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리석다. 100세 시대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몇 백억 우주 역사에 견준다면, 인간이 현명해지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프로이트에 따르더라도 어른의 무의식 속에는 어릴 적 마음이 담겨 있어서, 언제든 그 유치한 수준으로 ‘퇴행’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이전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전승된 기록 덕택이다. 누적된 기록들을 살피면서 진위와 선악 그리고 미추를 분별해낼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초월한다. 하지만 그것마저 인간의 어리석음을 원천적으로 막지는 못한다. 공부에 게으른 사람도 있거니와, 설사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라도 머리로 수행한 공부는 인간 존재 전체를 지혜롭게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탄생은 생명의 반복적인 리셋 과정이기에, 인간은 매번 초기화의 유치함을 모면치 못한다.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 계엄령이란 예외적인 전시 위급 상황에서 일사불란한 군대처럼 국가 전체를 조직하려는 정치적 결정이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그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는 대개,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용된 조치였다. 다행히 약 6시간만에 계엄령은 해제되었지만, 민의의 상징적 공간인 국회에 난입한 무장군인을 보고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글자 그대로 쿠데타(coup d'État: 국가를 타격함)였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대다수 시민들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2024년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계엄령이 떨어질 수 있지?”
전시 상황이 아님에도 계엄령 카드를 꺼내 든 대통령과 그 주변 세력이 이 사태의 핵심 책임자이다. 그런데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어이없어 하는 시민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걸까? 대통령을 찍었던 시민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를 찍지 않은 사람들도 안이하고 어리석었던 게 아닐까?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독재자의 출현을 기록해 두었다. 그런 일은 언제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안이한 ‘설마’는 번번이 사람을 잡는다. 우리에겐 인간의 원초적 어리석음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 필요했다.
이런 각성 상태를 항시 유지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불가능하다. 때가 되면 ‘설마’가 찾아와 방심하게 되고, 깜박 혼미한 잠에 빠져든다.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처럼, 그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 같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계속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숱한 사람들은 무지한 상태로 고통에 유린된다. 오로지 각성을 희망했던 자만이 고통을 통해 다시 각성될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고통이란 선방의 죽비처럼 어리석고 무지한 상태를 각성하게 해 주는 충격일 수 있다. 이런 식의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비극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보통 비극의 주인공은 사회적 지위나 도덕적 품성의 측면에서 일반인보다 좀 나은 사람들로 그려진다. 주인공이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설정되어야, 관객은 그의 파멸에서 연민의 감동(카타르시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악당의 파멸은 통쾌할 뿐, 그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은 대개 운명적인 빗나감, 실수(hamartia) 때문에 파국을 맞이한다. 이것은 착한 사람이더라도 불행할 수 있는 현실, 그 냉혹한 현실에 대한 비극적인 해석이라 하겠다. 반면 근대인들은 운명만으로 선인의 불행이 해석될 수 없다고 본다. 게다가 절대 선을 독점한 선인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근대의 비극적 영웅은 좀 더 일반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비극에 등장하는 맥베스, 리어 왕, 햄릿, 오셀로는 사회적 신분은 높지만 보통 사람과 거의 같은 품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어리석고 사악하다. 동시에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깨닫는 선한 양심도 가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야심과 양심’의 충돌을 기막히게 보여준 작품이다. 맥베스는 마녀가 부추긴 권력욕 때문에 자기가 모시던 왕(이자 친척)을 죽인다. 무고한 왕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정적들(뱅쿠오와 맥더프의 처자식)을 도륙한다. 그런데 이런 빌런이기만 했다면, 맥베스는 절대로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권력에 눈멀기는 했지만, 그는 양심에 번민하는 자이기도 하다. 맥베스는 자기 성을 방문한 덩컨 왕을 암살하려다 말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렇게 살인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열거한다.
첫째로 난 그의 친척이며 신하로서
그 행위를 극구 반대해야 하고, 다음으로
주인인 나 자신이 칼을 들 게 아니라
자객을 막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덩컨은
너무나 겸손하게 왕권을 행사하고
권좌가 너무나 깨끗하여 …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전집 5』,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14. 「맥베스」 1막 7장.
