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인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1)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 양식의 탐구-근대인의 인류학』(이하 『탐구』)이 야심만만하고 독창적인 저술이며 게다가 매우 성공적인 시도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는 이 책에서 존재자들의 ‘존재양식’이라는 표제 하에, 인류학적 탐색을 해 나가며, 그 대상은 예의 ‘근대인’이다. 나는 이 글에서 라투르가 제목으로 내세운 ‘존재양식’을 중심으로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이면서도 보충적인 코멘트를 시도할 것이다.
존재양식-의미와 연원
라투르는 “‘존재양식’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철학과 인류학 사이의 연결고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는 철학적 인류학의 시도이다. 여기서 존재양식은 라투르가 밝히고 있다시피 철학자 수리오(É. Souriau)의 용어다. 그가 수리오의 저작인 『다양한 존재양식들』(Les différents modes d’existence, 1943;2009)에서 이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이 자신이 25년간 수행해 온 존재양식에 대한 연구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한다.2)
실제로 수리오의 책의 몇 부분만을 읽어 보더라도 『탐구』와의 긴밀한 근친관계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라투르가 책 말미에 제시한 ‘피벗 테이블’은 수리오가 말한 “존재양식의 다양성(multiplicity of modes of existence)을 긍정하는 실존적 다원주의(existential pluralism)”3)의 실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라투르가 이 용어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기호와 사물 간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기호든 사물이든 독립적인 특유한 존재양식이기에 세계와 언어의 이분법은 사라진다. 이로써 기호, 사물과 마찬가지의 가치를 가진 여타 존재양식들도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221). 달리 말해 수리오가 “햄릿, 프리마베라(Primavera), 페르 귄트(Peer Gynt)는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는가? 음수의 제곱근은 존재하는가? 파란 장미는 존재하는가? 이러한 각 질문에 긍정, 부정 또는 어떤 식으로든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러한 질문들이 쌓이면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또 다른, 더 광범위한 질문이 제기된다” 즉, “존재 양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가?4)”라고 재우쳐 물었을 때 라투르는 그 누구보다 먼저 ‘그렇다!’고 대꾸한다.
하지만 우리는 라투르의 이러한 공개적인 고백이 그 자신의 지적 연원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고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상 ‘다원주의’는 철학 내에서 아주 오래된 흐름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투르를 위시한 현대의 다원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자의 이름은 여럿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존재인 한에서의 존재’(ens inquantum ens)를 숨기고 있는 사이비 다원주의(유비적 다원주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제일원리로서의 존재는 실재의 한 부분으로서 비존재와 그리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공존한다. 형이상학적 원리로서의 존재는 존재자의 운동(하이데거) 안에서만 의미 있으며, 실체적 진리로서 존재는 양태와 속성의 펼침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들뢰즈-스피노자). 그러므로 라투르의 존재양식 안에 녹아 있는 존재론적 다원주의는 대문자 존재(Being)의 중심성을 부수화하는 탈아리스토텔레스적인 기획을 공유하는 현대 존재론의 여러 분파들과 연관이 있다.
수리오 이외에 라투르가 기대고 있는 지적인 선배들은 이미 여러 논자들이 밝힌 바 있다. 그것은 기술철학적 맥락에서 ‘존재양식’을 사용한 시몽동(G. Simondon)에서부터 20세기 초 철학자들인 하르트만(N. Hartmann), 셸러(M. Scheler) 등이 시도한 가치-범주표 작성의 시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또한 존재양식들의 본질이 아니라, 행위와 변형을 강조하는 것은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과정철학의 영향을 드러낸다.6)
화이트헤드의 영향은 다른 누구보다 더 광범위하다. 라투르는 직접적으로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양식”7)에 대한 아이디어를 화이트헤드로부터 얻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실재론과 구성주의의 갈등이 해소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라투르의 존재론적 다원주의가 가진 탁월함은, 마니글리에(P. Maniglier)도 잘 말하고 있다시피, 이러한 존재양식들이 ‘하나’의 존재론 안에 포괄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존재론‘들’을 가진다는 것이다.8) 존재양식들은 이런 의미에서 “다양식적”(plurimodal)이다(694).9)
다양식적 진리론과 경험철학
내가 보기에 이 ‘다양식적’이라는 말은 라투르의 이 책이 왜 그토록 특이하고,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취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주는 기축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의 혁신적인 진리론과 ‘경험 철학’을 이어준다.
