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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재료, 음악의 집 / 김보슬

* 음악 vs. 아름다움 *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언젠가 이런 물음에 빠져든 적 있다. 작품은 감상자의 내면에 커다란 출렁임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바로 그 자체로 하나의 리듬이라는 점에서, 모든 예술은 근원적으로 음악(음악 이전의 음악, ‘原音樂’)으로 볼 수 있다는 예술 이론을 살피던 나날이었다. 하루는 공연을 앞둔 연주자들이 리허설을 하고 있는 무대의 객석에 앉아, 여태 우리가 알았던 그 ‘음악’, 평범한 의미에서의 그것을 음미해 보았다. 음악을 듣는다(경청한다)는 것은 곧 분위기에 젖는 것이며, 어떤 곡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그 곡이 만드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이 아닐까.


다른 어느 날,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튀르 그뤼미오(Arthur Grumiaux)가 연주한 바흐 파르티타(Bach Partita No.2 in D minor, BWV 1004)를 듣게 되었다. 이제껏 수없이 많은 이들이 연주해 온 곡이었음에도, 이때 나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전율을 경험했다. 그뤼미오가 연주하는 파르티타는 공기를 찢고 달려나오는 울림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흥겹거나 아련한 분위기에 젖는 것과는 전혀 다른, 순전한 긴장감이었다. 그러나 이 음반이 그뤼미오 생전(生前) 연주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레코딩 매체가 전하는 것은 음향 엔지니어의 정교한 마스터링(mastering) 작업을 거쳐 어딘가 기술적으로 정교화되거나 보강된 음원, 따라서 어느 정도 새로운 창작물일는지도. 그렇기에 이것은 더더욱 기계적 신호, 소리 자체에 대한 충격이었다. 연주자의 인생역정이 보태진 감동, 현장감으로 충만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악기와 공기의 팽팽한 대결 — 거기에 깊숙이 내맡겨지는 일일까? 음악을 듣는 것, 또는 아름다움을 듣는다는 것이 말이다.


[사진 1. 아르튀르 그뤼미오(Arthur Grumiaux)의 음반]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근대 최초의 음악비평가 중의 한 사람인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음악에 대한 감성적 접근을 비판하고, 이성적 접근으로 음악의 본질을 포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순수한 직관을 통해 음악 작품의 울림 그 자체를 들어야 하며 음악의 소재적 관심stoffliche Interesse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아무 감정을 환기시키지 않더라도, 사실상 우리가 보거나 관찰하지 않는 경우에도 아름다우며 계속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아름다움은 직관하는 주체에 쾌감을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일 뿐, 주체의 쾌감에 의해 아름답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옛 저작들은 대부분, 오늘날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감각’이라 칭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 작가들은 음악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해야 하며[실제로 음악은 우리의 감각Empfindung을 자극한다] 또 경건함과 사랑, 환희와 비통함으로 우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2004, 책세상, 김미경 옮김.


이 책에서 옮긴이가 쓴 「들어가는 글」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성악 음악보다 기악 음악을 선호한다. 성악 음악에서는 가사의 의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얻는 감동은 음악을 통한 감동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설과 배경 이해를 통해 감동을 추구하는 음악 감상과 음악 자체와는 무관한 모든 것을 제거한 음악 감상은 서양 음악사에서 팽팽하게 대립해 왔다. 그리고 한슬리크는 리스트(Ferenc Liszt)나 바그너(Richard Wagner)류의 표제 음악들이 음악 외적인 것에 음악 작품을 기대게 함으로써 음악의 본질을 왜곡한다고 여겼다.



* 민요 vs. 모국어 *


음악의 범위를 전복적으로 재설정하는 원음악이 생경하게 다가오듯, 음 예술 안에서 음악과 음악 외적인 것을 나누는 일 또한 아마추어 감상자들에게는 난해하다. 한슬리크처럼 음악의 본질은 음들이 만들어내는 형이상학에 기초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는 한편 음악은 번역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슬리크보다 한 세대 다음의 오스트리아 음악비평가인 빅토르 주커칸들(Victor Zucherkandl)은 “음악과 음악 사이의 장벽은 언어의 장벽보다 훨씬 통과하기 어렵다”고 했다. 음악이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인 대신 하나의 문화를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유기적으로 부착돼 있다고 보았던 그의 입장을 알 수 있다.


이즈음 한국 음악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민요는 모국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헝가리의 민속음악자,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코다이 졸탄(Zoltán Kodály)의 말이다. 2022년 개정 음악과 교육과정 1차 시안에는 국악 수업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와 ‘어떤 요소와 개념을 배워야 하는가’의 핵심 내용이 빠지고, ‘장단’이라는 고유 용어가 ‘리듬’이라는 보편적 어휘로 대체되는 등 기존의 국악 교육과 평가가 중요하게 취급하던 내용들이 축소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같은 개정이 초등 교과서를 대상으로 하므로, K-콘텐츠의 미래가 위협에 처했다는 성토가 쏟아져 나왔다. “초등학교에서 우리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미래에 한국의 존재는 과연 어디에 남게 될까. 교육 붐을 이루고 있는 외국어, 코딩, 메타버스 안에…?”와 같은 물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거세게 빗발쳤다.



* 노래 vs. 말 *


잠시 국악 이야기. 익명을 요청한 어느 음악가의 의견을 들어보자.


정말 민요는 모국어일까?


