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라는 환상을 횡단하는 분석가의 도약 -서영채의 『동아시아 비교문학: 근대성의 서사, 담론, 정동』서평 / 정기인
- 한국연구원

- 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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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5년 전의 일이다.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시절,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거목이었던 김윤식 선생이 정년퇴임한다는 것을 들었다. 1학년 우리는 김윤식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지만, 그래도 정년퇴직 인터뷰를 위해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우리에게 “나는 우리 세대의 과업을 짊어졌듯이, 너희는 너희 세대의 과업을 찾아 이를 짊어져야 한다.”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며, 당신 세대의 문학 연구가 “독립운동을 하듯이” 이루어졌다고 회고했다. 몇 년 시간이 지나고야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식민지로 ‘근대’가 이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영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근대의 ‘맹아’를 찾아내어 기어이 ‘한국 근대 문학’이라는 독자적 영토를 지켜내야 했던 절박함. 서구이론과 일본의 매력적 담론들에 맞서서 복사기도 없던 시절 작품들을 노트에 필사하며 밤을 새웠던 그 연구들은 투쟁이었다. 물론 그 당시,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들은 이를 허깨비와 씨름하는 것 같은 일로 여겼었다. 도대체 근대라는 것에 집착하는 연유를 머리로는 어렴풋이 이해했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근대나 식민지라는 조건은 ‘과거’에 불과했으므로.
그 ‘(할)아버지 세대’의 투쟁이 ‘끝난’ 자리에서 연구를 시작한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인가. 나는 그 답을 ‘동아시아 비교문학’에서 찾으려 했으나, 그것은 또 다른 거대한 벽이었다. 대체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박사 1학기에 나는 야심차게 동아시아 비교문학을 하겠다며 이광수, 나쓰메 소세키, 루쉰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든 첫 번째 발표문1)을 들고 중국문학 연구자나 일본인 교수들 앞에 섰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각국 문학 연구사가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이었다. 이들에 관한 1차 문헌들만 읽고 연구해서는 ‘아마추어’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각국에서 쌓아 올린 2차 문헌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1년에도 수십 편씩 쏟아져나오는 연구들을 파악하는 데에도 평생이 걸릴 일이었다. 이후 비교문학의 시야를 조금 돌려서 한문과 근대시의 관계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쓴 이후 일본 대학에서 특임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 그때도 비교문학의 꿈을 못 잊어 일본에서의 중국문학과 일본문학 연구자들과 함께 ‘동아시아 근대문학 교과서’ 집필 모임을 오랫동안 가졌지만, 이 또한 끝내 미완이 되고 말았다. 각국 개항의 시기가 다르고 근대의 속도와 상황이 다른 3국의 문학을 기계적인 연대기 위에 놓았을 때, 도출되는 것은 어긋남뿐이었고, 그렇다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비교의 기준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동아시아 비교문학’이라는 문(文/門/問)은 열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내 개인적 역사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이 책 『동아시아 비교문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막막했던 후학에게 ‘세 개의 열쇠’를 건네고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내 인식 속에 서영채 선생이 김윤식 선생의 계승자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덧 ‘젊디젊은’ 선생이었던 서영채 선생의 퇴임도 불과 1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소식에 25년 전 김윤식 선생의 퇴임 모습과 서영채 선생의 현재가 묘하게 겹쳐 보였다. 실제로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국내 연구자가 바로 김윤식 선생이라는 점, 그리고 과거 내가 일본에 있을 때 거동이 불편해진 김윤식 선생을 대신해 특강을 하러 오셨던 분 역시 서영채 선생이었다는 기억이, 내 안에서 두 분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이어주고 있다.

이 책은 동아시아 3국의 근대문학 ‘여는’ 방법론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 열쇠는 지정학적 상상력이다. 저자는 일본을 근대성을 선취한 '보편'의 자리에 놓고, 중국을 '전쟁터'로, 한국을 '포로수용소'로 비유한다. 이를 통해 한중일 비교가 가능해지는데, 이미 이루어진 근대성의 속물성에 대해서 환멸감을 표시하는 소세키,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전쟁터’에서 중국인들을 향해 고함치는 루쉰, 수인(囚人)들에게 어떻게든 살아남을 희망을 조작해내야 했던 ‘포로수용소’에 갇힌 이광수와 염상섭과 같은 선명한 이미지가 제시된다. 이를 통해 유사한 기질과 문제의식이 처해있는 조건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서술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열쇠는 ‘가족 로망스’의 서사학이다. 저자는 근대를 마주한 작가들의 태도를 세 명의 아들에 빗댄다. 가문의 안위를 책임지려 했던 ‘첫째 아들(이광수)’의 계몽 서사, 아버지의 위선에 저항하며 개인의 진정성을 찾으려 했던 ‘둘째 아들(나쓰메 소세키, 루쉰, 염상섭)’의 윤리 서사, 그리고 아예 집을 뛰쳐나가 예술적 파멸을 선택한 ‘셋째 아들(다자이 오사무, 이상)’의 탕아 서사다. 특히 다자이 오사무의 파멸을 충동적인 일탈이 아니라, ‘예술가’라는 이상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성실하게 수행된 ‘모범적 탕아’의 기획으로 읽어내는 대목은 비평가 서영채 선생의 직관이 빛나는 대목이다.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열쇠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경유한 ‘증상의 독해’다. 저자는 텍스트를 작가의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 시대의 모순이 뚫고 나온 ‘증상’으로 읽는다. 예컨대 다케우치 요시미가 루쉰을 ‘저항의 투사’로 호명한 것은 다케우치 자신의 불안이 투영된 ‘히스테리 담론’의 결과로 읽는 식이다. 반면 저자가 복원해낸 실제의 루쉰은 180여 개의 필명 뒤에 숨어 타인의 말에 쉼표와 물음표를 찍었던 ‘분석가’였다.