우선, 다양식적인 존재양식들은 “진리진술 유형의 다중성”(236)을 보호한다. 겉보기에 과격해 보는 라투르의 사유를 잘 살펴 보면 이렇게 다소 보수적인 측면이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꾸준히 문제가 된다).10) 다시 말해 라투르에게 ‘진리’는 최우선적으로 확고한 것이다. 그것은 니체적인 의미의 ‘망치’도 아니고, 플라톤적 의미의 이데아는 더더욱 아니다. 진리는 그 ‘다양한’ 가치의 측면에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진리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11) “진리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이 문명 그 자체이며, 진리로 이어지는 길 위의 포장을 부수는 것은 기만이다”(236). 우리는 다만 존재양식들의 차이를 식별하고 그 변이들을 추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뿐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두 번째 경험주의”(267)로서, 이 경험주의는 존재양식들의 관계와 전치사[PRE]를 추적한다. 각 양식이 가지는 존재양식의 존재론은 이 전치사들로부터 간파될 수 있고, 어디에서부터 변이가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때 우리는 어떤 번역도 없이 직설적으로 더블클릭[DC]을 시도하면서, 본래 이질적인 연결망[NET]을 범주오류로 교란하고, 감히 진리들을 뒤섞거나,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존재양식들을 감염시키는 자들을 격퇴할 필요가 있다(528).
우리는 이 세 가지 ‘탐구의 메타언어’를 포함하여 라투르가 제시한 15가지(물론 이 숫자는 라투르가 제안한 AIME 프로젝트에 의해 늘어날 수 있다)의 존재양식들, 즉 재생산[REP], 변신[MET], 습관[HAB], 기술[TEC], 허구[FIC], 지시[REF], 정치[POL], 법[LAW], 종교[REL], 애착[ATT], 조직[ORG], 도덕[MOR], 연결망[NET], 전치사[PRE], 더블클릭[DC]을 알고 있다. 사실상 존재양식을 개괄하는 이 피벗 테이블은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생태적 질서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포스트휴먼적 혼종 매트릭스이다.
라투르는 이 매트릭스가 철저하게 ‘경험적인 철학’에 의해 이끌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질서가 ‘경험 철학’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각각의 존재양식이 진리에 해당되는 진술을 찾아가는 ‘궤적’과 ‘적정성’과 ‘창설’ 활동과 ‘변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진술’은 단지 언어적인 명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라투르가 1987년 8월의 햇살 아래에서 스웨덴 예테보리 건너편 섬의 바위에 앉아 그 바위를 끊임없이 문지를 때 깨달았던 것과 같은 진리 진술이다.12) 또한 그가 몽 에귀유 산을 오를때 지도와 지형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깨달았던 진리 진술이기도 하다(123-125). 여기서 지도와 지형은 진술과 세계로 양극화되지 않으며, 지시의 연쇄CHAINS OF REFERENCE를 따라 상호 참조의 관계에 놓인 채, 아주 잘 작동한다. 데카르트의 송과선이든 로크의 이차 성질과 일차 성질이든 이러한 연쇄 과정에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진리는 명제로 굳어져 있지도 않으며, 눈 앞의 불변하는 사물로 결정화되지도 않는다. 진리는 말 그대로 움직인다.13)
복병-Si scires donum Dei
그러나 ‘경험 철학’은 의외의 지점에서 복병을 만날 참이다. 다양식적 존재론‘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험’에 기반해야 한다. 윌리암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주의’를 따라 라투르는 관계의 내재성을 그러한 경험의 내용으로 확정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으며, 관계의 내재성을 경험하는 것이 요구된다(267-268). 그 결과 이러한 경험 철학은 실재를 소박한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들어 지는”(in the making)14) 것으로 본다. 비환원을 원리로 하는 연결망은 실재의 차원을 ‘존재 자체’가 아니라 제조(fabrication)의 과정 혹은 상호 행위의 작동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양식들 중 어떤 것도 ‘전체’에 대한 헤게모니를 가질 수 없다. ‘광신’은 이 규칙을 어길 때 찾아온다.
