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정치적 어젠다와 공공성의 문제 / 이유선
- 한국연구원
- 5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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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혼란스럽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계속해서 살해하고 있고, 미국은 재선된 트럼프가 그간의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질서를 무너뜨리면서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만들고 있다. 난민 등의 문제로 곤란을 겪는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극우적인 정치 세력들이 득세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지속되고 있고, 미얀마에서 내전이 끝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네팔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에서는 부패한 권력에 맞선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 모든 과정의 공통점은 사태가 대단히 폭력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사회 저변에 퍼진 혐오의 정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적인 사태는 그만큼 적대하고 있는 세력들 간의 갈등이 심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폭력과 잔인성을 없애는 만큼 인류의 도덕적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하면 최근의 인류는 확실히 퇴보하는 듯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양극화의 문제를 어떻게 풀까?’라는 주제를 받아들었을 때 든 생각은 매우 시의적절한 논의 거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정치적 갈등이 심하다는 것과 정치적 양극화가 같은 말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치적 갈등의 한 축은 극우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전쟁광으로 보이는 네타냐후와 미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트럼프, 급격히 부상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영국의 ‘영국개혁당’, 르펜이 만든 ‘프랑스 국민연합’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혐오 발언을 일삼았던 찰리 커크의 추모식에서는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와 부총리 마테오 살비니가 연설했다. 극우적인 정치 집단은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세력을 확장시킨다. 자국민과 이민자, 남성과 여성, 가진자와 못 가진자, 이 지역 거주자와 저 지역의 거주자, 성적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 피부의 색깔이 다른 사람들, 세대가 다른 사람들 등등 갈라치기를 할 수 있으면 어떤 차이든 이들의 정치적 수단이 된다. 이들은 사람들의 좌절감에 깃든 혐오의 정서를 끌어 올리면서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우리나라 극우 집회에서 등장한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표어를 생각해 보라)는 생각을 갖도록 선동한다.
그렇다면 이들과 대척점에 있어야 할 또 다른 극단적인 정치 세력은 어떤 사람들인가? ‘양극화’라는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을 따르자면 거기에는 극좌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네타냐휴와 트럼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극좌인가? 부패한 아시아 여러나라의 집권 세력에 맞서 거리로 나온 국민들이 극좌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을 탄핵시킨 응원봉 시위대를 극좌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극우집단에 맞서는 극단적인 좌파 세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글은 양극단의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적당히 중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럴듯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극좌는커녕 좌파라고 일컬을만한 세력이나 집단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극우 집단이 죽여도 된다고 떠드는 ‘빨갱이’ 혹은 ‘반국가세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극우집단의 구호 속에서만 떠돌 뿐이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1998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미국 만들기』(임옥희 옮김, 동문선, 2003)에서 트럼프와 같은 독재자의 등장을 미리 예견한 듯한 글을 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책에서 로티는 미국의 현 상황을 경제적 카스트 제도가 부활하고 있다고 서술하면서, 세습 권력이 된 수퍼리치들이 정치적인 어젠다를 문화적 차이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경제적인 양극화의 문제로부터 대중의 시선을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좌파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의 강단 좌파들은 페미니즘과 환경문제 등에 온 힘을 쏟고 있는 한편, 힘없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할 마르크스주의적 구좌파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강단좌파가 노동 문제나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동안, 미국은 그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쌓아 올린 모든 성과를 반납한 채, 여성과 흑인 등에 대한 온갖 혐오 발언이 유행하게 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로티는 미국 사회에서 사디즘이 봇물처럼 역류하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미국인들의 사회에 대한 원한의 감정이 폭발적으로 표출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런 혐오와 원한 감정을 이용한 독재자가 권력을 잡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미국인들은 그동안 좌파는 왜 경제적 양극화에 대해 아무말도 안 했는지 묻게 될 것이라고 로티는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한 로티의 대안은 오늘날 강단을 점령하다시피한 문화적 좌파가 노동 운동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구좌파와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화에 대해서 좀 덜 말하는 대신 돈에 대해서 더 말함으로써 루저로 낙인찍힌 미국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경제적 양극화는 심화되었으며, 마침내 책이 나온 지 18년 후인 2016년 트럼프가 집권했다. 그리고 재집권한 트럼프가 ‘반란법’을 운운하면서 군대를 동원하고 있는 지금도 미국 좌파의 어젠다는 잘 보이지 않는다.