양심의 목소리에 따라 살인을 망설이고 주저할 때, 그녀의 아내가 그를 비난한다.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아냥댄다. 맥베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처음 권력욕의 불씨를 지폈던 마녀처럼, 맥베스 부인은 야망을 위해 더욱 더 냉혹해지라고 이렇게 충동질한다.
… 난 젖 빨린 적 있어서
갓난애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 알아요.
난 고것이 내 얼굴 보면서 웃더라도
이 없는 잇몸에서 젖꼭지를 확 뽑고
골을 깼을 거예요, 내가 만일 당신처럼
이 일로 맹세했더라면.
위의 책, 같은 곳.
결국 독재 권력을 휘두르던 짜릿한 시간이 지나자, 망상에 시달려 온 맥베스 부인은 자살하고 맥베스는 이렇게 한탄한다.
내일과 또 내일과, 내일과 또 내일이
이렇게 쩨쩨한 걸음으로, 하루, 하루,
기록된 시간의 최후까지 기어가고
우리 모든 지난날은 죽음 향한 바보들의
흙 되는 길 밝혀 줬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위의 책, 5막 5장.
이렇듯 맥베스는 권력에 취해 악행을 저지른 지난날의 모든 일들이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깨닫는다. 바닥을 치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겨우 어리석음을 깨우친 셈이다. 요컨대 양심의 목소리에 따른 망설임과 어리석음에 대한 각성 때문에 맥베스는 겨우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윤석렬 대통령은 비극적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한갓 파멸하는 빌런으로 남을 것인가? 일단 선출직 국회의원 다수(국민 다수)를 잠재적인 종북 반국가 세력으로 치부하고 불법적인 계엄령을 발동하였기에, 어떻게든 그는 파국을 면할 수는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욕먹는 빌런이냐 연민의 영웅이냐에 대한 판가름이 남았는데, 특이하게도 윤석렬은 앞서 언급한 비극적 영웅, 맥베스와 닮은 구석이 많다. 주군을 배신하고 과거 정적과 손잡을 정도로 권력에 대한 야망이 크다는 점, 그의 욕망을 부추기는 마녀 같은 주술사들이 주위에 포진해 있다는 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인이 곁에 있다는 점, 자국민에게 “처단”이라는 극단적 언사를 구사할 정도로 포악하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맥베스 같은 비극적 영웅이 되려면, 각성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과연 그에게 양심이 있(었)을까?
엄숙한 표정으로 결연히 불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하는 그에게서 양심의 흔적이라도 정밀하게 찾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다. 차라리 그의 수족 역할을 했던 계엄군들의 주저하는 몸짓에서 찾는 게 훨씬 쉽고도 유의미하다. 명령 이행을 지체시킨 각자의 양심이 계엄령 해제를 위한 국회의 결정에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이다. 작은 양심들이 모이고 쌓여 가까스로 계엄을 막은 셈이다. 나는 이런 양심의 원천을 멀리는 민주화의 역사에서, 가깝게는 (직전 계엄령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2023)과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114쪽.
글쎄, 대통령이 이런 작품들을 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봤더라도 삐딱하게 ‘양심 없는 야망’만을 키웠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의 시간에서도 배우는 바는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최고로 똑똑하고 선한 존재라 자부할 것이다. 독재자들의 상투어, ‘계엄 선포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확신할 것이다.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한다. 스스로가 어리석다 말할 수 있는 자만이, 다시 말해 어리석음을 인정함으로써 간신히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온 자만이, 슬기로운 자다. 마지막으로 그 슬기의 시간조차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음을 명심하는 자만이 가장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대략 100년 전, 철학과 과학, 음악과 문학의 수준이 세계 최고였던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권을 잡았다. 그런 그가 세계를 전쟁 지옥으로 만든 악질 빌런이 되었다. 독일 국민 대다수는 그리 될 줄 몰랐다. 그때도 ‘설마’가 사람을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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