라투르가 이 책의 제사(epigraph)로 사용한 「요한복음」의 저 구절 “Si scires donum Dei”(네가 만약 신의 선물을 알았다면)는 종교[REL]에 부여하는 특별히 경험적인 규정들로 인해 위태로워 보인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인들에게는 금기시되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요구하면서 그녀에게 영생의 물을 약속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진리의 말씀을-인용자]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5)
라투르에 따르면, 광신에는 “절대적인 말의 광신주의”와 “총체적인 말의 광신주의”가 있다(460). 따라서 그가 인용한 저 구절은 절대적으로도, 총체적으로도 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책이 제조하는 지시의 연쇄 가운데 하나로서 “탁월한 반복REPETE, 말 자체에 의한 끊임없는 말의 갱신”이다(449). 놀랍게도 여기서 신의 특권은 말의 (재)해석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전락한다. 라투르에게 ‘신’조차 연결망에 속하는 것[REL·NET]이며, 이로써 그 모든 광신의 단서는 제거된다.
하지만 이 제사가 하나의 ‘전치사’로서 책 전체의 방향을 가리킨다면, 또는 개역판이든, 불가타판이든, 라틴역이든, 아람어 원문이든 ‘성경’이라는 제목이 경험을 넘어서는 또는 실제적 관계를 단번에 해소해 버림으로써 경험 철학의 정지를 촉발할 가능성을 함축한다면, 문제는 더 이상 사소하지 않다. 기입(inscription)으로부터 삭제시키려는 힘이 오히려 기입의 힘을 증가시킨다. 삼위일체가 “미친 형이상학자들을 위한 퀴즈”(463)라면, 이 이율배반의 제조과정은 ‘미친 성경 주석가를 위한 퀴즈’가 된다. 신성모독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요한 복음의 저 구절에는 예수가 ‘미친 성경 주석가’로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을 독점하고, 그것을 대리 수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신전의 유일무이한 헤르메이오스’(hermeios)다. 이처럼 막강한 더블클릭[DC]이 또 있을까? 비유와 수사어구를 동원하고, 논쟁의 여지 없는 로고스의 통치를 천명하는 예수는 하나님의 선물을 문자 그대로 전송한다.
종교적 존재양식은 피벗 테이블의 다른 존재양식과는 달리 그 적정성의 조건이 초월적이다. 핵심 문제가 여기 있다. 종교는 구원하고, 현존하게 한다. 손을 내미는 신 또는 그 대리자와 그 손을 부여 잡아야 하는 인간이 있다. 과연 이것이 경험 철학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러한 연결이 라투르가 강조하는 바대로, “지상을 향해 눈을 내”리는 종교가 행하는‘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면, 이때 경건함은 종교의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지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생태적인 의미에서 ‘사랑’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랑은 피벗 테이블에 각인된 ‘인간’적 개인의 생성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생성이며, 역설적으로 이것이 더 신성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만약 이러하다면, 이러한 사랑이 굳이 기독교적 의미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것은 불교일수도, 흰두교일수도, 인디언들의 토속 종교일수도 있다. 종교적 존재양식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인류학적 설문을 철학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이려면 기독교를 어떤 전체 혹은 총체로 볼 수는 없다. 라투르는 종교에 있어서 ‘신’마저 부정하면서, 내재성의 지대에 전치사를 기입하려 했지만([REL]·[PRE]) 매번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다. 이에 따라 경험 철학은 난데 없이 신의 나라(civitas dei)와 인간의 나라(civitas terrena) 간 각축장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질성의 유물론과 정치의 곤궁