“선율이 감정에 기반하고 박자는 육체적 맥동에 기반한다면, 리듬은 그 지역의 문화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언어적이다. 민요가 모국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간단히 노래를 만들어 본다고 생각하자. 할 줄 몰라도 상상이나 해보자. 현대음악에서야 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총아들이 단어도 쪼개고 글자도 부순다지만 예로부터 노래란, 가사를 통한 감정과 분위기 전달에 목적을 두지 않았겠나. 그렇게 보면 노래의 선율과 리듬은 일상어의 어조와 음절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데 대중가요에서 나타났던 90년대 R&B의 가락과 가사의 따로국밥을 생각해 보라. 선율 작법은 전형적인 미국의 R&B인데, 가사는 또 전형적인 한국식 발라드 스타일. 선율에 맞춰 잘 부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니야, 우리말 특유의 음절, 리듬 등이 있는데 그게 음악이랑 맞지를 않아. 그래서 그 시절 R&B 곡들을 들어보면 솔직히 이상한 게 많아. 다음 세대가 이걸 극복하려고 뭘 했는지 알아? 우리말의 거센 소리, 닫힌 소리, 열린 소리를 깡그리 부수어서 마치 영어인 것처럼 영어 발음에 가깝게 부르기 시작했어. 그제야 비로소 외국의 선율과 찰떡쿵 하기 시작한 거지.


이러한 이유로, 민요는 분명 그 출신 지역의 문화와 언어에 강력하게 접붙어 있다.”


그런데 국악은 죽은 음악이다?


“시대별로 한 언어의 성조, 표현, 문법이 조금씩 변화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더 급격하게 바뀌는 것 같아. 어느 시점에 ‘이게 우리말인가?’ 싶을 정도의 변화를 갖게 되었다는 거지. 말의 속성뿐 아니라 새로운 생활 양식에 따른 호흡의 변화 때문이기도 할 거야. 박자는 지역적 문화생활의 여러 가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단면일 수 있는데, 국악의 박으로 현대의 한국 사람들이 매일을 살 수 있을까? 힘들걸?


예전에 이애주 선생 살아계실 적에, 어머나 벌써 20년 전이구나. 학교에서 한국무용 수업 들을 때, 한 학기의 절반을 걷는 것만 했는데 서양음악 전공이던 내게 가장 도전적이었던 게 뭐냐면, 우리 박의 기본 하나와 자연스러운 현대생활 패턴의 기본 하나 사이에 이렇다 할 연관성이 없었다는 점이야.


하지만 국악은 어느 시절의 유행가였고, 어느 시절의 국민가요였으며, 또 어느 시절의 디스코, 테크노, 힙합이었어. 무슨 말이냐면 그 시절에 국악은 살아있었던 게 맞다고. 일제강점기로 우리 문화의 맥이 끊긴 후 궁핍한 자원과 정보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살려놓은 게 지금의 국악. 옛것을 복원까지는 했지만 ‘이제 여기서 어떻게 출발하지?’로 옮겨가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잖나. 국악을 죽은 음악이라 할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했던 음악을 명부(冥府)에서 목숨줄 잡고 끌어올려 겨우 이만큼이라도 살려냈다는 게 맞지 않을까?”


국악, 꼭 필요해? K-pop 잘 나가는데?


“그거 알아? 외국어를 배워보면 서로 다른 언어마다의 표현과 신택스 구성에 그 지역, 사람, 문화의 특질들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 문법이 변했다는 건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고, 현재 사용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지금의 사회상을 알 수 있어. 그런데 민요가 모국어라면, 현대의 민요는 BTS일까, 싸이일까, 블랙핑크일까?


전 세계의 음악들을 살펴보면 유럽, 아메리카, 인도, 이란, 파키스탄 등등 할 것 없이 민속음악에서의 즉흥은 필연적이며 몇몇 나라에서는 그것의 극의를 추구하기도 했다. 인도의 라가(Raga), 탈라(Tala)라든가, 페르시아의 다스트가(Dastgāh, دستگاه)라든가.


그런 면에서 서유럽 음악계에서 탄생한 화성은 인류의 음악문화상 엄청난 지각변동이긴 해. 이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냐면, 국악은 민속음악 체계의 즉흥을 발전시킨 음악적 양식을 갖고 있는데 과거 선조들이 왜 이 양식을 인도나 페르시아에서처럼 장대하게 정리해 놓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 때문이야. 그건 문자를 모르는 층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또한 양식의 재료가 일상에서 얻기 수월한 것이어서 미주알고주알 적어두지 않아도 제자들이 어느 순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을 테지.


그러면 그 재료가 무엇일까? 내 생각엔 ‘말’이다.”


[사진 2. <Kasse II, portato>, Andy Amholst, 출처_www.andyamholst.com]

가수 이랑의 <가족을 찾아서>의 후렴구는 이렇다.


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 /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노랫말대로 내 안의 노래를 찾는 일은 곧 집을 찾는 일, 사람과 가족을 찾고, 그리하여 서식지를 찾아가는 일과 동치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노래는 말한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마치 악기 소리처럼 추상적으로 흐르는 이국의 음악에서도 안온함을 체험할 수 있다. 추상성의 근원적 리듬. 그러니 가사를 ‘내 안에 있는 원음악을 찾아서’ 정도로 고쳐도 될까.


저문 퇴근길 도시의 아파트 사이를 지난다. 부동산 간판들. 이웃, 가족, 내 집 마련의 꿈을 꾸는 고단한 근로자는 오늘 음악 안으로 귀가했다. 음악은 누구의 집일까? 모국어, 모국어를 위협하는 도둑, 볼 수도 형언할 수도 없는 출렁임, 분명히 누군가 다녀가고 있으니 빈집은 아닌데도 언제나 비어 있다.


[사진 3. 지휘자 클라우디오 압바도(Claudio Abbado)가 1986년 직접 지은 그림책 <La casa dei suoni(음악의 집)> 중]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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