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할배와 정치적 양극화 / 조형제
- 한국연구원
-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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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광화문 네거리에 가면 태극기 할배들을 만나게 된다. 소박한 옷차림의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에 자못 흥분된 표정이다. 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그려진 하얀색의 ‘자유마을’ 깃발을 흔들고 있다. 새벽에 전세 버스로 전국에서 올라온 이들은 광화문 네거리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우파 인사들의 연설에 열광하고, ‘대선 무효’, ‘윤 어게인’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윤석열 탄핵 이후에는 MZ 세대 청년들의 참여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극우 집단은 누구인가? 이들은 왜 한국의 제도 정치 바깥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피케티는 현대 정치의 두 주역으로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를 개념화한 바 있다. 브라만 좌파란 고등 교육을 받은 진보적 정치 엘리트층을 지칭한다. 이들은 문화적 진보와 사회적 평등, 공공 서비스 확충 등을 지지하지만,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급진적 재분배 정책에는 소극적이다. 이에 비해 상인 우파는 부와 재산을 축적한 고자산, 고소득의 보수적 엘리트층을 지칭한다. 이들은 경제 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두며,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 시장 중심의 경제 정책, 감세 등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우리나라의 정치도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가 장악하고 있다.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국민의 힘’이 각각 해당된다. 문제는 이 양대 정당이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민주당은 지주계급 출신의 한민당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정치적 민주화 과정에서 점차 ‘강남 좌파’라고 불리우는 고학력 엘리트층 중심으로 진화했다. 이들은 평등과 정의라는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하층 계급의 경제적 빈곤에는 관심이 크지 않다. 최근에는 진보 정당이 존재감을 상실함에 따라, 진보적 의제를 외면하는 보수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국민의 힘은 한국 정치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보수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화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 계속 당명을 바꿔왔지만, 이들 정당은 경제적 부를 독점한 재벌과 자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왔다.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민주화를 국정 과제로 내세웠지만 실현 의지 없는 레토릭에 불과했다. 최근에는 자신들의 텃밭인 영남 지역에 안주하면서 퇴행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선출된 정치 지도자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지지자들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언론을 공격하는 등의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대방을 정당한 정치적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고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포퓰리즘이 강화된다. 포퓰리즘의 다른 측면에는 ‘팬덤 정치’가 있다. 시민들이 자신과 스타 정치인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시민들에게 정치인은 대리 만족을 위한 연예인과 다름 없다. 특정 정치인을 열렬히 지지하고 반대 세력을 공격하는 ‘팬덤 정치’의 출현으로 특정한 이념이나 정책은 사라지고 정서적 양극화가 확대되고 있다. 태극기 할배들의 등장도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와 밀접히 연관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양대 정당이 그들의 극단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는 가운데 성장해 왔다.

최근에는 유튜브 등의 온라인 미디어가 급격히 영향력을 키우면서 정치적 양극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시민들은 알고리즘을 통해 자신이 선호하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시청하면서 ‘확증 편향’을 강화하게 된다. 유튜브 시청을 통해 태극기 할배와 ‘개딸’(개혁의 딸)들은 같은 한국에 살면서도 상대방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적대감을 키우고 있다. 이들에게 사실 규명은 중요하지 않다. 상대방은 악마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악한 것이다. 2025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만 19세~75세 이하 남녀 약 4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정치 성향이 다른 이와 연애 및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58%를 차지한 것을 볼 때 정치 영역을 벗어나 우리의 실생활에도 정서적 양극화가 스며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거란 진보가 30-40%, 보수가 30-40%를 차지한 가운데, 중도 20-30%를 서로 차지하려는 ‘땅따먹기’ 경쟁이다. 가장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상식적 사고방식을 가진 중도층은 설 자리가 사라지면서, 극단적 집단은 영향력을 키워간다. 태극기 할배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대선 부정을 심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타고 올 거라고 믿고 있고, 개딸은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재명 대통령을 당선시키지 않기 위해 한덕수와 사법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믿고 있다. 민주주의 건강성의 지표로서 ‘공론의 장’의 개념을 제시했던 하버마스조차 최근의 저서 <공론의 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에서는 뉴미디어가 현대 정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의 해법은 없는 것일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두 가지 해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선거제도의 개혁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이다. 보통선거권이 헌법에 명시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한다. 정치적 식견이 높은 고학력자나, 먹고 살기에 바쁜 보통사람이나 모두 한표를 행사한다. 선거 결과는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결정된다. 한국은 소선거구제하에서 양대 정당 간의 제로섬 경쟁이 극단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따라서 선거에서 상대방을 제압하지 않으면 자기가 소멸하는 극단적 경쟁이 진행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한 표를 던져도 그 표는 ‘선거 제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 정당정치 전문가인 이재묵 교수는 정치적 양극화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 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정당에 집중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수결 우선 원칙으로 다수파의 전횡이 이루어지고 소수파가 배제되는 다수제 민주주의 선거 제도가 아니라, 비례성이 보장되는 합의제 민주주의 선거 제도를 통하여 권력을 분산시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해법은 비례대표제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지역구 득표와 상관 없이 득표 비율에 따라 해당 정당의 비례 대표 후보를 선출하는 것이다. 현재의 국회의원 의석 300석 중에서 적어도 100석 이상을 비례 대표로 선출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유권자들의 투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다양한 정당의 후보가 국회로 진출할 수 있다.
물론 한국 정치에서 비례대표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양극화의 망국적 폐해를 해결하겠다는 절실한 공감대가 선결 요건이다. 비례 대표까지 장악하고자 ‘위성 정당’을 만드는 양대 정당의 꼼수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둘째는, 건강한 공론의 장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공론의 장’의 활성화는 뉴미디어 시대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레비츠키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제도와 법률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상대 진영의 정당한 존재를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제도적 절제’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동일한 의견 그룹끼리 자신의 견해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상이한 의견 그룹들이 상호개방적으로 소통하는 공론의 장의 확산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지속적인 시민교육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공론의 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와 함께 뉴미디어의 남발에 대한 일정한 규제도 필요하다. 무한 경쟁 속에서 사실 확인 없이 조회수에만 집착하는 유튜브 등의 보도에 대해 엄격한 책임을 묻는 제도적, 법적 규제가 강화되는 것이 요구된다. 유럽연합은 2021년 ‘디지털시장법’과 ‘저작권법’을 개정하여 온라인 플랫폼이 혐오 표현, 가짜 뉴스 등 불법 콘텐츠를 신속히 삭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뉴미디어 플랫폼은 이용자 신고에 신속히 대응해야 하며, 반복 위반 시 제재를 받게 된다. 한국도 공론의 장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뉴미디어 규제가 양립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 정치의 망국적인 정치적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 지역구 득표와 상관 없이 득표 비율에 따라 해당 정당의 대표를 선출하는 비례대표제의 비중을 높이고, 뉴미디어 남발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론의 장에서부터 개방적 소통과 토론이 활성화될 때, 한국 정치는 정치적 양극화를 넘어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로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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