라투르의 피벗 테이블에는 ‘물질’(MATTER)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여러 곳에서 물질에 대해 말한다. 무엇보다 ‘물질’은 근대인의 “이상한 발명품”(153)이다. 왜냐하면 근대인은 “신중하게 구별했어야 하는 두 양식[REP·REF]의 융합AMALGAM”을 통해 물질을 사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물론자들에게는 다소 모욕적인 기괴한 단어 조합, “유물론이라는 관념론IDEALISM”(153, 190, 588)으로 표명된다. 이에 대한 라투르의 입장은 명확하다. 이런 식의 유물론은 “불행한 결과를 낳은 아주 기이한 하나의 제도”이며, 그 결과 인류학적으로 가치 있는 다른 문화들이 ‘물질 세계’나 그것과 대립한다고 여겨지는 ‘주체’없이도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우리는 이러한 평가가 기독교의 ‘신’에 대해서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때문에 인류학자는 이 물질(또는 ‘물질 세계’)을 “탈관념화”해야 한다(164). 라투르의 물질에 관한 이런 언급들을 잘 살펴 보면, 그가 물질이나 유물론에 대해 데카르트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라투르에게 ‘물질’이란 사유실체(res cogitans)에 대립하는 연장실체(res extensa)인 셈이다. 이런 틀은 당연히 타파되어야 한다. 그것이 범주오류에 해당된다(170)는 라투르의 언급도 충분히 수용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라투르가 단 한 번도 ‘물질성’(materiality)을 긍정하는 유물론을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질성은 유물론이라는 관념론과 대립한다”(588) 이 이 유물론에 대해 라투르는 여러 곳에서, 일종의 ‘다른’ 유물론, “우리의 유물론, 두 번째 경험주의의 유물론”(660), “진정한 유물론”(675)이라고 칭하면서, 그것이 “미래의 사유”(265)임을 밝힌다. 요컨대 라투르에게 ‘유물론이라는 관념론’과 ‘물질성의 유물론’은 현격한 차이를 가진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 과연 진정한 유물론의 ‘물질성’은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에 철학적 인류학의 성패가 달려 있다.
라투르의 ‘물질성’은 주로 경제와 관련하여 설명된다. 라투르는 다른 체제와는 달리 경제에 대해 거의 3장에 걸쳐(14장~16장) 논한다. 그만큼 경제는 까다로롭고 중요한 대상이다. 라투르는 “존재양식에 대한 탐구의 전체 기획이 이 마지막 시도에 달려 있다”(565)고 말한다. 이것은 좀 전에 내가 ‘물질성’이 경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그것이 철학적 인류학의 성패와 관련된다고 말한 것과 연관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경제는 애착[ATT], 조직[ORG], 도덕[MOR]의 교차로에서 형성된다. 라투르는 전통적인 거시-미시 경제학의 합리주의적 통념을 거스르면서, 경제를 어떤 정념과 도덕의 체제16)로 보는 듯하다. 특히 애착이라는 존재양식은 경제 뿐만 아니라 근대인의 인류학 전체를 규정한다. “어디서든 <경제>의 얼음같이 차가운 계산은 정념적 애착의 불길 앞에서 녹아내린다. 전도를 전도하지 않으면, 즉 우리가 머리 - 계산 장치 - 로 걷게 하고자 했던 것을 자신의 발 - 애착 - 로 걷게 하지 않으면, 근대인의 인류학은 불가능하다”(630).
