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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피부, 40대의 눈빛 - 하이패션이 요구하는 얼굴에 대하여 / 김보슬

어느 날 인터넷에서 우연히 한 영상을 보게 됐다. 공식 행사에 참석한 벨라 하디드(Bella Hadid)가 기자들 앞에 서 있는 장면이었다.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포즈를 취하는 그의 얼굴은 분명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슈퍼모델의 것이었다. 1996년생, 아직 20대 후반. 신체 조건이나 피부 상태만 놓고 보면 젊음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눈빛과 입매가 만들어내는 아우라는 마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은 뒤 중장년에 접어든 이처럼 묵직하고 단단해 보였다.

Schiaparelli 드레스를 입고 주목 받는 벨라 하디드, 영상 캡처 콜라주, 영상 출처_인스타그램 @burginmag
Schiaparelli 드레스를 입고 주목 받는 벨라 하디드, 영상 캡처 콜라주, 영상 출처_인스타그램 @burginmag

이 묘한 괴리감은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왜 패션 모델들은 하나같이 실제 연령을 뛰어넘는 ‘원숙한 표정’을 연출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안고 다른 톱 모델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케이트 모스, 지지 하디드, 아노크 야이, 그리고 최근 부상하는 신예 모델들까지. 런웨이와 하이엔드 화보 속 여성 모델들의 얼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웃지 않는다. 애교를 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어려 보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아이돌과는 다른 세계, 귀여움을 삭제한 얼굴들


이 지점에서 패션 모델은 배우나 아이돌과 뚜렷이 구분된다. 아이돌과 배우의 얼굴은 대중과의 관계를 전제로 설계된다. 그들은 카메라를 향해 웃고, 반응하고, 친근함을 연출한다. ‘동안’, ‘귀여움’, ‘무해함’은 그 세계에서 여전히 가장 강력한 미적 자산이다. 그들의 표정은 끊임없이 말을 건다. 나를 좋아해 달라고, 나는 안전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반면 하이패션 모델의 얼굴은 말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를 둔다. 그들의 무표정은 차갑고 결연하며, 때로는 위압적이기까지 하다. 감정을 최소화한 얼굴, 쉽게 해석되지 않는 표정,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태도. 이는 대중의 사랑을 전제로 하는 ‘친절한 얼굴’이 아니라,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권위적인 얼굴’에 가깝다. 그 얼굴은 친근함 대신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2000년 Prada SS 런웨이에서의 지젤 번천 (Gisele Bündchen), 이미지 출처_인스타그램 @versaceze
2000년 Prada SS 런웨이에서의 지젤 번천 (Gisele Bündchen), 이미지 출처_인스타그램 @versaceze

리자 코르디노부치 (Liza Kordynovuch), 영상 캡처 콜라주, 영상 출처_인스타그램 @k.m.film
리자 코르디노부치 (Liza Kordynovuch), 영상 캡처 콜라주, 영상 출처_인스타그램 @k.m.film

나이를 지운 얼굴, 혹은 원시적인 무표정

그래서 패션 모델의 얼굴은 단순히 성숙해 보인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나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워진 상태에 가깝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모델이 런웨이 위에서 보여주는 눈빛은 특정 연령대에 속한 인간이라기보다, 신화 속 인물이나 초월적 존재를 연상시킨다. 그 표정에는 사회적 예의나 감정 노동의 흔적이 없다. 대신 문명 이전의 당당함, 혹은 원시적인 생명력이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을 ‘에이지리스ageless한 권위’라고 부르고 싶다. 20대의 육체에 깃든 중년의 카리스마, 혹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 패션 모델의 얼굴은 특정한 생애 단계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웃음과 감정을 덜어낸 얼굴은 오히려 더 넓은 해석의 여백을 만든다. 그 여백 위에 디자이너의 세계관과 옷의 무드가 투사된다.


왜 패션은 이런 얼굴을 요구하는가

이 현상은 패션 산업의 구조와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주요 소비층은 구매력을 갖춘 성인 여성들이다. 지나치게 어리거나 풋풋한 이미지는 고가의 의류와 액세서리가 지닌 무게감을 전달하기 어렵다. 모델이 미숙해 보일수록, 옷의 가치 역시 가벼워 보일 위험이 있다.

그래서 패션 모델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얼굴을 요구받는다. 메이크업은 젖살을 지우고 골격을 강조하며, 표정은 감정을 제거한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링의 문제가 아니라, 옷이 지닌 상징적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얼굴을 만드는 과정이다.

더 나아가, 모델이라는 직업의 본질 역시 이와 연결된다. 모델은 인격을 드러내는 존재라기보다, 창작물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가깝다. 만약 모델이 자신의 개성을 앞세우고 감정을 과하게 표현한다면, 시선은 옷이 아니라 얼굴에 머물게 된다. 무표정은 자아를 지우는 방식이자, 옷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는 전략이다.


우리가 패션 모델에게서 보고 싶은 것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얼굴에 매혹되는가. 아마도 그 얼굴이 일상에서 쉽게 가질 수 없는 상태를 대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얼굴, 감정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얼굴, 타인의 기대에 반응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얼굴. 패션 모델의 표정은 단순한 미적 장치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줄기차게 요구되어 온 수많은 성 역할로부터 한 발 물러난 얼굴처럼 보인다.

결국 패션 모델의 얼굴은 우리 사회가 성적 매력을 소비하는 이중적인 방식을 드러낸다. 한쪽에서는 영원히 젊고 친근한 소녀를 요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성숙함과 카리스마를 요구한다. 패션 모델의 차가운 표정은 이 두 욕망 사이에서 만들어진 타협의 결과이자, 동시에 그 긴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가 런웨이 위 모델의 무표정에 시선을 빼앗기는 이유는, 그 얼굴이 나이와 감정, 역할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상태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얼굴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침묵으로 선언한다. 나를 보지 말고, 내가 서 있는 이 장면 전체를 보라고. 그리고 그 침묵 속에 담긴 우아함을 감당해 보라고.


필자가 ChatGPT로 생성한 이미지
필자가 ChatGPT로 생성한 이미지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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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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