그러나 라깡의 담론을 전유하며 한중일 텍스트들의 증상을 독해하며 이 책 자신을 ‘분석가’의 위치로 정립시키는 바로 그 지점이, 이 책의 매혹이자 동시에 위험한 도약의 순간으로 보인다. 저자는 ‘분석가 담론’의 위치에서 텍스트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하지만 노련한 정신분석가의 ‘경청’은 수동적인 청취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프로이트와 라깡을 통해 배웠다. 그것은 일반인은 따라잡기 힘든 경험과 직관을 통해 환자의 파편화된 진술을 하나의 논리로 꿰어맞추는, 때로는 폭력적일 수도 있는 ‘재구성’의 과정이다. 책 곳곳에서 발견되는 매혹적인 (어떤 이에게는 논리적 비약으로 보일 수도 있는) 단정들은 비평가 서영채 선생 특유의 직관이 빛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실증적 연구를 중시하는 연구자에게는 따라가기 힘든 아찔한 곡예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다음 세대의 연구자로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한계들도 존재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짧은 사과로 갈무리하고 넘어갔듯, 이 거대한 근대성의 드라마는 철저히 ‘남성’ 작가들만의 무대다. 남성들의 서사만으로 근대를 재구성하는 방식이 지닌 폭력성과 젠더 편향은, 이제 ‘우리’에게는 묵과할 수 없는 제1의 비판 지점이 된다. 또한 ‘동아시아 비교문학’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논의의 무게중심이 한일 비교에 쏠려 있다는 점, 중국 문학의 대표로 유일하게 호출되고 있는 루쉰마저도 주로 일본의 다케우치 요시미를 경유하여 해석된다는 점은 여전한 불균형으로 남는다. 또, ‘문학’이라 했지만 윤동주의 시 한편 「팔복」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설이라는 점도 못내 아쉬운 면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책이 거의 끝나가는 8장의 결론부에 이르러 저자는 “그러니까 동아시아의 서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을 것”(386)이라는, 지금까지 책을 열심히 따라온 독자의 마음을 철렁하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경계를 짓는 모든 시선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낳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적어두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역설적으로 동아시아라는 경계를 허물기 위해, 그 경계 위에서 치열하게 비교를 수행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결론은 갑자기 돌출되며 이 책을 열심히 읽어온 독자를 당혹게 한다.
하지만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독법을 수행해 온 저자의 방법론을 빌려, 이 ‘돌출된 결론’ 자체를 저자가 수행한 하나의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정신분석의 최종 목표인 ‘환상의 횡단’은 환자가 대타자의 결여를 직시하고, 그 결여를 메우고 있던 환상의 막을 찢고 나아갈 때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분석가는 분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주인'의 자리를 스스로 폐기함으로써 환자를 홀로 서게 만들어야 한다.
저자가 500여 쪽에 걸쳐 쌓아 올린 ‘동아시아 비교문학’이라는 정교한 건축물을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허무는 이 행위는, 독자/환자로 하여금 ‘동아시아 비교문학’이라는 거대한 기표가 실체 없는 환상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학술적 결단이자 급진적 단절로 읽어볼 수 있다. 즉, 동아시아라는 유령을 없애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유령을 가장 정밀하게 호명해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음을 보여주는 저자 자신의 수행적 증상인 셈이다.
김윤식 세대가 문학을 통해 ‘국가’와 ‘민족’을 호명하며 그 실체를 만들어내는 ‘주인’의 역할을 자임했다면, 서영채 세대는 그 거대 서사의 억압 아래 신음하는 내면을 해부하는 ‘분석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분석은 여전히 ‘근대성’이나 ‘동아시아’와 같은 거대 담론을 전제한 채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분석 작업은 이 책으로 하나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동아시아의 서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을 것”이라는 이 책의 증상적 문장은, 스스로를 퇴장시키는 분석가의 윤리적 실천이자, 후학들에게 ‘동아시아 비교문학’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경계 너머의 새로운 문학을 시작하라는, 즉, “너희 세대는 너희 세대의 과업을 찾아서 이를 짊어지라는” 김윤식 선생의 가르침을 다른 말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 책과 함께, 한 시대의 문이 닫히고 또 새로운 시대로의 문이 열리고 있다.
1) 이 또한 매우 시간이 지난 후에 피치못할 이유로 성급하게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서영채 선생의 책을 읽고 다시 썼다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터인데 읽기 전에 썼던 논문이라 참 아쉽다. 정기인, 「이광수의 (두) 데뷔작의 ‘시작’의 의미 –나츠메 소세키와 루쉰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동악어문학 97, 동악어문학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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