다시 말해 경제는 정념과 합리적 조직, 그리고 도덕의 ‘혼합체’이며, 때문에 따로 하나의 존재양식으로 지정되지 않는다.17) 그런데 이러한 교차로는 착각과 오류를 경제에 안겨 준다. 여기서 경제는 형이상학이 되고 경제적 물질은 실재성을 상실한다. 이러한 부정적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교차점에서 발생할 문제들을 해결할 ‘외교’(diplomacy)가 절실히 요구된다. 라투르는 이 복수의 존재 양식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인간과 비인간이 공유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함께 모이는 보다 보편화 가능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경제는 “두 번째 자연”(556)으로서, 경제화ECONOMIZATION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끝까지 추적함으로써, 그것이 갖추고 또 끊임없이 도입하고, 퇴출하는 장치들과 인간/비인간들을 전면화함으로써, 물질성을 구출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자연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물질’이 되거나 ‘물질성’이 된다. 이것은 라투르가 첫 번째 자연에서 지식의 성립과정에 따라 진리를 재구성한 것과 같은 경로다. 즉 지시의 연쇄를 추적했듯이, 경제의 과정을 추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의 합리적 실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했듯이, 경제적 실체도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단순히 “경제적 물질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모든 과정 상의 장치들이 사라지게 된다(587-588). 요컨대 여기서 물질성이란 과정상의 장치들(인간/비인간을 포함)이라 할 수 있다.18)
눈여겨 볼 지점은 라투르가 책 전반에 걸쳐서 근대화와 생태화의 양자택일을 여러 번 강조한다는 것이다(8, 29, 49-50). 그리고 이때 근대화는 전반적으로 경제화를 의미하며, 따라서, 생태화와 경제화 간의 양자택일도 발생한다. 문제는 라투르가 경제를 바라보는 이런 양가적 관점이다. 종합하면, 두 가지의 경제화가 가능해진다. 하나는 애착으로 걷게 하는 좋은 경제와 경제적 합리성을 밀어부쳐 생태를 파괴하는 나쁜 경제가 그것이다. 근대인들을 생태의 유토피아로 이끌기 위해서는 저 나쁜 경제적 물질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로소 정치[POL]의 문제다.
라투르는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의 곳곳에서도 정치에 대해 말한다. 정치는 ‘제도로서의 물질’이 가진 힘의 분배(180)이자, ‘말하기’의 반복, 그 원운동(203-210)이다. 정치는 외교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음조로 말하기, 잘 말하기이다. ‘잘 말하기’는 ‘아고라에서 누군가에게 그가 관심을 두는 무언가에 대해 잘 말하기’”(211)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 우울증에 빠진 근대인들을 어떻게 하면 생태의 유토피아로 데리고 가는가가 문제인 이 시점에서 아고라에 출몰하여 소크라테스와 언어의 난투를 벌이는 소피스트처럼 행동하는 것이 어떤 이익이 있을까? 외교(diplomacy)라는 말에 담긴 ‘권모술수’라는 의미를 되새긴다 해도, 정치가 가진 본연의 마키아벨리즘을 저항의 플랑카드 뒷면에 써 놓았다고 해도19), 달라지는 것은 없어 보인다. 요컨대 이제 필요한 것은 기존의 경제를 포기하고, 외교와 정치를 더 강화함으로써 세계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좌파 정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만으로 우리는 그러한 좌파 정치의 가능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20)
철학적 인류학과 근대인의 미래
근대인의 운명과 관련된 인류학은 어떤 “불가능한 형이상학”(661)이나 미심쩍은 합리주의가 아니라 ‘다양성의 형이상학’이다.21)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존재론이며 근대인에 국한된 이야기이므로 국지적 존재론이다(37). 이러한 기획은 경험 철학이라는 전제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국지적 경험에서 시작한다면, 상대주의로 빠져 버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다양식적 진리론이 상대주의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라투르는 이에 대해 이 책에서 상당히 약화된 형태의 버전만을 제공하고 있다. 철학적 인류학이 제대로 제조되기 위해서는 이 ‘절뚝거리는 불카누스’(334)에 그 자신이 만든 무구(武具)를 단단히 채워 주어야 한다.
