스스로를 방어한다.4) 챗GPT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경이로운 인내심으로 아이들의 모든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육아 커뮤니티에서 공유되고 있는 ‘스마트하게 챗GPT를 사용하는 노하우’에 대해 몇몇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한다. 예컨대 한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챗GPT가 가장 잘하는 게 틀린 정보도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이라며 “육아는 100개 중 99가 맞아도 1개가 틀리면 큰일이 날 수 있다. 아직 옳고 그른 정보를 구분할 능력이 없는 챗GPT를 활용하기엔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5) 그러나 알다시피 부모들도 매번 틀리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낸다. 아이들이 오류에 당장 속을지언정, 앞으로 그에게 펼쳐질 기나긴 배움의 시간들은 오류를 교정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따라서 오류나 ‘환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기술적인 난관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 실존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철학자 돈 아이디가 짚듯이 보다 경계해야 할 문제는 오류가 아니라 축소다. 예컨대 전화기가 타자의 목소리를 확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할 때의 타자의 풍부한 시각적 현전을 가지지는 못한다.6) 그러나 통화에서 우리는 마치 타자의 현전을 직접 경험하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지고, 이 착각은 결코 주목되지도 수정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생성형 인공지능에서도 중요한 지점은 그것이 경쟁하는 사실이나 해석들 중에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에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특정한 정보를 정합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도록 설계될수록, 그 정보가 실상 다양한 해석들과 편견으로 간섭되어 있고 내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은 계속해서 배제된다. 그러니까 객관적 정보라는 지위 자체가 언제나 문제적이라는 사실 자체가 누락되는 것이다. 따라서 적나라한 오류나 환각은 언젠가 교정될 수 있는 것으로서 사소한 위협을 이루지만, 진실을 내세운 착각은 수정되지 않고서 진실 내부에서 진실을 갉아먹는다.

 

사실 스튜디오 지브리의 화풍으로 그려진 AI 이미지들은 지브리 작품에 단지 한 측면만을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브리의 작품이 지닌 매혹적인 개성은 단순히 선이 옅은 수채화 작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웅웅대며 꿀렁거리는 기계장치들과 감정에 따라 부풀어오르는 눈과 입, 그리고 몽글거리다 뭉그러지고 마는 사물들에 있고, 더 나아가 꿈결같이 종잡을 수 없는 사건들과 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강인한 인물들에 놓여있다. 결국 지브리 화풍의 AI 이미지들은 지브리의 외양만을 단조롭게 복제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해서, 지브리 작화 AI 이미지 열풍과 그리고 챗GPT가 지브리의 저작권을 무단으로 침해하고 있다는 사회적 비판 양자에 대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일관된 침묵과 무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단조로운 AI 복제 이미지들은 지브리 스튜디오를 전혀 재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무단으로 침해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생성형 AI는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명약관화하게 이해하고, 어떠한 즉흥성도 없는 정합적인 문장을 말하며, 조롱과 모욕에 상처받지 않고서 사과하고. 농담에 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발적인 아이디어보다는 통계적 다수성에 의존한다. AI의 언어는 엄밀히 말해 인간의 사회적 언어가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을 전부 누락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AI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방식으로 정형화된 언어인 프롬프트를 구사해야만 한다. 결국 진정한 문제는 흔히들 말하듯이 AI가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자료를 학습하거나 혹은 AI가 인간과 너무 닮아 기술적 실업을 야기할 것이라는 점이 아니다. 오히려 AI와의 대화가 특정한 방식으로 인간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이고, 인간이 챗봇과 소통하기 위해 챗봇처럼 생각하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챗GPT를 활용한 “스마트한” 육아법은 필연적으로 좌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동화책을 읽어달라거나 숫자를 세어달라는 지난한 요구에서 아이들이 실제로 욕구하는 바는 자신을 쳐다보는 부모의 시선과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온기가 전해지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문자와 숫자 너머에서 흘러 들어오는 사랑의 현전을 욕구한다. 챗GPT의 정합적이고 체계적인 언어가 결여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말이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 딸 리사가 외모 콤플렉스에 빠져 우울해하고 있을 때, 호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되짚어가며 최선을 다해 딸을 위로해줄 말을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연 호머가 한 말은… “차 구매와 대여, 장점과 단점: 한 해에 몇 마일이나 주행할 것 같아?” 이렇게 완벽하게 잘못된 응답 속에서 리사는 아버지인 호머가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정말로 답하고자 했던 것은 차 구매 팁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한다. 소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실패한 문자 너머에서조차 흘러 들어오는 사랑말이다.

<심슨 가족> 유튜브 쇼츠7) 
<심슨 가족> 유튜브 쇼츠7) 

그러므로 챗GPT가 경이로운 인내심으로 아이들의 모든 요구에 부응한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끝내 만족할 수 없다. 이는 하나의 역설이다. 아이들의 현기증 나는 “왜요?”의 무한퇴행에도 결코 실패하지 않고 응답하는 챗GPT는 그 자체로 결여 없는 타자를 구현하지만, 바로 그러한 결여 없는 완전한 응답 때문에 아이들은 진정한 응답, 그러니까 사랑으로부터 소외되고 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점은 ‘왜요병’이 겨냥하는 바가 부모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의 결여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 못지않게 배워야 하는 것은 타자의 결여다. 아이는 결여 없는 타자인 챗GPT가 결여한 것을, 그러니까 부모의 지친 기색, 옅은 한숨 나아가 부모의 무지와 실패 그 자체를 배워야만 한다. 부모가 아이의 모든 요구를 성공적으로 충족시켜줄 때 아이는 부모와의 원초적인 합일 속에 갇힌 채 그 안에서 질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신이 전일(全一)하지 않다는 사실은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찢김의 상처를 남기지만, 아이는 부모의 실패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를 구성할 것이고, 결여가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신비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6)     Don Ihde (1979), Technics and Praxis, 24-26 pp.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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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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