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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셈이야말로 혁신을 만든다 / 오영진

1. <이코>의 영향력


우에다 후미토는 현재 gen DESIGN의 대표로, 게임 <이코>(2001)와 <완다와 거상>(2005), <더 라스트 가디언>(2016)의 개발자입니다. 초기작 <이코>는 누적 200만장 팔린 것에 비해서 그 영향력은 강력합니다. 2021년은 게임 <이코>가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게임 잡지들은 현직의 게임개발자들을 찾아가 <이코>가 그들의 게임 디자인에 끼친 영향력을 다루느라 바빴습니다. 일종의 간증인 셈입니다.

아마도 올해 플스5 진영의 최고 히트작이 될 게임 <엘든 링>(2022)의 개발자 미야자키 히데타카는 어릴 적 우에다 후미토의 <이코>를 플레이하고 나서야 게임이 완전히 다른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느끼고 게임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HBO가 총 10부작 회당 91억원을 들여 제작하고 있는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개봉일 미정)는 동명의 메가히트 원작 게임을 기초로 만들어집니다. 원작자 닐 드럭만은 학창시절 좀비물 장르와 <이코>의 시스템을 믹스해서 최초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게임 매니아로 유명한 영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코>에 대해 이렇게 극찬합니다.

<이코>는 오랫동안 전해져 온 설화나 애니메이션, 키리코의 회화와 같은 “빛”의 감각이 만들어낸 세계를 무대로 한 환상적인 여로입니다.

<이코>의 영향을 받은 의외의 인물도 있습니다. 밴드 라디오 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는 <이코>가 최초로 감정이입을 한 컴퓨터 게임이었고,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공포를 주는 것이 아닌 단지 손을 잡고 도와주고 싶다는 감정을 줄 수 있었다고 추억합니다. <Halo 4>(2012)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쉬 홈즈나 <언차티드 3>(2011)의 개발자들은 <이코>를 게임 제작 과정 초기부터 참조했다고 합니다. <림보>(2010), <저니>(2012), <페즈>(2012) 등의 혁신적인 인디게임 역시 모두 <이코>의 영향을 받거나 시스템을 차용해 만들어졌습니다. 이쯤 되면 <이코>는 인디와 메이저 구분없이, 오늘날 거의 모든 성공한 컴퓨터 게임들에 영감을 준 셈입니다. 게임 산업계에서 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게임은 <슈퍼마리오> 정도 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코>는 그 명성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게임 디자이너들에게 <이코>는 여전히 영감의 원천입니다. 하나의 작품이 자신의 성공을 넘어 그 업계와 인접 분야까지 두루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게임 <이코>의 매력은 무엇이고, 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2. 고집 센 ‘빼기의 디자인’


우에다 후미토는 오사카 예술 대학의 미대생이었습니다. 1992년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추상미술을 전공하지만 정작 전통적인 미술작가의 커리어를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굳이 추상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추상미술이 아이디어만으로 하루 이틀만에 작업할 수 있는, 벼락치기가 가능한 분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성실한 태도처럼 보이지만 아이디어를 최대한 단순하고 명료하게 바꾸는 것을 선호하는 본인의 미적 취향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추상미술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지만 동시에 아이디어의 모든 것을 담아야 하는 장르이기에 그저 심플함만을 추구한다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하되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는 모순된 과제에 우에다는 매료된 것입니다.

1994년 대학을 졸업한 우에다는 소니가 젋은 아티스트를 후원하는 이벤트에 선정되어 요코하마의 한 복합쇼핑몰에 작품을 설치했습니다. 작은 새장을 세우고 그 안을 흙더미로 채웠습니다. 지하에 사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표지판을 배치하고 쇼핑객들이 접근할 때마다 리모콘의 버튼을 눌러 그들에게 흙을 차는 모터를 작동시켰습니다. 관객들은 자신들에게 묻은 흙을 털어내고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평면의 그림보다 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우에다의 실험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의 초상화와 캐리커쳐를 이야기를 곁들여 보여주기를 좋아했던 우에다는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의 표현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더 입체적으로 구현가능함을 깨닫고, 졸업 직전 자신의 오토바이를 팔아 당시 아미가(AMIGA) 시스템이라는 컴퓨터를 구입했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독학했습니다. 이후 CG기술을 습득하자 신생 게임 개발사 'WARP'에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전달해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소니가 그에게 독자적인 게임을 만들 첫 기회를 줄 때도 그가 회사에 제출한 것은 짧은 CG데모뿐이었지만 독특한 미적 감각을 인정받아 복잡한 기획서를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도상적 표현이 긴 문장기술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절제되면서 최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담고 동시에 생생하게 구현되는 어떤 세계를 그는 꿈꾸었습니다. 이 같은 미적 지향성은 우에다의 게임 디자인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게임 <이코>를 모르는 분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코>에는 체력, 레벨, 아이템 등의 통상적인 게임메뉴 창이 없다.