첫째, 상대주의를 관계주의(relationism) 안에 편입시킴으로써, 그것에 외교의 역능을 부여해야 한다(149, 695). 외교는 라투르가 그토록 경계하는 더블클릭[DC]의 일방적, 직선적 어법을 지양하고, 제대로된 관계를 이루게 해준다. 따라서 각 양식은 고유한 경험을 보존하고, 그것에 대해 ‘묘사’(경험적 기입)22)할 수 있는 철학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 주의사항이 부가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 관계주의는 ‘아름다운 영혼들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기후변화론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 철학적 인류학은 단호하게 맞설 필요가 있다. 라투르의 외교관은 여기서 잠시 본국으로 돌아와 전쟁을 준비하는 투사가 되어야 한다.23) 둘째로 관계주의는 평평한 존재론의 환각적 효과에 감염되어서는 안 된다. 잘 알면서도 너무나 쉽게 빠져드는 중독성 약물처럼 평평한 존재론은 아나키한 자유를 천편일률적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천년왕국의 적막하고, 퇴폐적이며, 퇴행적인 평화로 간주하도록 부추긴다. 평평한 존재론은 철학적 인류학에 있어서 사실상의(de facto) 요건이 결코 될 수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존재론’이지 ‘가치론’이 아니다. 눈 앞에 버젓이 보이는 바리케이트와 죽음들을 평평한 매트릭스에서 몽롱하게 솟아오르는 아지랭이 취급하는 것은 정치적인 청맹과니의 일일 뿐이다.
둘째, 철학적 인류학은 반드시 유물론이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마치 라투르가 원한에 사로잡힌 나머지 유물론을 맹비난한 것처럼 여기면서 그가 제도화된 유물론으로서의 ‘유물론이라는 관념론’만을 타격한다는 사실을 짐짓 흘려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위에서 언급한 라투르의 ‘물질성의 유물론’ 외에도 최소한 우리는 그가 “우리가 정말로 유물론자가 되려면 (...) 많은 존재자들에 의지해 약간의 존재론적 실재론을 유물론에 주입해야 할 것이다”(265)라고 말하는 곳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서 ‘표상’을 비판하면서 “유물론은 여전히 미래의 사유”라고 언급하는 부분도 강조해야 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라투르가 다른 책에서 녹색계급의 유물론적 분석이 “좌파의 전통적인 투쟁을 나름의 방식으로 연장하고 갱신”24)한다고 말한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유물론, 물질성의 유물론은 전통적인 계급투쟁이 딛고 있던(물론 이것도 중요하다) 인간적 의미에서의 ‘물질적 재생산 조건의 생산’이라는 역사 유물론의 공식을 넘어, 생태계 전체, 대지 전체의 신진대사와 재생산이라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25)
마지막으로 나는 이 탁월한 저작이 너무나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람에 마땅히 눈에 띄어야 할 내용이 간과될까 노심초사하는 기분으로 한 가지만을 더 이야기하고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것은 라투르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 근대인의 기술[TEC]망각과 관련되어 있다(312, 323 그리고 340의 ‘해먹’의 예시). 우리 근대인(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으므로 비근대인이라고 해야 한다)은 기술이 접혀 들어가 있는 물질성을 자주 망각한다. 라투르는 이러한 망각의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기술적 존재자들이 우선적이며 (준)주체는 그것의 후방효과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사실 이 주제는 스티글러(Bernard Stigler)가 먼저 강조했고, 그 제자인 육후이(Yuk Hui)가 이어 받은 것이기도 하다. 라투르는 스티글러가 헤라클레이토스의 경구인 ‘로고스는 숨기를 좋아한다’에 빗대어 ‘기술은 숨기를 좋아한다’고 했던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기술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331).
근대인들은 이러한 기술망각에 압도되어 기술과의 적절한 관계를 설정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를 획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술적 존재자들이 짊어지고 있는 ‘도구성’이라는 인간중심적 규정을 폐기하고, 그것이 가진 ‘결합의 능동적 역량’을 회복시켜야 한다(343). 놀라운 지점은 라투르가 결코 기술을 생태화의 반대편에 놓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생태화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경제에 대해 그토록 부정적이었던 라투르를 생각해 보라). 근대화에서 생태화로 가기 위해서는 장치들이 필요하며, 기술은 필수불가결하다. 따라서 “생태화’ECOLOGIZE라는 동사가 ‘근대화’의 대안이 되려면 우리는 기술적 존재자들과 상당히 다른 거래를 구축해야 한다”(343).