『미국만들기』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로티는 백년 후 미국에 대한 가상 소설을 써서 미국의 현 상황에 경고를 보낸 적이 있다. 로티는 1996년에 쓴 「2096년에 되돌아 보기」(Richard Rorty, Philosophy and Social Hope, Penguin Books, 1999)라는 에세이에서 2014년에 미국의 시민들이 자동 소총을 들고 거리에 나옴으로써 미국은 내전에 돌입하고 암흑기를 맞게 된다고 썼다. 이런 암흑기는 2044년까지 계속되다가 미국의 노동조합과 교회의 연합체가 군부독재를 와해시키고 미국을 재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건된 미국은 더 이상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갖는 것이 옳은가 하는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애와 이타심에 관한 것을 정치적 논제로 삼게 되며 인종적, 경제적 세습 계급의 재출현을 막을 최선의 방책을 찾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어젠다가 될 것이라고 로티는 예측했다. 로티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는 현재 미국 좌파의 어젠다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위함이었지만 오늘날 미국의 상황은 그가 소재로 삼은 내전이 실현될 것을 우려해야 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문제는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국적인 상황이 글로벌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이 능력주의 사회의 루저 혹은 루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며 불안해 하는 사람들의 좌절과 사회에 대한 원한 감정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자기 혐오의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자기 혐오는 작은 자극만으로도 얼마든지 타자에 대한 혐오로 바뀌어 분출될 수 있다. AI 등과 같은 과학기술의 발달은 대량 해고를 예고하고 있다. 수퍼리치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 질 것이다. 좌파는 문화적인 문제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안정적인 환경에서 거주하고 일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극우집단들은 빨갱이라는 유령과 싸우면서 세를 불린다. 좌파는 당연히 사회에 만연한 사디즘과 싸워야 하겠지만, 그 사디즘은 양극화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의 원한 감정이 빚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좌파의 적은 혐오 감정에 휘둘리는 좌절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자본의 탐욕과 이기심이다. 19세기 말 시카고에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기관인 ‘헐 하우스’를 창립한 제인 애덤스는 유진 데브스가 이끌었던 철도 노조의 파업인 풀먼 파업 사태에서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제인 애덤스가 길에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지나가던 흑인 노동자가 달려와 뺨을 때리자 애덤스는 그저 뺨을 몇 차례 문질렀을 뿐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노동자의 편을 들었던 존 듀이는 풀먼 파업을 두고 애덤스와 논쟁을 벌였으나, 시간이 흐른 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이 비실재적인 것이라는 애덤스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고백했다. 애덤스는 풀먼 사태를 ‘산업의 비극’이라고 불렀다. 갈등 중인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적과 상대하는 것이다. 좌파의 어젠다는 갈등을 넘어서는 공공성을 찾아내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더 큰 그림을 요구한다.

오늘날의 혼란이 내전으로 끝나는 것은 민주주의의 실패이며, 최악의 결과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올바른 대안은 민주적으로 도출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길일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애덤스는 올바른 결과는 늘 민주적으로 도달된 결과라고 말했다. 혐오에 대해 혐오로 맞서기보다 모두의 공동체를 위한 대화와 연대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다. 폭력과 혐오, 사디즘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고 싸워나가되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을 포함하는 공론장을 만들어가는 것, 그리고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을 설득해 나가는 것,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오늘날의 소위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민주주의적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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