  2. <이코>에는 언어지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3. <이코>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고작 서너명 뿐이며, 적 캐릭터는 형체가 없는 그림자로 표현된다.

  4. <이코>의 플레이어는 주인공 뿐 아니라 히로인 요르다의 손을 잡고 다녀야 한다. (신경써야 하는 캐릭터가 2명이다.)

  5. <이코>의 BGM은 없으며, 그나마 엠비언트 사운드가 주를 이룬다.

  6. <이코>의 주인공의 시야는 매우 제한적이며, 이는 플레이어에게도 마찬가지다.


쉽게 말하자면 <이코>는 통상의 게임들처럼 수치를 나타내는 잡다한 정보가 생략되어 있고, 오로지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캐릭터와 상호작용하는 환경, 진행을 방해하는 적이라는 단순화된 구도 안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게임을 통해 구현하고 싶었던 것은 분명히 존재할 것만 같은 주인공의 몸과 맞잡은 소녀의 손의 감각이었습니다. 우에다 후미토는 ‘게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용자를 어떤 좋은 기분으로 이끄는 구조”라고 대답한 적 있습니다. 게임성을 게임룰의 균형, 재미 등으로 정의하는 통상의 게임 디자이너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는 공평한 게임규칙이 아니라 아름다운 게임경험을 디자인하려 했습니다.

대개의 액션 게임이라고 한다면 성에 동전을 놓아 플레이어를 유도하거나, 어드벤처 게임이라면 힌트를 주는 간판을 세우거나, 연애 게임이라고 하면 서로 손을 잡으면 하트가 나오게 한다던가 등의 장치를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에다는 그러한 장르적 규칙을 준수하지 않습니다. 그는 플레이어가 어떤 기분에 이르게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면서,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삭제해 버렸습니다. 이후 이를 ‘빼기의 디자인’이라고 명명합니다.


“좌회전을 해서 타협한 비전보다는 원래의 아이디어를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녀의 애니메이션이건 지도의 디테일이건 필요에 따라 요소를 제거하고 빼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미완성이거나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제거했습니다.” (우에다 후미토, 개발자 인터뷰, 2002)


3. 없는 자원으로 최대한의 표현을


단지 기술적 구현이 어렵거나 자원이 모자라서 빼기는 쉽습니다. 이러한 빼기에는 그때 그때의 한계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이므로 아름다운 일관성이 없습니다. 우에다의 빼기는 그러한 빼기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코>의 주인공 뿔난 소년의 움직임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소년을 낭떠러지로 가도록 조종하면, 소년은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허우적댑니다. 이후 간신히 난간을 붙잡거나 다시 균형을 잡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적과의 대결, 퍼즐 맞추기라는 일반적인 게임요소를 우위에 둔다면 분명 생략할 수 있는 디테일입니다.

그런데 우에다 후미토는 번거롭지만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캐릭터를 묘사합니다. 도리어 적들의 다양한 디자인이나 길에서 마주치는 NPC들의 장황한 대사들을 삭제해 버립니다. 그는 게임 내 캐릭터의 AI를 프로그램적으로 최적화하는 것보다 진흙을 덧대듯 손수 추가하는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이동하는 루트의 포인트가 되는 점과 선을 더 촘촘히 연결하고, 모션 연출의 거친 부분을 매끄럽게 움직이도록 꾸준히 수정했습니다. 대신 다른 연산 객체들을 삭제하여 게임의 자원을 최적화 했습니다.

디자이너는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캐릭터 자체가 살아움직인다는 감각을 극대화하려 했기에 이 같은 빼기에는 일관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비교해보면 단지 일관성만 가지고 이것 저것 더하기만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덕지덕지 새로운 기능을 더하면 결국에는 아름답지 않은 일관성이 되기 쉽습니다. 아름다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 관습과의 투쟁이 필요합니다.