다시말해 가이아와 기술은 새로운 관계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가이아는 우리가 대적할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에 굴복해야할 자연의 리바이어던도 아니다. 기술을 모조리 폐기한다고 해서 가이아가 우리를 위한 ‘새로운’(!) 자리를 행성의 한 켠에 마련해 줄까? 라투르는 가이아와의 전쟁은 “질 수밖에 없는 이상한 전쟁”으로서 “우리가 이기면 우리가 지고, 우리가 지면 우리는 여전히 진다”고 정곡을 짚어 낸다(700). 우리는 지나치게 겸손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주제 넘게 헤게모니를 행사하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가이아와의 관계에서 늘 비대칭적이며, 우리 자신, 인류 전체를 테이블에 판돈으로 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명을 사랑함으로써만 룰렛을 좌우할 수 있게 된다.
1.Bruno Latour, “Biography of an inquiry: On a book about modes of existence”, Social Studies of Science, 2013, 43/2, 287. 이 논문은 『탐구』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아주 유용한 정보가 담긴 라투르 자신의 글이다. 라투르는 이 논문에서 ‘철학적 인류학’(philosophical anthropology)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같은 내용을 다루는 라투르의 논문인 “Coming out as a philosopher”, Social Studies of Science, SAGE, 2010, 40/4에서도 이 단어를 핵심개념으로 사용한다. 라투르에게 ‘철학적 인류학’이란 20년 전에 출간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다』의 부정적 방식이 아니라 긍정적 방식으로 인류학의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것을 겨냥한다는 의미를 지닌다(Terence Blake, “On the Exstence of Bruno Latour's Modes: From Pluralist Ontology to Ontological Pluralism” (manuscript), https://philarchive.org/rec/BLAOTE도 참조).
2.Isabelle Stengers & Bruno Latour, “The Sphinx of the Work”, (tran.) Tim Howles, (In) Étienne Souriau, The Different Modes of Existence, (tran.) Erik Beranek, Minneapolis, 2015, 11, fn., 2.
3.Étienne Souriau, The Different Modes of Existence, 99.
4.Ibid., 97
5.Henning Schmidgen, “Review of Bruno Latour, 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An Anthropology of the Moderns”, Isi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05/3, 2014, 674 참조.
6.Jay Foster, “Review, 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An Anthropology of the Moderns”, Science & Technology Studies, 27/1, 2014, 110 참조.
7.Bruno Latour, “Biography of an inquiry: On a book about modes of existence”, 297. 이 논문에서 특히 강조되는 지적인 선배들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화이트헤드이다. “나는 지식의 과정과 알려진 세계의 과정 사이에 다른 관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른 형이상학’, 즉 윌리엄 제임스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접할 기회가 필요했다”(ibid., 295)
8.파트리스 마니글리에, 「형이상학적 전회? - 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에 대하여」, 박성관 옮김, 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근대인의 인류학』, 황장진 옮김, 사월의 책, 2023. 719 참조.
9.존재론적 다원주의의 현대적 판본의 집대성은 들뢰즈의 존재론일 것이다. 라투르도 들뢰즈를 연구했다. 그는 박사논문을 쓸 당시 들뢰즈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Bruno Latour, “Biography of an inquiry: On a book about modes of existence”, 289-290. “Coming out as a philosopher”, 600-601 참조. 라투르는 최소한 두 권의 들뢰즈 주저, 즉 『차이와 반복』과 『앙띠오이디푸스』를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연구했다.
10.특히 이 글에서 논하게 될 ‘종교’와 ‘정치’의 측면에서 보수성을 드러낸다. 물론 이 보수성은 단순히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의 보수가 아니라, 특이한 방식으로 기존의 전통을 새로운 템플릿에 담아낸다는 뜻이다.
