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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들을 위한 애도와 대학의 과제 / 김헌주

서정민의 비극

2010년 5월 25일 조선대 시간강사 서정민이 생을 내려놓는 선택을 했다. 대학의 착취 구조 가 빚어낸 안타까운 참극이었다. 그의 유서에는 학생들 시험지가 연구실에 있다는 내용이 있었고, 자신의 채무를 액수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적어놓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책임을 다하려 했던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지도교수의 착취와 부패한 대학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서에서 지도교수의 논문 54편(교수의 제자 포함)을 대필했음을 고백했고, 특정 대학에서 자신에게 교수채용 대가로 제시했던 금액까지 밝혀놓았다. 이런 치욕을 견디면서도 실력으로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다가 결국 비명에 떠났다. “세상이 밉습니다. 한국의 대학 사회가 증오스럽습니다!”는 절규보다 더 아픈 것은 다음의 내용이었다.


“전국의 시간강사 선생님들에게 : 힘내십시오. 그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날’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언제 올것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출처: https://antihakbul.jinbo.net

김동애·김영곤 부부의 투쟁과 강사법 제정

서정민의 유서에는 “김동애 교수님! 죄송합니다. 투쟁에 함께 하지도 못했습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김동애는 시간강사 교원지위 회복을 위해 남편 김영곤과 함께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했던 해직강사이다. 서정민의 비극 이전에도 대학 강사들의 지위나 처우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이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강사부부인 김동애와 김영곤은 기나긴 시간강사 교원지위 회복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김동애·김영곤 부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투쟁으로 2019년 8월 1일,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회복과 고용안정을 골자로 하는 강사법 즉 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전국 각 대학에 적용되게 되었다. 강사법 실시가 확정된 2019년 9월에 부부는 천막을 걷고 오랜 농성생활을 마무리했다.


강사법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 고등교육법상 교원구분에서 교수, 부교수, 조교수와 함께 강사가 교원신분으로 등록된다. (2) 임용절차는 공개채용이며 구체적 근무조건이 명시된 서면계약으로 진행된다. 강의 보장 시수는 특정 강사의 독점을 막기 위해 최대 6시수, 예외적으로 9시수를 허용한다. (3) 기본 계약기간은 1년이며, 신규임용포함 3년까지 재임용 절차를 보장하고 당연퇴직 조항을 삭제한다. (4) 방학 중 임금을 지급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교원지위 회복과 재임용 절차 보장 등 아직 부족하지만, 이전보다는 진전된 고용조건을 보장하는 법률이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빛을 본 것이다.


김정희, 그리고 우리의 과제

그러나 강사법 제정 전후로,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대학이 강사법 제정 직전에 비용 부담을 이유로 대학의 강좌를 대폭 축소했던 것이다. 사라진 강좌로 인해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었고, 강사들의 아우성도 커져만 갔다. 이 와중에 비극이 발생했다. 2019년 12월 13일, 한 명의 강사가 세상을 등진 것이다. 고 김정희 강사이다. 그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인 동해안별신굿 악사이자 전수교육조교였다. 이런 경력을 인정받아 1998년부터 20년 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지만, 강사법 시행 이후 학위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강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강사법이 서정민의 비극이 계기가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결과이다. 따라서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이번 사태는 강사법의 여파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언론은 이번 사건을 강사법의 탓으로 돌리는 기조의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출처: 머니투데이(2019.12.16)

하지만 사태의 근본 원인은 강사법이 아니다. '대학교원 자격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강사의 자격은 연구실적 1년 이상, 교육경력 1년 이상, 합계 2년 이상의 '연구교육경력'을 가진 자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임용규정에도 규정엔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이 없어도 ‘해당 분야의 권위자로서 교육 및 연구경력이 10년 이상인 사람’은 인사위원회 심의를 거쳐 강사로 임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지만 동해안별신굿 전승자인 교육경력 20년의 김정희 강사는 학위와 무관하게 강사자격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예종은 2019년 2학기 강사 공채 공고에서 전문대학 졸업 이상 학력으로 지원자격을 한정함으로써 지원자격 조건을 박탈해버렸다. 결국 강사법이 문제가 아니라 강사법을 핑계로 1명의 베테랑 강사를 해고한 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학을 떠나고 세상을 등진 사람들을 애도하는 것은 대학과 관련 있는 연구자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문제는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대학은 사회의 공공재이자 고등교육 기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의 한 주체인 강사에 대한 처우개선과 고용안정이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와 관련된 시급한 과제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강사법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제정되었지만, 사실 강사법 적용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첫째, 방학 중 임금 지급 기준의 불확실성이다. ‘방학 기간에도 임금을 지급하며 이 경우 임금수준 등 구체적인 사항은 임용계약으로 정한다’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1개월 소정 근로시간이 60시간 미만인 단시간 근로자는 직장가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4대보험 중 핵심인 건강보험 직장가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셋째, 학문후속세대 즉 박사취득 전후 소장학자 그룹의 강사시장에서의 소외 문제이다. 학문후속세대는 공채 시 기존 강사들과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회를 주지 않으면 경쟁력이 생길 수가 없다. 그래서 학문후속세대의 채용을 권장하고 있으나 강제력이 없으므로 한계도 뚜렷하다.


강사법 적용 후 이제 한 학기가 지난 시점이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문제점들은 더욱 많이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강사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 강사 처우개선은 비단 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수·대학원생·학부생 등 대학의 모든 주체와 관련된 문제이며, 고등교육 전체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학은 대학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강사법 전후로 벌어졌던 폭력적인 구조조정을 중단하여야 한다. 교육부 또한 대학의 이런 행태를 묵인하지 말고 엄중히 단속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이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고용구조를 혁신하지 않는 한 강사들을 비롯한 대학 비정규교원의 미래는 없으며, 더 나아가서 미래 고등교육의 주역이 되어야 할 석박사 과정생들의 미래, 그리고 고등교육의 미래도 불투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故 서정민 님과 김정희 님을 애도하며.

김헌주 (충북대 박사 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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