<이코>는 게임 속에서 소년이 보호해야 할 소녀가 곁에 없다면 함께 의자에 앉지 못해 세이브가 되지 않고, 스테이지 끝에서 문을 열 수 없도록 스토리를 설정했습니다. 소녀는 게임의 난이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고 게임의 방식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번잡한 메뉴나 튜토리얼이 필요없도록 일관되게 캐릭터 간 관계 안에서 그 기능을 녹여낸 것입니다. 플레이어가 두 명의 캐릭터를 돌봐야 하는 과잉은 게임 메뉴의 삭제로 균형을 유지합니다. 동시에 항상 신경 써야 하는 캐릭터 객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에 강하게 유착되게 만듭니다. 의도한 바를 성취하는 균형입니다. 2001년 당시 <이코>는 게임의 표현을 넘어선 게임처럼 보여졌습니다. 단순한 오락적 게임이 아니라 플레이 가능한 입체적인 애니메이션처럼 보였습니다. 적은 단순했지만 주인공의 행동은 복잡하고, 환경에 맞춰 변화했습니다. 음악은 특정한 순간에만 흘러나왔지만 도리어 감정이입의 밀도는 높았습니다.




4. 게임<이코>는 이후 게임 디자인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이코>의 미니멀하면서도 압축적인 게임 디자인은 이후 게임 디자인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미야자키 히데타카의 게임 <다크 소울>시리즈는 플레이어를 미스테리한 성 안에서 시작하도록 하지만 어떠한 잔소리도 명령도 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들은 버려진 문서나 문양 등을 독해하면서 이 성에서 일어난 수백년간의 이야기를 상상합니다. 게이머들은 이렇게 최대한 머리를 사용해 프롬소프트웨어가 제작한 게임의 세계관을 파악하는 일을 ‘프롬뇌'를 가동한다고 농담삼아 이야기합니다. 플레이어의 능동성을 끌어내는 이러한 게임 디자인은 언뜻 불친절하고 불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이야기의 퍼즐조각을 맞춰 나갔을 때 얻는 쾌감이 그것을 넘어섭니다. 미니멀한 디자인은 내용이 축소된 것이 아니라 압축된 것이며, 그 압축을 풀어나가는 존재가 플레이어 자신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코>가 수상하고 쓸쓸한 성 안에서 모든 스테이지를 품듯이 <다크소울> 또한 모든 플레이가 성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또 다른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이탈리아의 판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는 보도, 다리, 아치와 계단이 어우러진 상상의 감옥(Imaginary Prisons)을 종종 그렸는데, 이는 고스란히 <이코>의 건축양식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에다의 감각이 고전으로부터 온 것임을 직감케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하나의 성이지만 내부는 미로의 구조를 가진다는 특성을 <다크 소울>이 <이코>에서 차용했고, 실은 우에다가 피라네시에게서 훔쳐온 것입니다.



피라네시가 그린 건축물와 <이코>의 건축물

한편, 닐 드럭만의 <라스트 오브 어스>시리즈는 좀비바이러스 때문에 망해버린 세계 속에서 한 중년 남성(조엘)이 동행하는 한 소녀(엘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협업해야 하는 게임입니다. 세계의 비정함 앞에서 발생하는 두 캐릭터 간 교감은 플레이어가 끝까지 게임을 플레이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인이 됩니다. 이 게임은 세계를 구하자는 커다란 구호를 외치지 않는 유일한 좀비물일 것입니다. 오로지 조엘과 엘리의 안전한 동행만이 중요합니다. 이 같은 게임 다이내믹은 <이코>의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구축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 1>의 매니아들은 이 부분에 감화되어 있기에 <라스트 오브 어스 2>에서 두 캐릭터 중 하나가 죽게 되어 전편처럼 교감을 할 수 없게 되자, 제작자를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가상으로 구축된 세계의 캐릭터에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만들고, 사사로운 관계가 곧 세계를 구하는 문제보다 앞서는 스토리공학은 실로 게임적인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게이머가 게임 <림보>나 <저니>의 플레이 중, 비언어적인 교신행위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상상력으로 게임적 시공간을 채우도록 유도하는 장치는 현대의 게임들이 곧잘 응용하는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게임 <다크 소울> 스크린 샷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스크릿 샷

게임 <저니>의 스크린 샷

‘빼기를 하되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최대한 뺀다’는 그의 디자인철학은 게임매체의 잠재성을 당대의 한계를 넘어 극단적으로 여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그의 사례는 혁신이 모든 요소를 만족시키면서 전체적으로 임계점에 이르는 방식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이 아닌 것들을 과감히 버리면서 특정부분에서 한계돌파한 결과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련된 방식이라고 여기는 게임의 공간디자인과 스토리텔링 공학 등을 과거 <이코>가 빼기의 디자인을 통해 선취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뺀다는 것이 실은 미래를 더하는 일이라는 역설을 끌어냅니다. 우에다 후미토는 현재 <이코>와 <완다와 거상>, <더 라스트 가디언>의 세계관을 연결할 수 있는 차기작을 준비 중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의 신작이 무엇을 더했는 지가 아니라 빼고 있는 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바로 그 뺄셈에서 미래가 오기 때문입니다.


오영진(교과목 <기계비평>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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