11.라투르는 ‘비판’이 시효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재론적 태도로의 복귀”(두 번째 경험주의)이며, “이 실재론은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matters of concern)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다룬다.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 사회』 2023, 36/3, 299.
12.Bruno Latour, “Biography of an inquiry: On a book about modes of existence”, 297 참조.
13.나는 라투르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이동하는 진리의 특성을 고전적인 진리 대응설을 전복하는 것으로 보고, ‘진리 이동설’이라고 부른다. 박준영 지음, 『신유물론, 물질의 존재론과 정치학』, 그린비, 2023, 321-331 참조.
14.파트리스 마니글리에, 「형이상학적 전회? - 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에 대하여」, 709.
15.「요한 복음」, 4장 10절-14절 대한성서공회, 『성경』,
16.물론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을 미완으로 그친 자신의 ‘도덕형이상학’ 체계의 일부로 생각했다.
17.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애착’으로 번역된 attatchment의 이중적인 쓰임이다. 라투르는 대개의 경우 이를 정념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또한 다른 경우에는 경제적 연쇄항들의 견고한 ‘연결’(단어의 본래 의미로서의 ‘부가’)의 의미로도 사용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라투르는 “상품과 사람 간의 상호 얽힘이 행성 규모로 급증하는 것”을 [ATT]로 표기한다(675).
18.‘장치들로서의 물질성’은 늘 재생산[REP] 과정을 거친다. 라투르는 이 재생산을 움직이는 것을 ‘힘’FORCE라고 한다(157). ‘물질세계’라는 데카르트적 용법 대신에 ‘힘의 선’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18세기 이후 칸트, 로저 조셉 보스코비치(Roger Joseph Boscovich) 등이 이미 데카르트의 연장실체와는 다른 물질의 힘 이론을 제시했다. Val Dusek, Review; Bruno Latour, 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An Anthropology of the Moderns, Notre Dame Philosophical Reviews, University of Notre Dame, 2014. 3. 11, https://ndpr.nd.edu/reviews/an-inquiry-into-modes-of-existence-an-anthropology-of-the-moderns/(2024년 5월 3일 최종 접근) 참조.
19.라투르는 정치적 마키아벨리즘에 대해 부정적이다. 마키아벨리즘은 정치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90 참조.
20.좌파 정치에 대한 라투르의 오래된 실망감과 적대를 확인한다면 우리는 적지 않게 실망할 수도 있다. 거의 유럽 의회 좌파에 대한 성토문에 가까운 「탈냉전시대의 새로운 좌파정치」(김명진 옮김, 《과학사상》, 2003 봄호)는 다음과 같은 격렬한 비난으로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좌파정당들이 한 것이라곤 군비축소가전부인 것 같다. 좌파정당들은 시대의 변화로부터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쟁점과 상황을 자신들의 용어로 그려낼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좌파정당의 담론은 그 적의 담론을 조금 가감한 것과 진배없다. 이들 모두는 누가 근대화를 더 잘 근대화하느냐를 다투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유권자들이 우파와 좌파를 분간해 내기 힘들고, 따라서 그냥 좀더 젊어 보이는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Ibid., 370). 이러한 실망감은 『녹색계급의 출현』(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이음, 2022)에서 생태적인 계급에 대한 기대와 촉구로 전환된다. 전통적인 좌파의 구성과 지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21.파트리스 마니글리에, 「형이상학적 전회? - 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에 대하여」, 719 참조.
22. 이 방면에서 라투르는 마치 현상학자가 ‘사태 자체’(Sichen selbst)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순환하는 지시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간극과 존재양식 간의 공백HIATUS은 이러한 엄밀한 태도를 통해 극복하게 된다.
23.라투르의 기포드 강의, Facing Gaia: Six lectures on the political theology of nature, Polity, 2017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24.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녹색계급의 출현』, 이규현 옮김, 이음, 2022, 27.
25.Ibid., 20-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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